[김준태의 왕의 결단⑬ 세종의 야인정벌] 온천 휴양으로 적 안심시킨 후 기습
[김준태의 왕의 결단⑬ 세종의 야인정벌] 온천 휴양으로 적 안심시킨 후 기습
세종 14년 12월 9일. 평안도 감사로부터 장계가 도착했다. 야인(野人:여진족) 기병 400여 명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와 백성들을 붙잡고 곡식과 재물을 노략질하니 그들을 추격하여 붙잡혀 가던 사람 26명과 말 30필, 소 50마리 등 일부를 도로 되찾아 왔으나 나머지는 놓쳤고,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크게 진노했다.세종이 “우리가 그 자들을 끝까지 추격해 응징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국경을 마음대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니(야인 부족의 거주지는 명나라의 직접 통치 지역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명나라 영토였다)명 황제에게 이러한 사정을 말해 국경을 넘어 야인을 공격하겠다는 허락을 받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며 군사적 응징을 거론했다.
그러자 대다수의 신하들은 반대했다. 오랑캐는 교린(交隣) 정책에 따라 인의(仁義)로 대해 교화시키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잘 달래면서 관리해야지 섣부르게 정벌에 나섰다가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명나라에 국경을 넘어가겠다는 양해를 구한다고 해도 허락을 해줄지 확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명이 거부하여 공식적으로 명문화 된다면 야인들은(명나라 지역으로 달아나기만 하면 조선군은 절대로 자신들을 쫓아올 수 없으니) 이것을 노려 국경을 더욱 어지럽힐 거라는 것이다.
신하들은 “치욕을 당하고 잠자코 있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 저들의 죄를 엄하게 따져 묻되”(황희),“반성하면 전과 같이 대해주고 그렇지 않으면 저들을 내버려두고 국경을 튼튼히 하는 데에만 집중하자”(조말생)고 주장했다. “우리가 변경을 굳게 지키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이 먼저 와서 화친을 청할 것입니다”(허조)라는 것이 신하들의 생각이었다(세종15.12.10).
세종은 일단 신하들의 의견을 따르는 듯 했으나 이번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야인(野人)들이 갖은 문제를 일으켰지만 조선에서는 계속 후하게 대해주었다. 야인 부족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다시 이와 같은 일을 벌이니, 이번에야말로 실력행사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한달 여 간의 고심 끝에 마침내 정벌을 결심한다. “지난번 경들이 논의하기를 ‘파저강(婆猪江:국경을 침범한 야인들의 거주 지역) 야인들의 소행을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두자’고 했으므로 나도 동의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본즉 야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국경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사로잡아 가고 있는데, 나라에서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앞으로도 저들이 계속 침범하게 될 싹을 남겨놓는 일이다.…(중략)…그렇다고 군사와 무력을 무리하게 동원하여 저들 깊이 들어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저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무력시위를 하고자 하니 충분히 논의하여 방안을아뢰도록 하라”(세종15.1.11: 야인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의 국경을 넘어가는 문제는, 예전에 명 태종 영락제가 ‘여진은 조선이 관리하라’고 말한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평화 유지 노력에도 침범 잦자 응징이어 세종은 야인으로부터 약탈당한 지역의 백성들을 구휼하여 국경 지대의 민심을 수습하고(세종15.1.13), 전쟁터에서 화포를 능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도록 했다(세종15.1.15: 세종 때 개발된 로켓형 신무기인 신‘ 기전(神機箭)’이 실제 전장에서 활용된 것은 기록상 세종 29년 이후의 일이지만, 개량 전단계의 무기인 ‘주화(走火)’가 이 시기에 사용되었다). 현지 사정에 밝은 무장들을 파견하여 정벌 지역의 지형과 상황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며(세종15.2.10) 2월15일과 17일, 26일, 27일에 걸쳐서 의정부와 육조, 군부의 주요관리들이 모두 참여하는 전략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정벌전의 명분을 확정하고 대명·대여진 외교 전략을 논의하였으며, 토벌과 관련된 각종 전략전술과 계책들이 기획되었다.
군수물자와 병력 조달방법, 정벌군 편제에 관해서도 사소한 문제들까지 세밀하게 검토되었다(토벌 전략은 정벌군 사령관 최윤덕의 최종 검토를 거쳐 보완·확정된다). 정벌군 편성과 준비 작업이 모두 완료되고, 정벌의 세부적인 방향이 그려지자 세종은 “야인들을 안심시켜 저들이 방심했을 때 공격해야 한다”고 천명한다(세종15.2.28). 그러면서 갑작스레 온양 온정(溫井:온천)으로 떠났다. 세종이 재위 기간 내내 여러 가지 병을 앓느라 치료 목적으로 자주 온천에 다녀오곤 했지만, 이 시기에 특별히 몸이 좋지 않았다는 기록은 없었다.
3월 25일, 세종은 온천으로 가서 한달 가까이 거기에 머물렀다. 가는 도중에 수원과 천안 등지에 들려 매사냥을 구경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전쟁 준비로 인해 백성들이 동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 온천에 가는 여유로운 모습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백성들에게‘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또한 조선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야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왕이 수도를 비우고 한 달이나지방에 내려가 있으면서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은 4월 20일에 환궁했는데, 이 시점은 최윤덕의 정벌군이 정벌 작전을 시작한 바로 직후였다. 정벌전의 개시에 맞춰서 귀경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승전보가 도착했다. 최윤덕이 이끄는 1만4962명의 정벌군은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야인 진영을 기습 공격했고 9일간의 전투 끝에 183명의 여진족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 아군의 피해는 전사 4명에 불과했다(세종15.5.5).
치밀한 준비로 대승세종은 정벌전이 끝난 뒤에 오히려 더 바쁘게 움직였다. 여러 야인부족들을 회유하여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었으며, 조선군 전사자를 위한 제문(祭文)을 직접 짓고 유가족을 위로·보상하는 등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였다(세종15.5.17). 전쟁 준비 과정에서 고생한 평안도·황해도 백성들을 위해 빌려간 곡식을 감면해 주었으며, 야인들의 보복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했다(세종15.5.22). 빈틈없는 국경 방비를 위해 방어군의 체계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환시켰으며, 유사시 백성들의 대피 대책도 마련하도록 했다. 정벌전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은 말단 병사들까지도 공정하게 포상하였고, “우리나라는 근래에 평화가 계속되어 진법(陣法)훈련(군사작전훈련)을 소홀히 하고 있으므로 각도에 진법을 훈련시켜야 한다”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전투준비 태세를 계속 점검하도록 했다.자신이 기획한 일에서 성공을 거둔 지도자들은 그 업적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더욱이 ‘전쟁의 승리’라는 군사적 성취는 지도자의 위상과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하지만 세종은 정벌전의 승리를 과시하거나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후속 대책 마련에 몰두한 것이다. “내가 보위에 오른 뒤로 주로 문치(文治)에 힘을 쓰고 군사의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었다. 내 어찌 큰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공을 이루기를 즐겨서 야인을 정벌했겠는가. 적이 먼저 우리에게 해를 끼쳤으므로 부득이 행한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 크게 승리하여 진실로 기쁘나 또한 두렵구나. 지금은 비록 성공하였을지라도, 어떻게 해야 이 성공을 보전하여 후환을 영구히 없앨 수 있겠는가”(세종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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