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왕의 결단⑮ 속대전 편찬] 영조 법을 세워 덕치를 펴다
- [김준태의 왕의 결단⑮ 속대전 편찬] 영조 법을 세워 덕치를 펴다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있는데도 시행하지 않는 것은 늘 먹는 밥과 반찬이 있는데 먹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려 시대에는 제도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 세종(世宗)조에 이르러서야 『오례의(五禮儀)』와 『경국대전(經國大典)』》이 마련된 바 있다.…(중략)…요사이 신료들이 태만한 것은 대개가 『경국대전』이 오래되어 (법과 제도들이) 폐지되고 해이해지게 된 데서 연유한 것이므로, 내가 『경국대전』을 새로 정비하여 다시 밝히려고 한 지 오래 되었다. 이것은 내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 것이니, 승정원에서는 먼저 이 취지를 내외에 두루 알리도록 하라.” (영조6.12.19)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다유교 정치사상에서는 백성의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서경(書經)』)’는 ‘민유방본’의 이념은 국가를 통치하는 목적과 방향이 ‘백성’에 두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공자로부터 주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계승되어 온 유교의 핵심가치이다. 따라서 유교를 국시(國是)로 건국된 조선의 왕들은, 폭군일지라도 ‘백성을 위한(爲民) 정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安民) 정치’의 대의(大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그런데 백성에 대해 더욱 진보적인 관점을 제시한 왕이 있었다.바로 세종(世宗)과 영조(英祖)이다.
세종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그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얽히다 보면 어지러워지므로 임금을 세워 그것을 조율하고 다스리게 한 것이다”(세종13.6.20)라고 했고, 평소 세종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았던 영조도“백성을 위해서 임금이 있을 뿐 군주를 위해서 백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천명했다. 설령 이것이 선언적인 의미라 할지라도, 임금의 존재의미를 오로지 ‘백성을 위해서’라고 규정했다는 점은 파격적이다.
영조는 이러한 백성관을 바탕으로 다양한 위민정책을 실시했다.여러 난관을 뚫고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해주는 균역법을 단행했으며, 서얼을 허통하고 노비들이 지고 있던 부담을 대폭 완화시켰다. 기존의 격쟁이나 신문고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직접 만나 그들의 애환을 묻고 듣는 ‘순문(詢問)’ 행사를 자주 거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민국(民國)’이라는 정치용어도 자주 쓰이기 시작한다. “민국을 위한 계책(民國之計:영조1.7.13)”, “단지 민국만을 생각하라.(只知民國:영조9.1.1)”, “양역을 개혁하는 것은 민국의 큰 사업이다(良役變通 民國之大事:영조9.12.26)”, “민국을 위해 바친 몸인데, 어찌 감히 스스로 편하기를 바라겠는가(旣許民國何敢自便:영조38.11.21).” 얼핏 보면 ‘백성(민)’과 ‘나라(국)’를 나란히 연결한 것으로, 정치에서 일상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지 않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영조 이전에는 ‘민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다 영조에 이르러 사용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백성’과 ‘나라’를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는 인식이 공고해졌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대해 영조는 ‘경국대전’의 정신과 제도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체제와 경국대전이 만들어졌을 당시의체제 사이에는 분명 간극이 존재하지만, ‘옛 선왕들이 전해준 법을 밝혀 정치를 펼쳐가는 것’은 유교 국가의 왕이 당연히 이행해야 할책무였기 때문이다. 하위법인 수교와 수교가 충돌했을 경우 이를 조율해 줄 헌법이 명확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일시적인 교지가 곧 수교(법률)가 됨으로써 법조문이 수시로 들쑥날쑥 하게 되니 어떤 수교를 따라야 할지 몰라 관리들은 집행하기가 어렵고 백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속대전 어제서문) 또한 영조는 그 당시 조선이 겪고 있던 각종 폐단과 문제점들이 ‘경국대전’이라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구체적인 사례 보완그렇다고 영조가 ‘경국대전’으로의 무조건적인 복고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현실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옛 제도를 전격적으로 시행하게 되면 소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백성에게 편리한 부분부터 먼저 시행하라”(영조4.9.5)고 지시하는 등, 당대에 실행가능한 부분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법 집행의 실효성을 높이고, 법조항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선왕들이 내린 수교를 모아 보충했다. 당대에 적합하지 않은 항목들에 대해서도 보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속대전』은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속대전』이 『경국대전』과는 별개의 새 ‘헌법’은 아니다. 변화된 현실을 반영한 ‘개정판 경국대전’이라고 보면 된다. 경국대전의 틀에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완함으로써 더욱 내실을 갖춘 것이다. 영조는 『속대전』의 지향점을 ‘백성을 관후(너그럽고 후덕)하게 대하기 위해서’라고 규정했다. “속전의 대요(大要)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 요점이 무엇인가 하니 관(寬)과 후(厚)가 그것이다.” (속대전 어제서문) 조선에서 ‘백성’이 강조되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법전의 편찬 취지를 ‘백성에 대한 관용’이라고 명시적으로 천명하고, 그에 대한 어제(御製)서문을 왕이 직접 덧붙인 것은 다른 법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조는 『속대전』속에 악형을 폐지하고, 구속 요건을 강화하며, 법정심리 절차를 체계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감옥 환경을 개선하고, 국문(鞠問)의 제한 규정을 두었으며, 형벌의 기준을 낮췄다. “(속대전중 형벌에 관한 규정이) 백성에게 편리하나 너무 너그러운 것이 흠”이라는 신하의 문제 제기에 “만약 백성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어찌 너그러운 것을 걱정하겠는가.”(영조20.10.11)라고 대답한 것은 영조의 의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조는 형벌뿐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법조문들도 대거 속대전에 포함시켰다.
백성들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 백성들을 침탈하는 행위를 엄벌하는 조항들을 추가시켰다. 신문고를 부활하고 그 운용절차를 체계화하였으며 노비를 보호하는 조문들도 기재하도록 했다.요컨대 『속대전』은 ‘백성’의 존재가 하나하나 강도 높게 반영된 것으로 ‘민국(民國)’을 지향한 영조의 정치목표가 잘 드러났다고 할수 있다. 영조는 이를 통해 국가제도 전반을 일신시키면서 조선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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