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숙하면서도 낯선 욕망

소녀가 경직된 자세로 손을 비비 꼬는 것처럼 앉아있다(그림1). 둥그렇게 뜬 커다란 두 눈이 무언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성숙한 젖가슴에, 여인의 분위기를 풍기기에는 아직 이른 마른 체형의 몸 뒤로 무언가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거무스레한 덩어리를 화가가 그려 넣은 이유는 소녀가 주위로부터 느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 무엇이 이토록 소녀를 긴장하게 하는가.
우리는 뚜렷하지는 않으나 분명히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정체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에 불안을 느낀다. 이를 ‘불안한 낯섦’이라고들 부른다. 내 작업실은 네모난 방인데, 출입문 외에 문이 하나 더 있다. 보일러 기계실 문인데, 그 문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열어 볼 이유가 없다.
그런데 밤이 어둑해져 오면 나는 문득 그 문이 섬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몇 달 동안 열지 않은 그 문안에 누군가 낯선 사람이라도 숨어있지는 않을까. 알 수 없는 동물이나 곤충 떼가 문을 여는 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지는 않을까 해서.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구두 소리를 또각또각 울리며 차에 다가간다.
이번엔 컴컴한 뒷좌석이 꺼림칙하다. 뒤에 누가 있을 것만 같은데 돌아보지는 못하겠고, 차라리 뒷좌석이 없으면 싶을 때가 있다. 운전하다가 백미러에 간혹 스윽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면 뒤통수가 찌릿찌릿 서늘해 온다. 그러나 진정으로 서늘한 경험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친숙한 낯섦’이다. 그가 예로드는 것은 인형이다. 늘 가지고 놀던 인형이 어느 날 갑자기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를 상상해 보라.
컴컴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익숙한 그것이 불현듯 낯설게 다가오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프로이트는 집처럼 친숙하다는 뜻을 지닌 캐니(canny)와 불편하고 이질적이라는 뜻의 언캐니(uncanny)가 사전적으로 는 반대지만, 일상에서는 동전의 앞뒤처럼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늦은 밤에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사람이 없는 층에서 문이 스르르 한번 열렸다가 닫힌다. 익숙하던 좁은 공간에 갑작스레 이질적이고 기이한 공기가 흐르고, 온몸의 잔털들이 조금씩 서는 듯 오싹해진다. 이런 기분이 바로 친숙한 낯섦 아닐까.
서두에 묘사한 뭉크(1863-1944)의 ‘사춘기’에서 소녀를 압도하는 실체가 없는 시커먼 그림자는 어떤 불안감일까.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기 전의 장면을 상상해 보자. 소녀는 지금 자신의 몸을 누군가가 전부 더듬고 간 듯, 마치 누군가의 손길이 몸에 닿아 자신이 발가벗겨짐을 당한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자다가 누군가, 어떤 관능적인 존재가, 바로 곁에서 자신을 덮치는 기분이 들었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지나치게 기분이 생생해서 정말로 귀신이 자신을 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의 꿈이다. 밤중에 나타나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적인 욕망을 펼치는 존재가 있다는 상상은 그 유래가 천 년을 넘길 만큼 오래된 것이다.

유명한 인쿠부스는 페르디안 호들러(1853-1918)가 그린 ‘밤’이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다.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든 밤중에 검은 천으로 모습을 가린, 마치 뭉크가 그려놓은 시커먼 그림자와도 같은 인쿠부스가 어떤 남자의 몸 위에 앉아 있다. ‘어, 이게 뭐야’ 남자는 눈을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라 베일을 벗기려 든다. 검은 베일의 존재는 가위를 누르는 악몽을 생명체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자가 취하고 있는 자세, 그러니까 인쿠부스가 그의 벌린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지금 남자가 꾸는 악몽은 아마도 욕정적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덮침을 당하는 희생자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자기 안에 꿈틀거리던 욕망의 실체와 대면한 것 아닐까.
인간이 욕망에 눈을 뜬 것은, 에덴의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먹은 후 수치심과 두려움에 몸을 숨기려고 한 장면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욕망은 그 원천을 죄의식에 두고 있는데, 이 죄의식은 모든 성적인 금기들과 직결되어 있었다. 수많은 금기로 인해 욕망은 점차 죽음처럼, 악마처럼, 어둠의 그림자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말았다.
아무튼 인쿠부스나 수쿠부스 같은 요상한 유령의 방문을 받은 여자나 남자는 몸이 쇠약해졌고 기진맥진해졌다고 한다. 특히 몽마의 방문을 받고 밤새 뒤척였던 사람들은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곧바로 죽어 흡혈귀가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왜 하필 흡혈귀로 변할까? 그러고 보니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1897년에 출간한 흡혈귀 괴기소설 ‘드라큘라 (Dracula)’에서도 욕망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드라큘라’보다 몇 년 앞서 뭉크는 ‘흡혈귀’를 그렸다. 시뻘건 머리칼을 한 여자 흡혈귀가 희생 제물로 선택한 남자의 생명을 흡입하고 있는 장면이다. 흡혈귀는 한번의 흡혈로 결코 충족되지 못하는 존재다. 늘 부족하고 결핍된 상태이며, 순간의 채움을 위해 끝없이 피를 갈구하는 그녀는 형상화된 욕망 그 자체다.
흡혈귀는 피를 빨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함께 앗아간다. 피는 생명 자체와 동일시되는 귀중한 액체다. 남자에게는 한가지 더 소중한 액체가 있다. 바로 정액이다.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생명의 액체인 피와 그에 상응하는 액체인 정액이 유출되고 상실되리라는 상상은 몽마와 흡혈귀의 신화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흡혈귀가 지닌 에로틱한 면모들은 궁극적으로 욕망에 대한 근원적 두
려움과 관련돼 있다. 욕망은 내 안에 있지만, 내가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 내 안에 있지만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살아있는 그것. 우리 몸이 감지하는 모호한 불안과 죄의식과 두려움의 바닥에는 이렇듯 친숙하면서도 낯선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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