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nagement - 정도전도 반대한 천도 태종 때 이뤄

1399년 3월, 조선은 도읍을 옮긴지 채 몇 해 되지도 않아 옛 수도 개경으로 환도(還都)를 단행한다. 『정종실록』의 기록이 많이 생략되어 있어서 왜 ‘환도’를 하게 됐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한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는 서운관(書雲觀:천문을 관측하는 기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옮겼다는 기록만 나와 있을 뿐이다(정종1.2.26). 아마도 ‘1차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해 야기된 정국의 혼란과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자의 난 때문에 다시 개경으로태조는 이러한 개경 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이제 다시 환도하였으니 실로 백성들 보기가 부끄럽도다. 그러므로 (거처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반드시 어두운 때를 택해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내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겠다.”(정종1.3.13). 신하들의 우려를 무릅쓰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천도를 했는데, 오히려 안 좋은 일만 당해서 다시 돌아오니 백성들 보기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보위에 오른 직후부터 천도를 추진했었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 왕조의 대업을 시작하고 싶다는 야심 찬 다짐 외에도 전 왕조의 기득권 세력을 약화시키고 신흥세력의 기반을 확보한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 창업 과정에서 흘린 피, 고려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개경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 개경의 권문세족들에게 변방 장수 취급을 받았던 차별의 기억 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라”고 명령하는데(태조1.8.13), 궁궐을 비롯하여 수도에 걸맞은 도시 기반시설에 대한 건축 계획이 준비되기는커녕 도읍이 들어설 땅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천도부터 명령한 것은 그만큼 태조의 뜻이 절실했음을 보여준다.
처음 태조가 천도를 거론했을 때만 해도 반대여론이 비등했다. 반대하는 신하들은 ‘개경만한 명당이 없고, 아직 개국 초기라 나라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된 논리로 내세웠는데, 실상은 그들 대부분이 개경에 생활과 재산의 기반을 두고 있어 그것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조의 결심은 확고했다.
태조가 천도 후보지 중 하나였던 계룡산을 직접 방문하여 살펴보기 위해 길을 나서자 신하들은 ‘왕비가 병이 났고, 몇몇 고을에 도적들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행차를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태조2.2.1). 이에 대해 태조는 “힘있는 자들이 하나같이 도읍 옮기는 것을 싫어하므로, 이를 구실로 삼아 천도를 중지시키려 드는 것이다”고 역정을 내면서 “경들도 도읍을 옮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왕조(王朝)가 바뀌어 새로이 천명(天命)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기 마련이었다(태조2.2.1)”며 신하들을 설득한다.
이어 하륜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무악(毋岳:서대문 안산)’이 다음 후보지로 거론되자, 태조는 다시 “내가 친히 보고 정하고자 한다”며 노구를 이끌고 길을 나섰다(태조3.2.23). 그런데 지관들이 각자의 의견만을 고집하며 결론을 내지 못했고, 태조는 “서운관이 전조(고려) 말기에 개경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며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었다. 근래에 와서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괴롭힌 바 있는데, 이제 다시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계룡산 공사를 중지시키고) 와서 보니 또 여기는 좋지 못하고 차라리 송도가 낫다며 국가를 속이고 있다. 이는 진작에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로구나(태조3.8.11)”며 크게 진노했다.
천도 기획한 정도전도 처음엔 반대이러한 와중에 정도전의 상소가 올라왔다. 정도전이 한양의 도시 공간을 설계하고 경복궁과 궁궐 내 각 전각의 이름을 직접 지었기때문에 천도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않다. 태조가 한양 천도를 기정사실화한 이후에 관련 업무를 맡은 것이다.
그는 “(전략) 한나라 고조는 유경(劉敬)의 건의에 따라 그날로 서쪽 관중(장안) 땅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항우는 멸망하였지만 한나라의 덕은 하늘과 같았습니다. 이후로 우문씨의 주나라와 양견의 수나라가 서로 이어가면서 관중에 도읍하였고, 당나라 또한 도읍하였는데 그 덕이 한나라와 같았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나라가 잘 다스려지느냐 어지러우냐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땅의 기운의 융성하고 쇠락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중략)…전하께서는 기강이 무너진 고려의 뒤를 이어 즉위 하신 바, 백성들의 기운이 아직 소생하지 못하고 나라의 터전도 아직 굳건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모든 것들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힘을 쉬게 하여 축적이 되도록 하고, 위로는 하늘의 때를 살피고 아래로는 사람의 일을 올바로 처리하면서 적당한 시점을 기다려 도읍터를 찾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 될 것입니다”(태조3.8.12)라며 태조의 천도 움직임을 부정적으로 봤다.
중국에서는 여러 왕조가 오랜 세월 장안을 수도로 삼았지만 한나라와 당나라 같이 위대한 왕조가 둘이나 출현했다. 따라서 개경의 지기가 쇠했다고 해서 천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정치를 펼쳐나가느냐에 있는 것이지, 도읍을 옮기는 것 자체는 중요치 않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태조는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정도전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천도를 고집했고, 마침내 8월 13일 한양 천도를 최종 확정한다.
이처럼 절실하게 원했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추진한 한양 천도가 불과 몇 년 만에 부정되었으니 태조의 참담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6년 후인 1405년(태종 5년), 태종은 “우리 태상왕께서 새 도읍을 창건하시었으니, 이것은 이씨(李氏)의 바꿀 수 없는 도읍이다…(중략)…그간 부왕께서 시작하신 일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으니 과인의 죄이다(태종5.8.9)”라며 한양 재천도를 결심한다. 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등을 겪은 태종이 정국을 일신하기 위해 내린 결정으로 보여지는데, 이 보고를 들은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왕이 한경(漢京:한양)으로 환도하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라며 격려했다고 한다(태종5.8.11). 600년 수도 서울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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