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useums - “그림은 전쟁수단이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점령당해 많은 수모를 겪었다. 나치의 잔혹한 통치 아래 겉으로만 활기차 보였던 파리 미술계의 모습은 그중에서도 특히 가슴아팠다. 예술성보다 나치의 기준을 중심으로 한 엉터리 미술 행사들이 달력을 가득 메웠다. 반면 프랑스 곳곳의 허름한 은신처로 피신한 미술가들은 예술 영역까지 침범한 전쟁에 저항했다. 그들은 신념과 나치가 “퇴폐적(degenerate)”이라고 규정한 작품 때문에 박해 받았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쟁미술(Art at War), 프랑스 1938~1947 전’(2013년 2월 17일까지)은 이 어두운 시대를 조명한다. 깊은 슬픔을 자아내는 이 전시회에는 미술가 100명의 작품 400점이 전시됐다.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등 저명 작가부터 작품 수는 얼마 안 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무명 작가까지 다양한 미술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다른 10개국 미술관에서 대여해 온 작품도 포함됐다.
이 전시회는 극적인 시대와 장소에서 미술가들이 살아낸 삶을 조명할 뿐 아니라 역사적 교훈을 준다. 나치의 반(反)유대 선전 포스터 등이 그대로 전시돼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가장 의미심장한 작품들 중 대다수는 나치 수용소 안에서 제작됐으며 이전에 공개된 적이 없거나 자주 접할 수 없었다.
절망적인 듯하면서도 아이러니컬하고, 일상적인 듯하면서도 상상의 세계를 다룬 이 작품들은 수용소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인간 본연의 저항정신을 나타냈다. 피카소는 1945년 이런 말을 했다. “그림은 아파트나 장식하려고 그리는 게 아니라 전쟁 수단이다.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수단이다.”
전시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으스스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관람객은 시꺼먼 삼베 포대들이 걸린 통로를 지나가야 한다. 팔다리가 해체된 인형 사진들(독일 초현실주의 미술가 한스 벨머의 작품)이 전시회 전체 분위기를 나타내 준다. 1938년 1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연상케 한다.
뮌헨 협정의 대나치 유화정책으로 유럽의 운명이 결정되기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당시 마르셀 뒤샹은 전시회장 서까래에 석탄 포대 1200개를 매다는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회 큐레이터인 로랑스 베르트랑 도를레악과 자클린 뭉크는 “1938년 전시회는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한 예감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전시회장에는 정신병원에서 녹음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마른 나뭇잎들이 나뒹굴었으며, 석탄 난로 위에서 커피 원두를 볶는 냄새가 감돌았다. 살바도르 달리의 섬뜩한 설치미술 작품 ‘레이니 택시’(또는 ‘택시 안에서 썩어가는 마네킹’)는 어두운 전시실에서 관람객들이 손전등을 비춰 보도록 전시됐다.
도를레악과 뭉크는 그것이 다가올 공포에 대한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해석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시회가 열린 지 몇 개월도 안 돼 거기 참여했던 주요 미술가들이 시골에 은신하거나 국외로 추방됐다. 그들은 암울한 새 질서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사람들(personae non gratae)’로 규정됐다.
벨머와 막스 에른스트는 ‘위험한 외국인’으로 분류돼 프랑스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됐다. 1938~1946년 그런 수용소 200군데에 외국인과 유대인, 공산주의자 등 약 60만 명이 감금됐다. 그중 일부는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매우 다양하고 국제적이었던 파리 미술계는 곧 병적으로 위축됐다.
하지만 나치의 사악한 이상에 맞는 미술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아돌프 히틀러가 빈 미술대학 입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한 ‘한 맺힌 미술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는 1942년 튈러리 공원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탄탄한 몸매의 아리아인을 조각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전쟁미술 전’에는 1942년 부분적으로 문을 연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당시 전시품들이 소개됐다. 당시 미술관 측은 대담한 추상화나 무질서를 상징하는 작품, 외국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작품은 배제시켰다. 이 전시회는 순전히 나치 취향에 맞춰 기획됐다. 풍경화와 누드화, 종교적 이미지가 주를 이뤘다. 나치에 동조한 화가 마샬 필립 페탱의 ‘일, 가족, 조국’ 3부작은 그 전시회 의도와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시골에 은신하거나 국외로 추방되거나 수용소에 수감된 미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나치에 저항했다. 작품 전시를 금지당한 피카소는 1937년 ‘게르니카’(스페인 내전을 주제로 한 피카소 회화의 대표작)를 제작한 센강 좌안에 있는 아틀리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갈색과 회색 물감으로 어두운 분위기가 나는 그림들을 그렸다(이 작품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빛을 발했다). 단순하면서도 장난스러운 조각 ‘황소머리’는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이용해 만든 작품으로 전쟁의 궁핍한 환경에 굴하지 않은 그의 예술적 고집이 돋보인다.
위험에 처한 미술가들은 지중해 연안 지방으로 피신해 미국인 배리언 프라이(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럽 예술가를 미국으로 피신시켰다)가 안전한 외국으로 탈출시켜 줄 때까지 기다렸다.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타로와 비슷한 마르세이유 카드놀이(Jeu de Marseille)를 개발했다. 전시회에는 여러 화가가 공동으로 작업한 유명한 카드 세트가 소개됐다.
거기 그려진 환상적인 그림 대다수가 낙서처럼 끼적거린 수준이다. 루마니아계 유대인 빅터 브라우너는 프라이가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데 실패한 미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알프스 지방에서 숨어 지내는동안 미술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호두나무 착색제와 밀랍을 이용해 계속 그림을 그렸다. 결핍이 독창성을 낳은 경우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수용소 수감자들의 작품이다. 보잘것없는 재료들 중 일부는 철조망이나 땅에 구덩이를 파서 만든 변소, 이(lice), 전염병 등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표현했다. 펠릭스 누스바움이 1940년에 그린 회화 ‘수용소에서’는 그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보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황량하고 적막하다.
현실 도피적인 환상의 세계(escapist fantasies)를 그린 작품들도 있다. 귀르스 수용소를 주제로 한 호르스트 로젠탈의 만화책에는 미키 마우스가 등장한다. 로젠탈은 이 작품에 ‘월트 디즈니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출판함’이라는 풍자적인 부제를 붙였다. 로젠탈 역시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단순하면서도 웅변적인 작품들은 깊은 인상을 준다. 새장 안에 갇힌 우표 크기의 새나 한 수감자가 성냥갑 안에 만든 감방 모형 등이다. 이 감방 모형은 작가가 부모에게 새해 선물로 주려고 만들었다. ‘1944년엔 행운이 함께 하기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전시회의 큐레이터 도를레악과 뭉크는 카탈로그에 이렇게 썼다. “전체주의의 불건전성에 저항하는 창작의 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無)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뭔가를 창조하는 행위는 위대하다.” 야심 차게 기획된 ‘전쟁미술 전’을 두고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비판이 인다. 전시회는 종전 시점을 훌쩍 뛰어넘어 그 후의 예술적 카타르시스까지 조명한다. 영혼의 부활과 호화로운 재료에의 탐닉, 의도적으로 결함 있게 묘사된 인간의 형태, 심지어 장 뒤뷔페의 아르 브뤼(Art Brut, 정신병자·어린이 등 그림에서 나타나는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형태의 미술)까지 다룬다.
하지만 이 전시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전쟁과 미술에 얽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다. 알자스 출신인 잔 뷔셰(당시 70대)는 위험에 처한 미술가들을 숨겨 주고, 파리에 있는 자신의 화랑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의 전시회를 열었다. 또 병을 앓았던 아마추어 화가 요제프 슈타이프는 자기 집주방에서 붓을 들고 히틀러와 싸웠다.
그의 생생한 그림들은 분노와 희망, 풍자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작품은 슈타이프가 전쟁 말기에 ‘살롱 오브 드림즈’에서 전시했던 방식 그대로 전시됐다. 미술가들이 겪은 전쟁을,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겼음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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