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공동기획 한국의 리세스 오블리주⑥ - 회사 살아남는 게 지상과제 자식 능력 안되면 못 물려줘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공동기획 한국의 리세스 오블리주⑥ - 회사 살아남는 게 지상과제 자식 능력 안되면 못 물려줘
김동수 회장은 기부문화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건 세상이 너무 각박해진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수록 있는 사람들이 더 부담해야 한다. 증세도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기부를 하고 나면 무엇보다 저 자신이 흐뭇해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좋은 기부를 사람들이 많이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수록 더 나눠야죠.”
그는 한 달 전 서울에 올라왔을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 메리어트호텔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자 기사가 앞 차 운전자에게 욕을 했다. 미안한 마음에 기사에게 “호텔 쪽으로 들어가기 곤란하면 여기 세워줘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가 언짢은 듯 “메리어트호텔로 가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평소 택시를 자주 타지도 않지만 거스름돈 동전은 잘 안 받습니다. 그런데 택시비를 아끼려고 내려서 걷겠다는 뜻으로 멋대로 오해를 한 것 같아요.” 그는 이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려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복지를 실현하려면 증세도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돈은 비유하자면 우리 몸의 피 같은 것입니다. 피가 순환해야 하듯이 돈이 생산활동으로 흘러가야지 금융자산으로 묶여 있으면 안 돼요. 보유 현금이 많은 대기업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김 회장은 군산도시가스와 닭고기 가공업체인 동우의 오너이다. 두 회사 모두 상당한 규모의 중견기업이다. 군산도시가스의 매출액은 지난해 2700억원, 올해 예상 매출액은 3000억원에 이른다. B2B 업체인 동우의 브랜드는 ‘참프레’. 리얼 프레시(real fresh)에서 따왔다. 네네치킨·페리카나·다사랑 등 치킨 프랜차이즈가 거래선이다. 2010년 그는 닭고기 사업을 수직계열화하기 위해 참프레를 법인명으로 별도법인을 설립했다. 전북 부안군에 대지 20만m²(6만500평), 건평 7만9300m²(2만4000평)의 닭고기 가공 공장을 지었다.
김 회장은 5월 준공 예정인 이 공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2000억원을 투입해 설립한 초현대식 공장이다. 생닭과 생오리가 도착해 도축·가공 공정을 거쳐 출고되기까지 1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도축을 할 땐 가스와 산소를 동시에 사용할 예정이다.
동물복지를 고려한 일종의 안락사다. 이렇게 도축을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고기 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도축 설비 제작과 설치는 전 세계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네덜란드 업체가 맡았다. 공장 설립 당시 60여 명의 외국인 수퍼바이저가 공장이 자리잡은 부안에 상주했다.
그 바람에 부안의 모텔 방이 동났다고 한다. 김 회장은 3년 후 이 공장에서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120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돈은 피처럼 생산활동으로 흘러야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사람을 자르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구성원들도 “우리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잉여 인력도 별로 없다. 위기가 없었던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자금난을 겪었고, 2003년엔 준공을 앞둔 부화장이 용접공의 부주의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해 겨울엔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해 거래 농장에서 키운 닭을 대부분 살처분했다.
“외환위기 땐 고환율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자리에 누우면 천장에 달러가 어른거렸죠. 거듭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직원들이 믿고 따라준 덕분입니다. 직원들에게 환율 등 리스크 관리는 내가 맡을 테니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라고 하죠.”
외환위기 때의 일이다. 하루는 거래은행 지점장이 찾아와 “이럴 때 달러를 사 두면 돈을 벌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혼쭐을 내고 아예 그 은행과 거래를 끊었다. “그 사람이 눈으로 보고 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재무부관리도 달러를 산다고 합디다. 달러가 부족해 국민들이 장롱 속 금을 내놓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달러 사재기를 해 제품 가격이 오르면 그 짐이 다시 국민에게 전가되는 거예요.”
김 회장은 의미 있는 일, 품격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수입 닭이 국내 시장의 15~20%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자유무역협정(FTA) 영향으로 이 비율이 3~4년 후 30%까지 높아질 수 있어요. 우리 회사가 닭 수입이 더 늘지 않도록 막으면 우리 축산농가의 소득이 유지되는 거예요. 우리 대기업들도 이런 마인드를 가졌으면 합니다.”
김 회장은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업의 성장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남의 공장을 사들이면 조직과 영업권도 인수해 초기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죠. 그러나 직접 지으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뽑을 수 있고 공장을 짓는 2~3년 간 지역경제에 기여할 수 있어요. 2006년 동우를 기업공개(IPO)를 할 때도 누군가 우회상장(Backdoor Listing)을 거론하기에 정정당당하게 앞문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IPO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외국계 회사가 연 1%의 수익률을 조건으로 3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의했다. 부대 조건이 있었다. 5년 후 IPO를 하되 만일 못하면 연 11%의 페널티를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IPO를 못하면 빌린 돈의 두 배를 물어줘야 했다. 그러느니 국내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분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김 회장의 부친은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야당 소속으로 두 번 금배지를 달았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양조장을 했다. 가정은 유복한 편이었다. 대학을 다닐 땐 연탄공장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그는 겨울방학이면 집에 내려가 연탄 배달을 했다. 삼륜차 운전을 맡은 그와 두 사람의 직원이 팀을 이뤘다. 그의 팀은 다른 팀들보다 50% 이상 성과가 뛰어났다.
정부 정책·규제도 디테일 강해야비결은 연탄을 내리기 좋게 차를 바싹 붙이고 남들보다 부지런히 연탄을 내리는 것이었다. 첫 차는 남들보다 일찍, 막차는 남들보다 늦게 부렸다. 저녁이면 몸은 녹초에, 콧속이 연탄 분진으로 새카맣게 됐다. 수당은 나르는 연탄수에 비례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3만원가량 벌었다. 그때 땀 흘려 버는 돈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지금도 근로소득이 자산소득보다 값지다고 믿어요. 그러다 보니 아직도 금융소득은 꺼림칙합니다.” 연탄산업이 사양화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었다. 선거를 치르느라 빚도 졌다. 보증을 섰던 그는 그 빚을 떠안았다. 아버지가 야당 소속 이라 그런지 두 차례 세무사찰도 받았다. 그러고도 그는 연체 한번 한 일이 없다고 했다.
“사업 하는 사람이 정치에 뛰어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CEO 출신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대통령직을 맡는 것도 안 맞아요. 기업인은 효율을 중시하는데 정치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죠.”
새 정부에 대해서는 획일적 규제를 산업과 업종에 맞게 조정하기를 바랐다. 일례로 중견기업이 되면 외국인을 못 쓰는데 우리 국민이 기피하는 업종은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닭고기 가공 공장에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닭을 걸어 줍니다. 이 일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들어 안 하려 드는데 동우는 중소기업에서 졸업해 외국인을 쓸 수가 없어요. 제도와 정책도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디테일에 강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죠. 물론 외환관리 같은 필요한 규제는 정부가 해야죠.”
그의 꿈은 스스로 세운 회사들을 100년 이상 장수하는 기업으로 가꾸는 것이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혁신을 해야죠. 두 아들에게 회사에 들어와 밑바닥 일부터 하게 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뜻이 있고 인성 면에서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경영수업을 하고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주주로 남게 할 거예요. 회사가 살아남아 성장하는 게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죠.”
김 회장의 장모는 군산의 유명 빵집 이성당의 4대 사장이었다. 이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제과점으로 알려져있다. 연 매출액이 25억원이던 이성당은 그의 처남댁이 물려받아 72억원 규모로 키웠다. 가족기업으로 성공적인 승계가 이루어진 케이스다.
3년 전 작고한 장모는 평소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작고 당시 지역 신문은 ‘군산시민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고 기사를 실었다. 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김 회장 부인은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이 기부를 하게 된 건 아내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했다.
“집사람은 수해가 나면 자식들에게도 의연금으로 몇 십만원씩 내놓으라고 합니다. 아이들도 그 말에 따르고요. 200만원 짜리 전셋방에서 제가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유로운 사람이에요. 인성이 좋은 거죠.”
그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해 젊은 세대에게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반성을 해보지만, 젊은 세대에 대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이 구직난 속에서도 여전히 구인난을 겪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기피하기 때문이죠. 안정적인 일 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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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를 하고 나면 무엇보다 저 자신이 흐뭇해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좋은 기부를 사람들이 많이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세상이 너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럴수록 더 나눠야죠.”
그는 한 달 전 서울에 올라왔을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 메리어트호텔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자 기사가 앞 차 운전자에게 욕을 했다. 미안한 마음에 기사에게 “호텔 쪽으로 들어가기 곤란하면 여기 세워줘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기사가 언짢은 듯 “메리어트호텔로 가자고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평소 택시를 자주 타지도 않지만 거스름돈 동전은 잘 안 받습니다. 그런데 택시비를 아끼려고 내려서 걷겠다는 뜻으로 멋대로 오해를 한 것 같아요.” 그는 이 각박한 현실을 타개하려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했다. 복지를 실현하려면 증세도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돈은 비유하자면 우리 몸의 피 같은 것입니다. 피가 순환해야 하듯이 돈이 생산활동으로 흘러가야지 금융자산으로 묶여 있으면 안 돼요. 보유 현금이 많은 대기업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김 회장은 군산도시가스와 닭고기 가공업체인 동우의 오너이다. 두 회사 모두 상당한 규모의 중견기업이다. 군산도시가스의 매출액은 지난해 2700억원, 올해 예상 매출액은 3000억원에 이른다. B2B 업체인 동우의 브랜드는 ‘참프레’. 리얼 프레시(real fresh)에서 따왔다. 네네치킨·페리카나·다사랑 등 치킨 프랜차이즈가 거래선이다. 2010년 그는 닭고기 사업을 수직계열화하기 위해 참프레를 법인명으로 별도법인을 설립했다. 전북 부안군에 대지 20만m²(6만500평), 건평 7만9300m²(2만4000평)의 닭고기 가공 공장을 지었다.
김 회장은 5월 준공 예정인 이 공장에서 살다시피 한다. 2000억원을 투입해 설립한 초현대식 공장이다. 생닭과 생오리가 도착해 도축·가공 공정을 거쳐 출고되기까지 14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도축을 할 땐 가스와 산소를 동시에 사용할 예정이다.
동물복지를 고려한 일종의 안락사다. 이렇게 도축을 하면 스트레스를 덜 받아 고기 맛이 좋아진다고 한다. 도축 설비 제작과 설치는 전 세계적으로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네덜란드 업체가 맡았다. 공장 설립 당시 60여 명의 외국인 수퍼바이저가 공장이 자리잡은 부안에 상주했다.
그 바람에 부안의 모텔 방이 동났다고 한다. 김 회장은 3년 후 이 공장에서 5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120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돈은 피처럼 생산활동으로 흘러야그가 경영하는 회사는 사람을 자르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구성원들도 “우리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잉여 인력도 별로 없다. 위기가 없었던건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자금난을 겪었고, 2003년엔 준공을 앞둔 부화장이 용접공의 부주의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해 겨울엔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해 거래 농장에서 키운 닭을 대부분 살처분했다.
“외환위기 땐 고환율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습니다. 자리에 누우면 천장에 달러가 어른거렸죠. 거듭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직원들이 믿고 따라준 덕분입니다. 직원들에게 환율 등 리스크 관리는 내가 맡을 테니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라고 하죠.”
외환위기 때의 일이다. 하루는 거래은행 지점장이 찾아와 “이럴 때 달러를 사 두면 돈을 벌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혼쭐을 내고 아예 그 은행과 거래를 끊었다. “그 사람이 눈으로 보고 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재무부관리도 달러를 산다고 합디다. 달러가 부족해 국민들이 장롱 속 금을 내놓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달러 사재기를 해 제품 가격이 오르면 그 짐이 다시 국민에게 전가되는 거예요.”
김 회장은 의미 있는 일, 품격 있는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수입 닭이 국내 시장의 15~20%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자유무역협정(FTA) 영향으로 이 비율이 3~4년 후 30%까지 높아질 수 있어요. 우리 회사가 닭 수입이 더 늘지 않도록 막으면 우리 축산농가의 소득이 유지되는 거예요. 우리 대기업들도 이런 마인드를 가졌으면 합니다.”
김 회장은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업의 성장을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남의 공장을 사들이면 조직과 영업권도 인수해 초기에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죠. 그러나 직접 지으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뽑을 수 있고 공장을 짓는 2~3년 간 지역경제에 기여할 수 있어요. 2006년 동우를 기업공개(IPO)를 할 때도 누군가 우회상장(Backdoor Listing)을 거론하기에 정정당당하게 앞문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IPO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외국계 회사가 연 1%의 수익률을 조건으로 3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의했다. 부대 조건이 있었다. 5년 후 IPO를 하되 만일 못하면 연 11%의 페널티를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IPO를 못하면 빌린 돈의 두 배를 물어줘야 했다. 그러느니 국내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분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김 회장의 부친은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이었다. 그의 고향인 전북 군산에서 야당 소속으로 두 번 금배지를 달았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양조장을 했다. 가정은 유복한 편이었다. 대학을 다닐 땐 연탄공장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그는 겨울방학이면 집에 내려가 연탄 배달을 했다. 삼륜차 운전을 맡은 그와 두 사람의 직원이 팀을 이뤘다. 그의 팀은 다른 팀들보다 50% 이상 성과가 뛰어났다.
정부 정책·규제도 디테일 강해야비결은 연탄을 내리기 좋게 차를 바싹 붙이고 남들보다 부지런히 연탄을 내리는 것이었다. 첫 차는 남들보다 일찍, 막차는 남들보다 늦게 부렸다. 저녁이면 몸은 녹초에, 콧속이 연탄 분진으로 새카맣게 됐다. 수당은 나르는 연탄수에 비례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3만원가량 벌었다. 그때 땀 흘려 버는 돈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그는 말했다.
“죽을 힘을 다해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지금도 근로소득이 자산소득보다 값지다고 믿어요. 그러다 보니 아직도 금융소득은 꺼림칙합니다.” 연탄산업이 사양화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은 기울었다. 선거를 치르느라 빚도 졌다. 보증을 섰던 그는 그 빚을 떠안았다. 아버지가 야당 소속 이라 그런지 두 차례 세무사찰도 받았다. 그러고도 그는 연체 한번 한 일이 없다고 했다.
“사업 하는 사람이 정치에 뛰어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CEO 출신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대통령직을 맡는 것도 안 맞아요. 기업인은 효율을 중시하는데 정치는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되죠.”
새 정부에 대해서는 획일적 규제를 산업과 업종에 맞게 조정하기를 바랐다. 일례로 중견기업이 되면 외국인을 못 쓰는데 우리 국민이 기피하는 업종은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닭고기 가공 공장에서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닭을 걸어 줍니다. 이 일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힘들어 안 하려 드는데 동우는 중소기업에서 졸업해 외국인을 쓸 수가 없어요. 제도와 정책도 디테일에 강해야 합니다. 디테일에 강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죠. 물론 외환관리 같은 필요한 규제는 정부가 해야죠.”
그의 꿈은 스스로 세운 회사들을 100년 이상 장수하는 기업으로 가꾸는 것이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혁신을 해야죠. 두 아들에게 회사에 들어와 밑바닥 일부터 하게 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뜻이 있고 인성 면에서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경영수업을 하고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주주로 남게 할 거예요. 회사가 살아남아 성장하는 게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이죠.”
김 회장의 장모는 군산의 유명 빵집 이성당의 4대 사장이었다. 이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제과점으로 알려져있다. 연 매출액이 25억원이던 이성당은 그의 처남댁이 물려받아 72억원 규모로 키웠다. 가족기업으로 성공적인 승계가 이루어진 케이스다.
3년 전 작고한 장모는 평소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작고 당시 지역 신문은 ‘군산시민들이 큰 충격에 빠졌다’고 기사를 실었다. 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김 회장 부인은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자신이 기부를 하게 된 건 아내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했다.
“집사람은 수해가 나면 자식들에게도 의연금으로 몇 십만원씩 내놓으라고 합니다. 아이들도 그 말에 따르고요. 200만원 짜리 전셋방에서 제가 신혼살림을 시작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유로운 사람이에요. 인성이 좋은 거죠.”
그는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해 젊은 세대에게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반성을 해보지만, 젊은 세대에 대한 아쉬움도 있습니다. 중소기업은 이 구직난 속에서도 여전히 구인난을 겪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기피하기 때문이죠. 안정적인 일 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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