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FORBES KOREA AGENDA - 대를 잇는 자선 가문의 영광 되다
2013 FORBES KOREA AGENDA - 대를 잇는 자선 가문의 영광 되다
부자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다. “천당에는 부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부자는 좀처럼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부자에 대한 비난은 질투와 시기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갈브레이스는 “인간에게는 가난의 고통보다 이웃의 새 자동차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한 고통이 더 힘들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로스차일드, 발렌베리, 록펠러,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등 세계적으로 존경 받는 부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부를 일궜고 존경 받는 부자가 됐을까.
유럽 금융가문 로스차일드 - 유대교리에 충실한 나눔지난해 미국의 웹사이트 ‘셀레브리티 넷워스’(Celebrity Net Worth)가 발표한 ‘인류 역사상 최대부자 순위 25’에서 400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14세기 북아프리카 말리(Mali) 제국의 황제 만사무사가 1위였고, 3500억 달러로 추정된 유대계 금융가문 로스차일드가 2위였으며,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는 3400억 달러로 3위였다. 로스차일드는 세계적인 부의 대명사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는 창업자 마이어 암셀(1743~1812)의 정직에 기반한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략하자 헤센의 영주 빌헬름 백작은 가진 돈을 모두 암셀에게 맡기고 덴마크로 피신했다. 나폴레옹이 패퇴하자 빌헬름은 귀환했고, 그동안 암셀이 늘려 보관하고 있던 300만 플로린(약 1000억원)을 돌려받았다. 빌헬름은 “이렇게 정직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고 극찬했다. 암셀의 5남4녀 모두 그를 본받아 세계 제 1의 금융업자로 성장했다.
250년 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존속 비결로 족벌 경영·근친 결혼·비밀주의·자선활동 등을 꼽는다. 유대교는 “소득의 20%를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라”고 가르친다. 유대교리에 충실했던 로스차일드는 자선에 인색하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에 우호적이다.
많은 자선을 한 까닭이다. 특히 3대 내티(1840~1915)는 통이 컸다. 당시 영국의 하급 경찰은 고생에 비해 수입이 적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다. 내티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런던 경찰서에 수표를 보내고, 식사를 거른 경찰들이 자신의 집 주방에 들어와 자유롭게 식사 할 수 있게 했다. 야근과 당직을 서는 수백 명의 런던 경찰이 이 혜택을 누렸고, 그 보답으로 로스차일드 가문 마차가 지나가면 런던 교통경찰은 막힘 없이 갈 수 있게 했다.
내티는 매일 오전 11시 마차 한 대를 보내 영지 내 주민들에게 다과를 배달했다. 그의 장원(莊園)이 있는 트레인타운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의료 서비스와 주택을 제공했다. 신생아 가정에는 보모를 보내고, 60세 이상 노인에게 양로금을 지급하고, 실업자들에게 실업급여도 주었다. 트레인타운 주민들은 다른 영국인들보다 75년 먼저 복지 혜택을 누린 셈이다.
나폴레옹은 워털루 결전에서,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증강된 연합군에 패배했다. 로스차일드는 1875년 영국 정부에 수에즈운하 주식매입자금을 융자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비 조달 등의 대가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선언(1917년)을 받아냈다. 이스라엘 건국은 로스차일드의 힘이 컸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역할을 한 에드몽 로스차일드(프랑스)에 버금가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이스라엘 벤 구리온 초대 총리의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로스차일드는 구세주와 다름없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 이익금의 85% 법인세로로스차일드가 유대인에게 희망이었다면 스웨덴 국민의 존경을 받는 가문이 있다. 발렌베리다. 1856년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1816~1886)가 최초의 상업은행을 창업했다. 금융업에서 시작한 발렌베리 그룹은 전자·엔지니어링·원자력·자동차·의료장비·항공기·정보산업 등 11개 업종을 거느린다. 100여개 발렌베리 그룹 기업이나 상품에는 발렌베리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자회사들은 그룹이 소유하지만 모두 전문경영인이 독립경영을 하기 때문이다.
1938년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리던 스웨덴은 역사에 남을 노사정(勞社政) 3자 대협약을 체결한다. 협약의 핵심은 경영자연합이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는데 동의한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노동자의 권익보호가 국가경제와 기업경영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합의에 의한 노사관계를 중시했다.
발렌베리는 1938년 이래 집권당인 사회민주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장기집권해 온 사민당과 발렌베리 가문의 공조 체제가 스웨덴 복지의 근간이다. 그러나 발렌베리 가문이나 그 기업들이 사민당에 정치자금을 대준 일은 없다. 발렌베리는 노조 대표를 중역회의 멤버로 임명하는 등 노동자들을 경영 파트너로 삼았다. 민주적 경영을 통해 국민경제에 공헌하기 때문에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발렌베리는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는 먼저 국민경제를 고려한다.
발렌베리는 기업 경영윤리와 도덕성·투명성을 중시한다. 리더십·애국심·도덕성·절제력 등의 인성과 경영자로서의 국가사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발렌베리 그룹 후계자의 제 1조건이다.
금융업에서 시작해 국가 기간산업을 주도하고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발렌베리 그룹은 이윤 추구에 급급하지 않았다. 항상 국익을 고려하는 애국심과 노동자 복지를 배려하는 경영철학이 위대한 기업을 만들어낸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5대를 이어오면서 증여·상속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발렌베리의 건전한 기업활동은 스웨덴의 깨끗한 정치와 투명한 사회를 통해 가능했다.
미국 록펠러 가문 - 혐오스런 인간이 위대한 자선자로존 D. 록펠러(1839~1937)는 양극을 오간 사람이다. 록펠러는 스탠더드오일을 설립해 철도업자와 카르텔을 구축하고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장악하는 독점자본가가 됐다. 그는 노동조합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끊임없이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고 시장을 장악했다. 대중은 그를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로 지목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가 제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53세에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그는 좋은 돈벌이가 있다는 정보를 들을 때 외에는 웃지 않았다. 55세 되던 해에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가는 그의 눈에 병원 로비 액자에 적힌 글이 들어왔다. “주는 자가 받는자보다 복을 많이 누린다.” 록펠러는 그 글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전율이 일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병원 접수창구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린 소녀의 어머니가 울면서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고, 병원은 “돈이 없으면 입원이 안 된다”며 다투는 소리였다. 록펠러는 비서에게 모녀 몰래 입원비를 내게 했다. 뒷날 소녀가 회복되자 록펠러는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여태까지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다.”
록펠러는 그때부터 나눔의 삶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신기하게 불치병까지 나아 98세까지 장수하며 자선을 지속했다. 록펠러는 ‘인류의 복지 증진’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록펠러 재단을 출범시켰다. 시카고대학·록펠러의학연구소·일반교육이사회 등 각종 단체에 거액을 기부했다.
그는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실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회고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고 그의 이름은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그의 인생 전반부는 악랄한 자본가였으나 후반부는 위대한 자선가의 삶이었다.
록펠러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수도승처럼 살았다. 술·담배는 물론 파티나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1937년 98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의 생활은 주변에 사는 다른 농부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농사 일을 하고, 해 떨어지면 잠자리에 들고, 일요일은 종일 교회에서 보냈다.
록펠러는 보이지 않게 사회사업을 했다. 시카고대학이 록펠러의 이름을 학교명에 넣겠다고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기증한 건물에 이름이 새겨지는 것도 끝내 사양했다. 록펠러의 기부는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외아들 록펠러 2세(1874~1960)는 자선사업가로 평생을 보냈다. 2세는 5억 달러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는 막대한 록펠러 재산의 소유자가 아닌 관리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공할 기회를 부여한 사회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재산은 잠시 빌려온 것이므로 사회에 환원하는 게 당연하다.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베푸는 사람이다.”
워런 버핏&빌 게이츠 - 자선 동행은 아름답다요즘 존경받는 부자는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다. 워런 버핏(1930년생)은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는 부자다. 남을 실망시키는 것을 싫어하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직하고 소박하다. 부끄럼을 잘 타는 내성적 성격과 차갑도록 합리적인 성격을 지녔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업가적 본능과 선량한 시민의 박애적 본능이 그의 가슴에 함께 한다.
버핏은 돈을 사랑했다. 돈은 그에게 삶의 활력이다. 사업 이외의 미술·문학·과학·여행 등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만 나면 오로지 돈 버는데 썼다. 어떻게하면 훌륭한 회사를 만들 수 있을까. 머리 속은 사업과 회사 생각으로 가득했다. 돈을 많이 벌고 그 돈을 보다 민주적으로 배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버핏은 성공한 것은 몇 가지 단순한 투자원칙을 집중적으로 실천하고 날마다 열심히 일한 덕분이라고 말한다. 점심은 콜라·햄버거·감자칩, 저녁은 해시브라운 2인분과 덜 익힌 스테이크다. 지극히 소박하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는 모두가 자유롭게 겨루고 승자가 패자에게 도움을 줘서 격차가 줄어드는 사회다. 시장에만 의존해서는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 시장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시장경제론이다.
사람의 운명은 사회와 관계가 있지,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힘으로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사람들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자가 된 것은 사회의 도움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부는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베풀어야 한다.”
2006년 6월 버핏은 소유한 버크셔 주식 85%를 수년에 걸쳐서 다른 여러 재단에게 양도하겠다고 선언했다. 370억 달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역사상 초유의 거액 기부였다. 전체의 6분의 5를 게이츠 재단에 넘겼다. 그는 돈만 모으며 살아왔던 삶에서 번 돈을 나누어 주는 삶으로 바꾸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재산은 사회로 환원해야 할 ‘보관증’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왕조시대처럼 대를 이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걸 싫어한다. 빌 게이츠는 올바른 목표와 훌륭한 철학을 가지고 성별·종교·피부색·지역을 따지지 않고 전세계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자 온 열정을 다하고 있다. 돈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을 때, 이 결정을 내리기란 너무도 쉬웠다.”
버핏이 310억 달러를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면서 자산규모가 291억 달러에서 600억 달러의 초대형 자선재단이 탄생했다. 게이츠 재단은 기존의 재단과 다른 방식으로 자선한다. 공연장이나 대학건물을 지어주고 ‘게이츠홀’이라는 식의 이름을 남기는 사업은 없다. 인도의 에이즈 퇴치, 페루의 결핵 퇴치, 미국 공립도서관 온라인화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일이다. 사업을 하기 전 철저하게 효율성과 타당성을 검증한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정밀한 사업가 게이츠의 영향이 크다. 그는 자선사업에 참여하면서 수백 쪽의 의학 서적을 독파하는 열성을 보였다.
게이츠는 말했다. “나는 스스로 사회재산을 관리하는 집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러한 지위(집사)에 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다. 자선은 즐길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점유할 뿐, 소유한 것이 아니다.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르는 자다.”
빌 게이츠(1955년생)가 자선사업에 내놓은 돈은 과거 위대한 자선사업가들이 기부한 것보다 훨씬 많다. 게이츠는 죽기 전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자식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적당한 액수(1인당 1000만 달러)의 돈만 남겨줄 예정이다.
존경받는 부자는 발렌베리처럼 깨끗하게 돈을 벌거나, 록펠러처럼 좋은 곳에 돈을 쓰는 사람들이다. 돈을 잘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어렵다. 모인 돈은 잘 나누어야 한다. 돈은 베품과 함께할 때 좋은 것이다. 재일교포 한창우 회장은 “돈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말했다. 돈을 쓰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잘 쓰면 두고두고 칭송을 받고, 잘못 쓰면 많은 욕 먹고 패가망신도 한다.
일본 전국시대 요도야 쓰네야스(淀屋常安)라는 걸출한 상인이 있었다. 선견지명·판단력·결단력·체력 등을 갖춘 그는 한국의 정주영과 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큰 돈을 벌었다. 아들 시게야스(淀屋重安)는 호화저택을 지어 금으로 치장했다. 그의 처신은 사람들에게 ‘장삿꾼은 나쁜 놈’이라는 이미지를 심었다. 결국 막부의 눈총을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요도야 가문은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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