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RICAN VIEWPOINTS - 미국은 만능 백지수표가 아니다
AMERICAN VIEWPOINTS - 미국은 만능 백지수표가 아니다
아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한 곳이다. 민족주의와 영토분쟁, 이념갈등, 수정주의 역사관으로 가득하다. 지역 경제력이 크게 상승하면서 이 문제는 한층 악화됐다. 한 세기 전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피해가 막심하되 그 지역에 국한됐지만, 오늘날 전쟁이 일어난다면 세계경제에 파멸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시아 지역의 긴장 완화를 위해 미국은 ‘아시아로 중심축 이동’을 시작했다. 미국은 2020년까지 태평양 일대에 대규모 해군 병력을 주둔시킬 계획이다. 반면 중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서서히 줄여나간다. 세계 경제의 새로운 핵심으로서 아시아는 미국에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중심축 이동이 바로 그 방증이다.
중심축 이동은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을 강력한 외부인으로 인정하고 타 아시아 국가보다 더 큰 신뢰를 보내는 덕분에 가능하다. 물론 미국은 중립국이 아니다.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런 이익은 대체로 지적재산권이나 환율 같은 무역분야에 한정되며, 아시아를 분열로 몰아넣는 주권 문제나 국가정체성 논란과는 무관하다. 이를 테면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영토가 없다. 그로 인해 미국은 굳건한 전략적 신뢰를 얻는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이 갈등을 벌일 때 북한이나 중국 같은 주요 위협요소를 조절하고 이 지역이 균형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미국에도 위험요소는 있다. 각국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일본이 중국과 동중국해 영유권 논란에서 미국을 방파제로 사용할까 우려한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미군 주둔을 빌미로 북한을 계속 지원한다. 또 한일 양국은 미국과 맺은 동맹을 믿고 상대국을 향해 민족주의 색채를 유감 없이 드러내며 갈등을 일으킨다. 아이러니컬하지만 미국의 안전보장이 없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갈등이다.
예컨대 미국이 없었더라면 독도 문제가 이렇게 오래 지속됐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한일 간 갈등은 양국에겐 재앙인 반면 중국과 북한에게는 지정학적 선물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동맹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갈등은 진작에 조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한일 양국과 동맹관계인 이상 어느 쪽이든 먼저 물러서거나 타협안을 제시한다고 해도 아무 이득이 없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미국의 존재는 아시아 국가 간 갈등이 더 커지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핀 구실이기도 하다. 미국으로 인해 아시아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이 합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이유도 없어진다. 실제로 긴장을 해결할 의사가 없는 국가 지도층은 종종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긴장을 이용한다.
국민정서를 고조시키고 싶을 때마다 항상 민족주의적 논쟁을 일으켜 부패나 빈곤층, 정경유착 등 정작 중요한 문제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린다. 예를 들어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해양선 분할을 놓고 일본이나 베트남에 싸움을 거는 편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일보다 훨씬 쉽다.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라는 경제학 용어가 이 상황에 딱 들어 맞는다. 어떤 사람이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한 안전이 보장됐을 때,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더 위험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 이유는 안전 보장으로 그 행동이 초래할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한일 관계에도 쉽게 적용될 수 있다. 양국 영토에 주둔하는 미군 덕분에 양국은 자신들의 행동 결과에 대해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를 믿고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서로 갈등을 고조시키는 사치를 누린다.
북한 문제나 중국의 부상 같은 지정학적 문제를 미국이 조정해주는 덕분에 양국은 보다 덜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독도가 전쟁을 치르기에도 충분할 만큼 가치 있는 땅일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힘과 북한 핵무기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긴장 고조는 한일 양국에 미국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치일 뿐만 아니라 실수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자나 대중영합적 정치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렇다. 보다 더 큰 문제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미국의 존재를 남용하면서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대신 지켜주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아시아에 미국이 없다면 한국과 일본은 독도나 70년 전 전쟁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위해 즉각 협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가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 서로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중국은 민족주의적인 일당 독재체재이고 북한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국가다. 러시아는 변덕스럽고 통치체제가 낙후된 반독재국가다. 북한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 중 하나로 인권 수준이 탈레반 정권보다 낮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과 달리 한국과 일본은 모두 진보적이고 자본주의적이며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사실 그들은 동맹관계라야 맞다. 미국이 아시아에 없었더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양국 지도층도 이 사실을 잘 안다. 동아시아 안보 관련 학술대회에서는 국제적 시각을 가진 한국과 일본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서로 비슷한 주장을 자주 펼친다. 미국 관료들 또한 지난 수십년 간 한국과 일본이 작은 차이보다는 거시적인 공통 과제에 초점을 맞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양측 지도부는 자국 언론과 교육이 제공하는 현란한 수사(修辭)에 갇혀 버렸다. 아시아의 언론매체들은 끊임없이 민족주의적 시각을 유포한다. 심지어 한국의 한 언론은 일본 사무라이들이 독도를 침략할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경고했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인종주의 관념을 가르치는 교육체계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만약 한중일 3국이 1000년 전과 같은 혈연중심 사회라면 타협은 곧 ‘민족 반역’에 다름 없다. 이는 유럽을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몰아넣은 극단주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더 나아가 미국은 동맹국 간의 이런 분쟁을 중재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미국은 영유권 문제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과 협상하도록 독려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미국은 자유무역 증진, 공해(公海) 확대, 변동환율제 도입 등 아시아가 좀 더 개방적인 지역이 되도록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미국은 평화적인 분쟁 해결을 바란다. 중국의 걱정과 달리 ‘중심축 이동’은 중국을 겨냥한 계획이 아니다. 중국이 보다 호전적으로 나오면 그렇게 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미국은 ASEAN지역포럼(ARF)과 같은 아시아 지역기구를 발족하는 정도로 만족한다. ARF는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안보 문제를 논의할 장을 마련해준다. 미국은 또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처럼 아시아 경제가 보다 개방돼 상호의존도가 높아지는 무역협정도 지지한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 국가의 고집스런 민족주의나 벼랑 끝 전술에 있어서는 중재역을 맡지 않을 것이다. 양국이 서로를 더 잘 알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일 양국이 갈등을 지속할수록 아시아 민주주의의 진전은 요원해진다. 중국과 북한은 한일 갈등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만약 한일 양국이 싸운다면 미국은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그 지역에서 이탈할 것이 틀림없다.
아시아에 거주하는 미국인 학자로서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독도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평양 전쟁이나 중국의 영토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답변을 거부한다. 이념적 성향이 묻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의 방침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미국은 이런 분쟁은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계속 말했다.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더라도 결국 정치적으로 해석되고 부당한 주권침탈로 격하돼 거부당할 것이다.
특히 한국인은 독도 문제를 서방인들이 다루게끔 수없이 노력해왔다. 그래선 안 된다. 이런 노력은 한국에 거주하는 젊은 외국인이나 영어교사들을 작위적으로 움직이는 데 그친다. 그들은 이 지역 역사를 잘 모른다. 단지 한국 문화에 녹아들기 위해 필사적일 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미국 정부도 이 주제에 대해 언급을 피하려고 한다. 미국 외교관들은 독도 영유권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을 지시 받는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까? 미군이 철수하면 한일 양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서둘러 합의를 도출하겠지만, 어마어마한 중국의 영향력과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면 어려운 선택이다. 그런 독재국가들을 상대하려면 서로 대면하면서 가능한 한 많이 대화하는 수밖에 없다. 중심축 이동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미국은 한일 양국에 자제를 촉구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미국의 무기판매는 양국이 서로를 향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조건 아래 이뤄져야 한다. 양국 사이에 적대행위가 발생하면 철군하겠다는 성명도 필요하다. 한편 한일 양국은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역사교육 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이 부분은 사실상 실현이 어렵다. 한일 역사는 오늘날 통용되는 ‘근대국가를 향한 전진’이라는 가치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복잡하다. 또 독도 문제와 관련된 협상도 시작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양측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다면 한일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않는다.
아시아는 미국이 중심축으로 삼기에 충분할 정도로 역동적이고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미국은 만능 백지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아 국가들, 특히 미국의 동맹국들은 알아야 한다. 미국은 갈등을 줄이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절한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스스로 타협하려 들지 않는 국가들을 상대로 중재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아는 지난 40년 간 큰 발전을 거듭했다.
아시아의 예상치 못한 성장은 가난을 몰아내고 교육수준을 높였으며 그 지역을 국제무대에 올려놓았다. 과거 유럽처럼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때문에 이 모든 성과를 내려놓기에는 너무 아깝다. 만약 아시아인들이 서로간의 차이를 스스로 해소하지 못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다면 미국은 그들을 도와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 필자 로버트 E 켈리는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오피스텔 마지막 규제, 바닥 난방도 허용…생숙→오피스텔 전환 지원
2농심 오너家 신상열, 상무→전무 승진...3세 경영 속도
3MBK, 10년 내 고려아연 팔까…경영협력계약 ‘기한’ 명시 없어
4GS리테일 4세 허서홍 시대 열린다...오너가 세대 교체
58억 아파트, 6700억으로 '껑충'…손해만 봤다, 왜?
6이재현 CJ 회장 “마지막 기회 절실함” 당부…인사 이틀만에 소집
710조 대어 놓친 韓조선, ‘원팀’ 물꼬 튼 한화오션·현대重
8한동훈 "가상자산은 청년들의 희망, 힘겨루기 할 때 아냐"
9오데마 피게, 서울 첫 플래그십 스토어 그랜드 오프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