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casualties of CIVIL WAR - 시리아의 비극은 끝이 없다
Features casualties of CIVIL WAR - 시리아의 비극은 끝이 없다
인터뷰 도중 의사가 손으로 귀를 깜싼다. 내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바닥에 엎드린다. 시리아의 시골 마을 칸 아소블에 포탄이 떨어진다. 아담하고 조용했던 마을이 전쟁으로 몸살을 앓는다.
칸 아소블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시리아의 여러 시골 마을 중 하나다. 북부 시리아 이들립 지방의 이 마을엔 돌산과 울퉁불퉁하고 비틀린 나무가 많다. 혁명으로 시작된 내전이 별 진전 없이 장기화하면서 이곳에선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풍경이 생겨났다.
주민들과 반군 병사들이 근처 시리아 정부군 진지에서 날라오는 포탄을 피하려고 지하에 대피시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칸아소블은 한 때 전쟁의 포화가 비켜갔던 곳이지만 이제는 한시도 그 불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군이 정부군 진지에 대포를 발사하면 정부군은 그 보복으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공격한다. 대개 칸 아소블 같은 민간인 지역이 공격 대상이 된다.
닥터 사파가 몸을 일으킨다. 첫 포격의 충격이 가라앉자 의무감이 다시 발동한다. 포격으로 누군가가 다쳤을지 모른다. 구급차 기사 마무드는 벌써 문 밖에 나가 있다. 그가 구급차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포격은 계속된다. 사방에서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고 흙이 튀고 포탄에 깨진 돌 냄새가 퍼진다.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휘발유를 넣은 자동차에 시동이 걸린다. 라이트를 번쩍이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구급차가 출동한다. 뒷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죽을 수도 있다”고 마무드는 말했다. “훌륭한 죽음이다. 사람들을 돕다가 죽으면 멋진 죽음 아닌가?”
닥터 사파와 나는 다른 자동차를 타고 마무드의 구급차 뒤를 따라간다. 우리는 포탄이 떨어졌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으로 향한다. 자동차는 전쟁으로 일그러진 시골 도로 위에 움푹 패인 구덩이들을 피해가며 달린다. 여기에 과거가 있다. 엘바 유적지와 이들립 호텔, 캠핑장 등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전쟁 전 이곳의 삶을 말해준다. 여기엔 현재도 있다. 표지판을 뒤 덮은 총알 구멍과 녹슬어 너덜너덜해진 가장자리가 그것이다. 포격이 뜸한 때엔 말을 타고 심부름을 가는 시골 소년들이 지나가는 차량을 보면 머리에 손을 대 인사한다. 또 양떼를 모는 노인들은 지팡이를 들어올리면서 ‘에펜디’(옛 오스만어 인사말)라고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길가에 납작하게 말라붙은 잔디밭으로 다가간다. 난 그제서야 닥터 사파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그는 덩치가 큰 황소 같은 남자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두꺼운 손, 수니파 무슬림 남자들의 특징인 긴 수염이 무뚝뚝해 보이지만 친절한 눈매가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어린아이가 죽을 때마다 그의 눈은 눈물로 가득찬다.
오늘도 어린이 한 명이 죽었다. 포탄이 떨어진 곳 가까이에 있는 중국제 픽업트럭에 다가가자 그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의 이름은 후세인 사파,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 후세인은 픽업트럭 뒷칸에 실려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그를 공동묘지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후세인은 두개골이 부서져 움푹하게 꺼졌고 몸뚱이가 두 동강 났다. 야구 모자를 쓴 남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허리에 대고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다. 몇 분전만 해도 이 아이는 근처 자기 집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마당엔 신발 한 짝이 덩그렇게 놓여 있고 매캐한 폭발물 냄새가 진동한다. 집 외벽은 피투성이다.
후세인의 시체가 싸구려 양탄자에 쌓인 채 트럭에서 내려진다. 사람들은 포격으로 목숨을 잃게 될 가족과 이웃, 친구들을 위해 새로 파놓은 10여 개의 무덤 중 하나에 후세인의 시체를 재빨리 묻는다.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그렇게 서둘러 묻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후세인의 어머니가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정부군이 장례식이 열리는 곳을 폭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한다.
정부는 무차별 포격을 명령했다. 따라서 날이 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 민간인들이 늘어난다. 그들은 정권이 자국민을 표적으로 행하는 집단응징(collective punishment)의 희생자다. 전에도 전쟁을 봤지만 이런 전략은 이해가 안 간다. 정부군의 요새는 반군과 민간인이 거주하는 계곡에 둘러싸여 있다. 반군은 포위된 정부군 기지에 조잡한 대포를 발사한다. 정부군은 그 보복으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공격한다.
시리아 정부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소식에 오바마 미 대통령은 시리아군이 레드라인(금지선)을 넘었다고 판단해 반군 지원을 결정했다. 또 시리아의 수니파 지도부 역시 정부군에 맞서 성전을 벌일 것을 촉구하면서 반군을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 와중에 잊혀져 가는 사실이 있다.
시리아인 사망자 중 상당수가 전투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칸 아소블 같은 작은 마을의 자기 집 마당에서 죽어간다. 유엔에 따르면 3년째로 접어든 이 유혈사태에서 지금까지 9만3000명이 사망했다. 시리아 인권감시단은 그보다 더 많은 12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그 중 대다수가 민간인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시리아인들은 숫자에 불과한 존재가 됐다”고 닥터 사파는 말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수많은 이름이 있다. 후세인도 그 중 하나다. 그 소년은 어느날 오후 이 시골 마을에 떨어진 포탄 40발 중 하나에 맞아서 사망했다. 이미 폐허가 되다시피한 시리아 곳곳에서는 하루에 포탄이 몇 발 더 떨어지든 별 차이가 없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포탄이 더 떨어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희생될까? 시리아인들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고 마무드는 말했다. “우리는 어차피 혼자다.”
난 이번에 내전 발발 이후 세 번째로 시리아를 방문했다. 국경을 넘기가 매우 어려웠다. 얼마 전 쌍둥이 차량폭탄이 터키 접경 지역의 레이한리를 초토화시키면서 최소 50명이 사망했다. 이 일로 국경 검문소가 일시적으로 폐쇄됐기 때문에 시리아 북서부의 이들립 지방으로 가려면 현지 밀수꾼의 도움을 받아 불법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부 압두라는 밀수꾼이 나를 안내했다.
그는 진흙탕 들판에서 터키 국경수비대원 한 명이 소총을 들고 우리 뒤를 쫓아올 때 내 무거운 가방을 대신 들고 뛰었다. 터키 쪽 국경의 통행이 제한된 군사지역에서 우리는 흙더미를 넘어 늪지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철조망 쪽으로 기어올랐다. 가시철조망에 내 진바지가 찢겼다. 우리 두 사람은 아부 압두가 손을 찢겨가며 가시철조망을 벌려서 만든 구멍을 통과해 시리아 쪽으로 넘어왔다.
20발자국쯤 지나가서 아부 압두가 터키 쪽 국경수비대원을 향해 “우린 이쪽으로 무사히 건너왔다”고 소리쳤다. 이제 시리아 땅이니 터키군의 관할권 밖이다. 그 터키군은 우리에게 총을 겨눈 채 멀어져 가는 우리의 모습을 지켜봤다. 난 행여 그가 따분한 생각이 들거나 악의로, 또는 땀나게 뛰어온 보람도 없이 우리를 놓쳐 분한 마음에 손가락을 움직여 방아쇠를 당기지 않기를 바랐다.
구급차 기사 마무드를 만난 건 브리즈 블록(모래와 석탄재, 시멘트를 섞어 만든 가벼운 블록)으로 지은 방갈로 안에서였다. 스물여덟 살의 그 젊은이는 초록색 눈에 굽슬굽슬한 머리카락, 핸섬한 열굴이 마치 TV에 나오는 연예인 같다. 그는 다른 두 남자와 함께 콘크리트로 벽을 쌓아올리고 있다. 그의 바지 옆쪽에 무전기가 매달려 있다. 그 무전기는 부상자와 마무드를 이어주는 생명선이다. 마무드는 그들의 이웃이자 통신원이며 친구다.
그 방갈로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해 놓은 그의 구급차는 정부군의 항공기에서 보이지 않게 청색 방수포로 덮여 있다. 정부군의 항공기는 무차별적인 공격을 일삼지만 구급차와 의사, 병원을 주요 표적으로 삼는다. 우리 뒤쪽으로 칸 아소블의 이슬람 사원 첨탑이 탱크 포격으로 일부가 떨어져나간 채 위태롭게 서 있다. 한때는 평화로웠지만 지금은 포위된 이곳의 부서진 기념물이다.
칸 아소블은 질 좋은 돌(아르살리와 압디니)로 유명하다. 마을의 다른 많은 남자들처럼 마무드도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최근에 그의 건축 기술은 주로 공습이나 포격에 대비해 임시 대피소를 짓거나 주택을 더 튼튼하게 보강하는 데 이용된다.
이 지역 10개 마을을 담당하는 구급차 기사 역할은 무급 자원봉사직이다. 물리치료사 한 명, 약사 두 명, 간호사 한 명, 기초 의학을 익힌 이슬람 지도자 한 명으로 이뤄진 의료조정위원회 역시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됐다.
그 이슬람 지도자는 반정부 활동으로 23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는 동안 의학 지식을 익혔다. 이들은 신앙심이 깊은 단순한 사람들이다. 다만 특수 분야의 교육을 받았고 주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는 점이 여느 시골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마무드는 혁명이 시작되자 시위에 가담했고 그 다음엔 반군의 핵심 조직인 자유시리아군에 들어갔다. 거기서 구급차 기사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사 수천 명에 구급차 기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 목적의식이 생겼다고 했다.
이곳의 삶은 경고 없이 시작되는 포격 소리로 중단된다. 공격 시간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사망자 수가 더 늘어난다. 아무런 경고 없이 폭탄이 터진다. 운이 좋으면 폭탄이 멀찌감치 떨어져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할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운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반군 지역 안에 있는 임시 병원에서 치료하기엔 상태가 너무 심각한 부상자들은 마무드의 구급차에 실려 터키 접경 지역으로 옮겨진다.
하지만 정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리아인들은 전쟁과 혁명 지도자, 반군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시리아 정부와 이란, 헤즈불라, 시아파 무슬림을 증오한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이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미국을 증오한다.
그래서 온건한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변해 간다. 마무드는 매일 폭격을 당한 지역으로 구급차를 몰면서 정부의 잔인한 공격이 사람들의 얼굴을 점점 더 굳어지게 만들어 가는 것을 지켜본다. 마무드는 양쪽 모두에게 주목 받는 존재다.
“구급차는 정부를 화나게 한다. 정부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포탄을 쏘는데 구급차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마무드는 반군이 정부군을 포위하고 대치 중인 와디 알-데이프 군기지의 전선에 있었다. 집에서 15km 떨어진 곳이다.
자유시리아군을 위해 싸우던 한 리비아 병사가 의식을 잃은 채 그의 구급차에 실려 있었다. 병사의 다리는 포탄에 잘려나갔다.
전선 근처에 로켓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마무드는 터키 국경을 향해 달렸다. 무장 헬리콥터가 기관총을 쏘며 구급차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마무드는 차의 방향을 꺾어 도로에서 벗어나 잡목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구급차를 헬리콥터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시켰다.
헬리콥터가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서 두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터키 국경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부상당한 리비아군은 계속 피를 흘렸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마무드의 박애정신에 손상을 입혔다. 정부군 병사라도 상태가 위급할 땐 구급차에 실어주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차에 실은 다음 그냥 죽게 내버려 두겠다.”
칸 아소블의 주민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상점들은 여전히 문을 열고 농부들은 작물을 수확하며 이슬람 사원의 기도 시간이 되면 신도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공습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 또한 크다. 매일 비행기와 헬리콥터들이 하늘을 맴돌고 포탄 터지는 굉음이 콘크리트 건물과 채석장 사이로 울려퍼진다. 올해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인구 6000명 중 약 30명이 포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근처의 황폐화된 도시 마렛 알-누만은 사망자가 훨씬 더 많다. 주민들은 전체 인구의 10%가 포격으로 사망했다고 말한다.
“작은 포탄 하나만 떨어져도 한 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닥터 사파는 말한다. 그래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픈 많은 가족이 지하로 거처를 옮긴다. 마무드는 나를 아부 알라의 집으로 데려갔다. 18개월 전 아부 알라가 자기 집 마당을 파기 시작했을 때 이웃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했다. 그는 집 앞의 돌로 된 땅을 망치와 끌로 조금씩 팠다. 처음엔 하루에 몇 시간씩만 땅을 팠지만 차츰 하루 온종일 그 일에 매달리게 됐다.
그리고 급기야 열세 살과 열다섯 살, 두 아들까지 동원해 돌아가면서 땅 속 깊숙이 파 들어갔다. 그의 이상한 행동은 가족과의 사이까지 멀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칸 아소블은 정부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리아군 검문소에서 정부군과 반군의 유혈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그는 어둡고 끔찍한 앞날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었다.
“난 정부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2012년 이 지역에서 포격이 시작되자 그가 공포심을 갖고 대피소 마련에 힘을 쏟아부은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꼬박 1년 동안 먼지와 부서진 돌가루를 마시며 망치질을 한 끝에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가 앞으로 닥치리라 확신했던 공포로부터 가족을 보호할 지하 대피소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미쳤다고 하지 않는다. 지금은 다른 모든 사람이 미쳤다.” 이 지역 석공들의 투박한 억양으로 그가 말했다. 손으로 말아 만든 담배와 직접 깎아 다듬은 담뱃대, 남다른 선견지명이 그런 인상을 한층 더 증폭시켰다. 돌로 된 계단을 따라 땅 밑으로 내려가니 지하 거실에 있는 TV에선 미국 만화 시리즈 ‘스쿠비-두’가 방영되고 있다. 벽난로 선반처럼 생긴 전화대도 있고 더 깊이 들어가면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하늘을 맴돌때 기거할 침실이 나온다. 아부 알라 가족의 생활은 지상의 콘크리트 단층집에서 땅 밑으로 옮겨졌다.
“아니, 여긴 포시즌스 호텔인가?” 마무드의 한 친구가 아부 알라의 지하 동굴 대피소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손으로 담배를 말면서 아부 알라가 만든 작품에 감탄했다. 그곳에서 들으니 포탄 터지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 소리는 이 지하 동굴 대피소가 이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난 내 아들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했다”고 아부 알라는 말했다. “정말 행복하다.”
마을 주민 상당수가 아부 알라를 따라 새로 판 지하 동굴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돈이 있고 가족 중에 힘을 쓸 만한 사람이 있는 가정은 전기 시설과 전화, TV, 푹신한 침구를 갖춘 안락한 대피소를 마련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최소한 포탄이 떨어질 때 몸을 숨길 곳은 만들 수 있다. 칸 아소블 곳곳에서 불도저가 땅을 파고 임시 대피소를 만들기 위해 돌을 다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한때 이 마을의 부자였던 아부 빌랄은 집에서 계속 살 수 없게 되자 가족이 거처할 동굴을 파기 시작했다. 정부군의 공습으로 이웃 사람들이 죽고 그의 집이 파괴됐으며 아들이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의 가족은 요즘 예전 집터 밑에 지하 대피소를 만드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지하 동굴을 집으로 쓸 생각이다. 아부 빌랄은 “문명 세계의 사람들은 달에 가는데 우리 시리아인들은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칸 아소블에 어둠이 내린다. 나는 닥터 사파와 함께 마무드의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마무드의 다섯 아이들이 바닥에 엎드린 아버지의 등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다. 우리는 메제(중동 지방의 전채 요리)와 양고기, 간으로 만든 케밥으로 푸짐한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체리까지 먹었다. 전쟁은 추악하지만 시리아인들의 진심 어린 손님 접대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닥터 사파는 마무드가 그리스에서 노동자로 일할 때 배운 솜씨로 만들어준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와지 압둘라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녁 식탁에서 전쟁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일상화된 곳에서 들을 수 있는 비슷비슷한 일화 중 하나였다. 60세인 와지는 이웃 마을에 갔다가 매복해 있던 반군이 그래드 로켓 배터리와 로켓 추진 수류탄이 실린 정부군 트럭을 공격하는 현장을 지나게 됐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트럭에 불이 붙어 로켓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하페즈 알-아사드(바샤르 알-아사드 현 시리아 대통령의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절 반정부 활동 혐의로 15년 동안 힘든 옥살이를 한 와지는 겁에 질렸다. 그는 집까지 8km 거리를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숨을 거뒀다. 극심한 공포와 탈진 때문인 듯하다.
그날 밤 첫 포탄이 떨어졌을 때 마무드의 두 살짜리 막내딸은 큰 눈으로 방안을 둘러봤다. 2012년 마무드의 집이 포격을 당했을 때 파편에 다친 한쪽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문제 없어요.” 마무드가 말했다. “우리 편이 카르미드로 진격 중이에요.” 카르미드는 칸 아소블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리아군 기지다. “하지만 정부군이 반격할 걸세.” 닥터 사파가 말했다.
카르미드의 벽돌 공장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무드의 무전기가 우지직거린다. “그들이 발포를 개시했다” 정부군은 반드시 반격한다. 그들의 반응은 분노에 차 있다. 무자비한 집단응징이다. 한밤중 난 마무드 사촌의 집 모기장 아래 누워 있다. 가까운 곳에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TV는 친혁명 성향의 오리엔트 방송에 채널이 맞춰져 있다. 정부군의 잔인한 살해 장면을 모은 이미지 간간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연설 장면이 나온다. “저들을 얼마나 더 규탄해야 합니까? … 우리는 깊이 우려합니다. … 그런 폭력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난 그날 밤 포탄이 몇 개나 떨어졌는지 미처 다 세지 못했다. 한 친구는 나중에 150개까지 세다가 그만뒀다고 말했다.
아침이 되자 마무드는 한 임신부가 조산기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어떤 구급차 기사라도 받을 수 있는 전화였지만 마무드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난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난 야전병원에서 마무드를 만나기로 했다.
병원 벽에 이런 낙서가 써 있었다. “당신들의 깨끗한 손과 고귀한 마음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그곳에는 다른 의사가 한 명 있었다. 그를 인터뷰하는 도중 또 포탄이 떨어져 인터뷰가 중단됐다. 그리고 또 다른 소년이 피를 흘리며 누군가의 팔에 안겨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포격은 매일 불규칙적으로 일어난다”고 그 의사는 말했다. 그는 자신과 병원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정부군이 자신과 환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병원을 공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엄지와 중지로 담배를 잡고 길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소리내 웃으며 말했다. “난 포격이 있은 다음에만 담배를 피운다. 하루에 30개비쯤 된다.”
- 필자 아이만 오가나는 영국계 이라크인 사진가 겸 작가다. 현재 이스탄불에 거주하면서 중동 지역에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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