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파도’에 휩쓸린 신흥시장
‘삼각파도’에 휩쓸린 신흥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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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장 플레이어들이 신흥시장 국가를 맹폭했다. 6월 ‘버냉키 쇼크’에 이은 2차 공습이다. 핵심 대상은 신흥국가 중에서 경상수지 적자가 많은 나라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도네시아·인도 등 일부 국가들의 금융시장에선 아찔한 그래프가 만들어졌다. 핫머니가 대거 빠져나오면서 통화 가치와 주가가 곤두박질쳤고 온갖 위기설이 난무했다.
핫머니의 대탈출극→떠나는 자금을 부여잡기 위한 금리 인상과 이에 따른 내수 침체→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 선후는 뒤바뀔 수 있으나 현재 신흥시장에서 형성된 삼각파도는 대충 이런 흐름이다.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이탈을 부른 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가능성 시사다.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양적 완화 축소가 단행될 것이라는 전망이 기정사실화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추세라면 내년 중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가 도화선이 됐다.
이로 인해 미국 시장금리(국채수익률)가 뜀박질을 하고 뉴욕 증시가 조정에 들어가자 위험회피 심리가 고조돼 신흥시장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 시장금리가 오르자 달러 빚을 내 신흥시장에 투자한 ‘달러-캐리 트레이드’가 청산에 들어가거나 혹은 들어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서 자금 탈출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여기까지가 최근의 핫머니 대탈출극이다.
이어 전개될 그림은 신흥시장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 행진이다. 인도네시아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은 왜 유독 심하게 두들겨 맞았을까. 상처 입은 짐승이기에 투기세력이 물어뜯기 편한 측면이 있지만 떠나는 자금을 잡겠다는 인도네시아의 성의도 부족했다.
8월 15일 금융정책회의에서 인도네시아중앙은행(BI)은 기준금리를 6.5%로 동결하고 지급준비율만 높이는데 그쳤다. 앞서 6월과 7월 두 달 연속 기준금리를 올렸지만 시장은 이번 금리 동결이 못마땅했다. ‘우리를 붙잡으려면 더 높은 이자를 줘야 할 것 아니냐’는 불만이다.
이후 블랙리스트 국가 중 하나인 터키는 집중포화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8월 20일 터키 중앙은행은 예상을 뒤엎고 기준금리를 0.5% 올렸다. 이날 신흥시장 국가들의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속에서도 터키 리라만 견조했다.
이처럼 떠나는 자금을 붙들기 위한 신흥시장 국가들의 금리 인상 행진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국채금리가 안정될 때까지는 좋든 싫든 금리의 눈높이를 맞춰줘야 한다. 경상수지가 나빠지고 외환보유액이 줄어든 신흥시장 국가의 중앙은행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금리인상은 폭력적인 각성제이 같은 신흥시장 국가의 긴축(금리 인상) 러시는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켜 성장률을 끌어내릴 것이다. 신용팽창에 의존한 나라들에겐 아주 폭력적인 각성제(외국인 자금 유출+본국 중앙은행의 통화 긴축)인 셈이다. 신흥시장 증시는 서둘러 이를 가격에 반영 중이며 신흥시장 매출 비중이 큰 선진국 글로벌 기업의 주가도 이를 뒤따르는 중이다.
마지막으로 신용평가사들이 남았다. 이들은 비틀대는 신흥시장 나라를 결국 매트에 내동댕이칠 것인가. 실제 신용평가사들이 그럴 마음이 있든 없든 ‘큰 손’들은 이 재료의 현실화 가능성을 적극 이용하려 들 것이다. 이른바 ‘자기실현적 위기’다.
신흥시장 경제 주체의 심리가 크게 위축되고 통화 긴축으로 내수 동력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기업과 금융회사의 디폴트가 하나 둘 현실화하면 신용평가사들은 좋든 싫든 뭔가 하는 시늉을 해야 한다. 그들의 등급 평정은 약자에게만 엄격한 편이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신흥시장 국가 중 어느 한 곳이라도 신용등급이나 등급전망이 강등된다면 이는 삼각파도의 완성이자, 새로운 삼각파도의 시작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은 선진국에도 부담이다. 선진국 글로벌 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의 상당 부분이 신흥시장에서 나온다. 하지만 흔들어 돈을 벌겠다는 세력들에겐 ‘신흥시장 국가신용등급 강등’의 가능성이 부각되는 것만으로도 1차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이번 신흥시장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전염성을 띨 것인가. 신흥시장의 객관적 여건은 당시보다 나아졌다. 무엇보다 자본 흐름은 외환위기 이전보다 훨씬 건강한 편이다. 신흥시장으로 유입되는 자금의 절반 이상은 자기자본 투자며 그중 대부분은 직접 투자다. 환란의 경험을 교훈 삼아 많은 나라가 외환보유액을 쌓아왔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해 자금 유출에 대비해 왔다. 따라서 연쇄 도미노로 신흥시장 전체가 화염에 휩싸일 가능성은 과거보다 작다.
그러나 최근 모건스탠리가 만든 신조어 ‘F5(Fragile 5, 취약한 나라 5개국)’에 속하는 인도·인도네시아·브라질·터키·남아프리카공화국은 요주의 대상이다. 이들은 큰 폭의 경상수지 적자를 내는 나라다. 기업에 비유하면 거듭된 적자로 외부로부터 차입이 없으면 현금흐름에 구멍이 나는 나라다. 이 중에서도 약체는 인도네시아와 인도다. 이들이 실제 국가부도 사태에 준하는 환란을 겪는다면 신흥시장 전반의 분위기는 상당 기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환란 가능성은 작다. 외환보유액은 탄탄한 편이며 경상수지는 지속적으로 흑자다. 그러나 실물 분야에선 대(對)아세안 무역 위축이 불가피하다. F5의 위기 전개에 따라 우리 외환시장과 주식시장 역시 요동칠 수밖에 없다. 다만 아세안과 중국의 경기 둔화로 원자재 가격이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떨어진다면 아세안 수출시장에서 입은 타격을 원자재 수입비용 절감 등으로 일부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념할 게 있다. 지금의 신흥시장 위기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이 변경되는 일정에 따라 위기가 당분간 반복될 것이다. 첫 번째 변곡점은 최근 나타난 무제한 양적완화 축소의 시작이고, 두 번째 변곡점은 양적완화 축소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는 순간, 세 번째 변곡점은 양적완화 완전 중단, 그리고 네 번째 변곡점은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이 시작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흥시장의 위기는 반복되고 약한 고리가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헤픈 미국의 뒷감당 신흥시장이 하는 셈미 연준 통화정책의 변곡점마다 미국 국채수익률은 한 뼘씩 뛰어 오르겠지만 신흥시장발 위기를 통해 금리 상승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신흥시장 위기가 안전자산 선호를 불러와 미국 국채의 매력을 더하고 이로 인해 뛰어오르려던 미국 국채 금리가 일정 부분 안정된다는 의미다. 그 덕분에 미국 정부는 국채 이자 부담을 경감하는 한편 자국 경제 주체들의 이자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이처럼 통화정책 변경에 따른 충격은 선진국에서 시작되지만 주변부 약한 고리의 위기를 통해 희석된다. 좋든 싫든 이것이 지난 수십 년간 신흥국 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환란의 본질이다. 물론 무한정 지속되는 호황이 없듯 무한정 지속되는 위기도 없다. 신흥시장 국가 어디든 버티면 한 뼘 더 자라고, 못 버티면 빚으로 쌓아 올린 영광의 탑을 돌려줘야 할 것이다. 돈 들어온다고 흥청망청하지 말 것이며, 소 잃기 전에 외양간 고쳐야 한다는 옛 사람들의 가르침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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