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피플 [23] - 애니메이션 역사 다시 쓴 살아 있는 전설
글로벌 파워피플 [23] - 애니메이션 역사 다시 쓴 살아 있는 전설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자 제프리 카젠버그(63)는 애니메이션 분야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35세에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대표를 맡은 뒤 업계 꼴찌로 거의 빈사상태에 있던 스튜디오를 업게 1위로 돌려놨다. 10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 다음 1994년 드림웍스 SKG를 창업해 새로운 애니메이션으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재산도 8억6000만 달러나 된다. 창조산업의 하나인 애니메이션으로 부자가 되고 파워 인물이 됐다. 10월에 한국을 방문해 박근혜 대통령과 창조경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삶 자체가 창의, 그 자체다. 카젠버그는 미국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다. 뉴욕의 사립학교인 ‘에시컬 컬처 필드스턴 스쿨’에서 고교 과정을 마쳤다. 대학은 다니지 않았다. 대신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 제작자들의 보조로 일을 시작했다.
1974년 마케팅 부서에 배치된 그는 TV시리즈였던 ‘스타 트렉’을 영화로 다시 살리는 임무를 맡았다. 그 결실이 1979년 나온 극장 영화용 ‘스타 트렉’이다. 그는 일을 계속해 파라마운트 회장인 마이클 아이스너 밑에서 프로덕션 부장으로 일했다. 아이스너는 카젠버그와 평생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1984년 아이스너가 디즈니 본가인 ‘월트디즈니 컴퍼니’의 최고경영자로 옮기면서 카젠버그는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 아이스너는 1984년부터 2005년까지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최고경영자를 지냈다. 아이스너는 카젠버그를 자회사인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의 대표에 임명하고 디즈니의 영화 부문을 맡겼다. 불과 35세의 카젠버그에게 핵심 부문 대표를 맡긴 것이다.
카젠버그는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대표를 지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디즈니 스튜디오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는 과감한 아이디어 채택과 함께 적극적인 투자로 한동안 자신감을 상실한 채 무너져가던 디즈니 스튜디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1970년대 이후 침체를 면치 못했던 극작용 장편 애니메이션 시장을 복구시켜 디즈니의 명성을 재현했다. 미디어에선 이 시기를 ‘디즈니 르네상스 시대’ 또는 ‘디즈니의 부활기’라고 부를 정도다.
카젠버그가 옮겼을 당시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중에서 매출이 최악이었다. 카젠버그는 자회사인 터치스톤을 통해 당시로선 신선한 성인용 코미디를 연속으로 제작해 성공을 거뒀다. ‘베벌리 힐의 낮과 밤’(1986),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1987), ‘굿모닝 베트남’(1987) 등 명작 코미디가 줄이어 나왔다. 이에 힘입어 1987년에 디즈니는 최고 흥행의 스튜디오로 거듭났다. 카젠버그는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도 맡았다. 이 분야에서 카젠버그는 천재적인 제작 능력을 보였다.
1988년 그는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판타지 애니메이션 영화인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는가’를 70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해 3억298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이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일반 영화로 분류된다).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대표로 있던 시기에 그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등이다.
하나같이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다시 쓴 역작이자 대성공작이다. 그는 자신의 애니메이션을 그림이 신기하게 움직이면서 위트 넘치는 코미디 정도나 연출하던 이전의 애니메이션과 철저히 차별화했다.
10년간 디즈니 부활 이끌어소재·스토리·캐릭터·주제가·색채·음성 연기 등을 종횡무진 결합해 애니메이션의 수준과 재미를 총체적으로 끌어올렸다. 그 결과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 1989년 나온 ‘인어공주’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부활을 알리는 축포 구실을 했다. 4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모두 2억1134만 달러의 수입을 올려 흥행기록을 새롭게 수립했다. ‘인어공주’는 1988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올리버와 친구들’이 기록한 7400만 달러를 깨고 1억 달러 매출을 넘어서며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었다.
1941년 개봉한 ‘밤비’와 1961년 개봉한 ‘101마리 달마시안’에 이어 당시까지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3위를 차지했다. ‘인어공주’는 평단의 반응도 좋았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상에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1977년 작인 ‘생쥐구조대’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최종적으로는 최우수 음악상과 최우수 주제가상을 받았다. 당시 이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인 ‘언더 더 시’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카젠버그는 그 여세를 몰아 1991년에는 2500만 달러를 들여 ‘미녀와 야수’를 제작해 4억2496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듬해엔 2800만 달러를 들인 ‘알라딘’을 개봉해 5억4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1994년에 내놓은 ‘라이온 킹’은 애니메이션 흥행의 역사를 아예 새로 쓰게 했다. 45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거액을 들인 이 작품이 무려 9억6148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것이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흥행기록으로는 역대 1위다.
‘알리딘’은 전통 제작기법으로 만든 작품 중 3위다. 컴퓨터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합칠 경우 ‘라이언 킹’은 2010년 개봉해 10억6317만 달러의 흥행 기록을 세운 ‘토이 스토리3’에 이어 역대 2위다. 게다가 ‘라이온 킹’ ‘인어공주’ ‘알리딘’ ‘미녀와 야수’ 등은 원소스 멀티유즈를 이끄는 견인차가 됐다. 영화관에서 상영 후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되는 것은 물론 음반·뮤지컬·연극 등등 다양한 미디어로 확대 재생산됐다.
카젠버그는 미디어의 미래를 보는 눈도 있었다. 그는 컴퓨터 제작 애니메이션 기술을 보유한 픽사와 제휴 계약을 했다. 개성있는 영화를 제작하는 미라맥스를 디즈디 스튜디오의 틀 안에 영입하는 등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미래 투자를 했다. 픽사는 지금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내세워 드림웍스와 함께 애니메이션 업계를 양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도 픽사의 기술에 반해 초기에 투자를 했는데 카젠버그는 그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것이다.
그런 카젠버그는 1994년 뜻밖의 일로 디즈니를 떠나게 됐다. 그 해 4월 본사인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인 아이스너 밑에서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를 지내던 2인자 프랭크 웰스가 헬기 사고를 세상을 떠났다. 카젠버그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임명될 줄 알았는데 아이스너는 그 자리를 공석으로 뒀다. 그러면서 카젠버그와 아이스너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에 일찍 눈 떠그 해 9월 디즈니를 그만 둔 카젠버그는 할리우드의 제작자 스티븐 스필버그와 데이비드 게펜과 손잡고 엔터테인먼트사 드림웍스 SKG를 세웠다. SKG는 세 사람 성의 머리글자를 딴 조어다. 드림웍스는 할리우드에 경천동지할 변화를 가져왔으며 상호 창의성 경쟁의 시대를 이끌었다. 카젠버그는 여기서도 애니메이션에 주력했다. 2004년 드림웍스 SKG에서 애니메이션 부문이 분리돼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면서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
카젠버그는 드림웍스에서 애니메이션 분야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다. 디즈니에서의 성공이 거대 조직과 브랜드 덕분에 거저 얻은 게 아니고 자신의 아이디어와 창의성, 그리고 경영 능력으로 이뤘음을 증명했다. 특히 예쁜 공주가 멋진 왕자를 만나 해피엔딩으로 끝나던 구시대적인 스토리라인의 고전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철저히 다른 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못생긴 주인공을 내세운 ‘슈렉’이다. 이 작품에는 디즈니의 옛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슈렉 집 근처에 있는 진창에 빠져 허덕이는 장면이 잠시 나온다. 디즈니에 담긴 애증에 대한 표현일 것이다. 아울러 디즈니를 넘지 않으면 드림웍스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을 담은 것일 수 있다.
‘슈렉’은 투자 대비 8배 넘는 수익절박함이 천재성을 자극한 것일까. 결과는 흥행 성공이었다. 드림웍스에서 그는 1998년 첫 작품인 ‘개미’를 낸 이래 지금까지 모두 27편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1억 달러 이하를 번 것은 2000년에 만든 ‘엘도라도’와 2003년에 만든 신‘ 밧드- 7대양의 전설’ 정도다. 이 두 편의 매출은 제작비보다는 많았지만 마케팅 비용을 감안하면 적자다. 나머지는 대부분 흑자다.
심지어 도박업에 비교되기까지 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이 정도 성공 확률은 야구의 투수로 치면 최소한 ‘노히트 노런’이다. 그는 미다스의 손을 가졌다. 손대는 작품마다 황금으로 변했다. 모두 4편의 ‘슈렉’ 시리즈로 29억5578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3편의 ‘마다가스카’ 시리즈로는 18억 8350만 달러를 벌어 들였다. 2편의 ‘쿵푸 팬더’ 시리즈로는 12억9743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특히 2001년에 만든 ‘슈렉’은 6000만 달러의 예산으로 4억8440만 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렸다. 들인 돈의 8배 이상을 뽑았다. 물론 마케팅 비용을 감안하면 이보다는 수익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상당한 고수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글로벌 애니메이션 시장은 그야말로 ‘진격의 시대’을 맞았다. 지난해 6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12 해외콘텐츠시장 동향조사’ 보고서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2011년 전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138억 달러였으며 2008∼2010년 사이 3년간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특히 2010년에는 11.4%의 큰 폭으로 성장했다.
3차원(D)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박스오피스 흥행 성공으로 인한 애니메이션 영화 분야의 성장(21.8%)과 이에 따른 홈비디오 시장의 선전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이후 향후 5년간 애니메이션시장 연 평균 성장률은 4.2%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10년 141억2000만 달러 규모였던 전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규모는 지난해 148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으며 올해는 142억4700만 달러, 2015년엔 167억8100만 달러, 2016년엔 170억 달러로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카벤버그는 중국에 45%의 지분 참여로 ‘오리엔탈 드림웍스’를 세워 2015년 개봉을 목표로 ‘쿵푸 팬더 3’을 제작 중이다. 전 세계에서 아시아 애니메이션 시장이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에 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의 방한에는 한국에서 발견한 콘텐트로 작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팔면서 아시아 시장에서의 비율을 높이자는 생각이 담겨있을 것이다. 디즈니와 드림웍스에서 연속 혁명을 일으킨 그의 창조경제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흡수할지를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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