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ART - 근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스페인 국민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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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은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화풍으로 어느 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며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인물 사이의 관계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작품의 배경은 펠리페 4세의 마드리드 궁전에 있는 큰 방이다. 스페인 왕실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들을 마치 스냅 사진처럼 정확히 포착했다. 몇몇 인물은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다른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동작을 진행하고 있다. 어린 마르가리타 왕녀를 시녀들과 샤프롱, 호위병, 그리고 두 명의 난장이가 에워싸고 있다.
그들 바로 뒤에 벨라스케스 자신이 큰 캔버스에 작업 중인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 내부의 공간을 넘어 이 그림을 감상할 누군가가 자리할 캔버스 밖을 바라보고 있다. 배경에는 거울이 걸려 있으며 거울 속에는 왕과 왕비의 상반신이 보인다. 이 왕과 왕비는 감상자와 마찬가지로 작품 내부가 아닌 바깥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몇몇 학자들은 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그림 속에서 벨라스케스가 작업 중인 작품 속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혀 왔다. 바로크 시대의 화가 루카 지오다노는 이 작품을 ‘회화의 신학’이라고 묘사했고, 19세기 영국 초상화가 토머스 로런스경은 ‘미술의 진정한 철학’이라고 일컬었다. 최근에는 ‘회화로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 케스의 걸작이며, 이젤을 사용한 회화 방식이 가진 가능성을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들었다.
― 출처: 위키백과
사람들은 문화적 우상이 사회의 아웃사이더처럼 행동할 때 쾌감을 느낀다. 작가 찰스 부코스키는 ‘빈민가의 계관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장 폴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공식적인 명예”를 혐오해 수상을 거부했다. 전설의 프로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당시 군복무를 거부했다. “난 베트콩과 싸울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또 가수 시네이드 오코너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해 공연하던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갈가리 찢었다.
하지만 17세기 스페인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완벽한 인사이더로서 왕족들과 가까이 지내며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당시 기준으로 봐도 혁명가나 인습타파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펠리페 4세 국왕을 위해 그린 그림들은 근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대상에서 표현할 만한 요소는 모조리 찾아내 상세하게 묘사했다. 교황이 입술을 오므리는 모습부터 어린 공주의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잭슨 폴록은 술에 취해 자신의 감정을 분출했고 고갱은 타히티에서 낭만적인 환상에 빠졌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오로지 화가로서 완벽한 기술을 연마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열리는 ‘벨라스케스와 펠리페 4세의 가족(Velázquez and the Family of Philip IV) 전’(2014년 2월 9일까지)은 그 기술을 엿보게 해준다.
벨라스케스와 마소(벨라스케스의 사위), 카레뇨 등 그의 제자들이 그린 그림 30점이 전시됐다. 1649~1660년 제작된 작품들로 이 시기에 벨라스케스는 로마로 두 번째 여행을 다녀오고 펠리페 4세의 궁정에서 마지막 10년을 보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나중에 자신의 대표작이 된 ‘시녀들’을 그렸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를 미술계의 최고봉에 올려놓았다. 이 전시회에는 이밖에도 비엔나와 뉴욕, 파리 등지에서 대여해 온 벨라스케스의 걸작들이 전시됐다. 어두운 분위기와 섬세한 묘사가 눈길을 끄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왕녀 마르가리타’와 교황이 악마와 눈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 등이다.
펠리페 4세는 초상화에서 창백한 얼굴에 초점을 잃은 듯한 눈으로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다. 제국의 쇠퇴를 감지했기 때문일까? 사실 벨라스케스가 태어난 1599년 이미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금기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프란치스코 파체코(화가보다는 스승으로서 더 자질이 높았다)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한 뒤 궁정화가로 발탁돼 평생을 궁정에서 보냈다. 그는 요즘의 큐레이터와 유사한 직책도 맡았다.
벨라스케스의 전기는 지루할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일반 관람객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미술사학자 빌리발트 자우어랜더는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이렇게 썼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은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배제한다. 그 그림들을 친밀하게 느끼기는 어렵다. 그저 멀찌감치 서서 그 풍부한 색채와 세련된 아름다움에 경탄할 뿐이다. 그 그림들은 마치 백성에게 알현을 허락하는 군주처럼 위엄있고 당당하게 관람객을 마주한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사실주의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물이 있는 그대로 묘사됐다. 신비주의적이고 과장된 엘 그레코와 달리 벨라스케스는 종교적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또 고야와 달리 인간 마음의 가장 어두운 틈새를 파고들지도 않았다. 벨라스케스는 자신이 보는 대로 그렸다. 그가 그렇게 뛰어난 시각을 지녔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행운이다.
벨라스케스의 작품들은 언제나 스페인의 자아인식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에 스페인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북쪽의 제국들은 융성했다. 지금도 그때와 유사한 상황이다.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부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독일 등 북쪽 국가들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자국 문화에서 가장 믿음직한 존재에 의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스페인 회화부문 큐레이터 하비에 포르투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국민의 집단적 기억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기준이다. 수세기 동안 우리는 그의 작품을 우리 자신과 역사를 비춰보는 거울처럼 이용해 왔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이 경기침체에 빠지고 문화기관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프라도 미술관이 스페인 관람객과 해외 관광객을 끌어들일 요량으로 벨라스케스 전시회를 열었다고 주장한다. 프라도 미술관의 대변인 마리아 델라 페냐 페르난데스-네스프랄은 “그것이 이 전시회의 목적은 아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그런 측면도 고려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그런 논란은 잠시 제쳐놓고 작품을 감상해 보자. ‘왕녀 마르가리타’는 꽃처럼 피어나는 소녀의 이미지가 호화로운 의상과 막중한 지위에 눌린 듯 보인다.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는 연약한 왕자의 애처로운 모습을 담았다. 옆의 소파에서 쉬고 있는 개가 주인보다 훨씬 더 편안해 보인다. ‘시녀들’ 앞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변명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때 변명이 필요 없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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