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POLITICS - ‘취약한 제국’ 푸틴의 러시아
GEOPOLITICS - ‘취약한 제국’ 푸틴의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은 옛 소련의 영광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하다. 최근엔 크림공화국을 합병함으로써 그 영광을 재창조하는 쪽으로 극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는 자국의 역사를 꼼꼼하게 읽지 않은 듯하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떨쳤던 소련의 위세가 무엇보다 석유와 천연가스의 높은 가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1980년대 들어 그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자(거기엔 로널드 레이건이 이끈 미국 정부의 힘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와 함께 소련의 막강하던 힘도 빠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세대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서방 정치인들은 에너지가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역사의 재연’이라는 게임을 할 수 있는 지도자가 푸틴만이 아니다는 뜻이다.
푸틴의 러시아에 관한 책 ‘취약한 제국(Fragile Empire)’을 쓴 벤 주다는 이렇게 말했다. “푸틴이 지금은 강해 보이지만 그의 크렘린은 러시아에서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유일한 것 위에 세워졌다. 에너지 가격이다. 궁극적으로 그 수입원이 고갈되면 1980년대 말 소련 지도자들과 똑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는 동시에 국가가 사분오열될 수 있다.”
백악관이 석유와 천연가스 수출면허 규제완화를 회피함으로써 푸틴이 “자신의 지정학적 목표 달성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존 베이너 하원의장(공화당)의 비난 때문이었다. 또 오바마는 전략비축유(strategic reserve) 7억2700만 배럴 중 500만 배럴을 ‘시험적 방출(test release)’로 매각해 유가 하락을 유도했다. 이에 질세라 푸틴도 에너지 카드를 썼다. 4월 1일 러시아 국영 가스 대기업 가스프롬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가격을 40% 이상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오바마가 석유대기업에 우호적인 대통령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세계 에너지 수급의 장주기(macro cycles of energy supply and demand)가 그에게 유리하다. 지난 6년 동안 셰일가스와 채굴하기 어려운 원유를 생산하는 수압파쇄법의 개발로 미국의 에너지 가격이 크게 낮아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면서 미국 국내 원유생산이 60%나 증가했고, 천연가스 가격은 2008년 수준의 3분의 1로 떨어졌다. 미국은 2016년이 되면 석유 생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능가하게 되고, 2020년에는 완전한 에너지 자립국이 될 전망이다.
더구나 나머지 세계에도 더 많은 석유가 시장으로 흘러 들고 있다. 이라크의 웨스트쿠르나-2 유전(얄궂게도 러시아의 루크오일이 지분을 소유한다)은 올해 중반부터 하루 400만 배럴을 퍼올릴 계획이다. 이란은 지난해의 핵프로그램 중단 관련 임시 합의 후 첫 국제제재 완화 이래 처음으로 원유를 수출할 예정이다.
조지 소로스 같은 에너지 ‘매파’는 사우디아라비아도 생산량을 늘려 러시아를 압박하는 일에 기여하라고 촉구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응징하기 위해 유가를 끌어내리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나라는 석유 잉여생산 능력이 막강한 사우디였다. 세계의 에너지 상황이 그때와 크게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사우디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석유를 생산하고 있다. 그런 사우디가 작심하고 하루 3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추가로 생산하면 유가가 급락해 다른 모든 나라가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우디가 미국을 도우려고 선뜻 나설 듯하지 않다. 우선 사우디는 미국이 이란과 화해를 하려는 데 격분했다. 또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에 맞서 싸우는 반군의 대부분이 사우디가 지지하는 수니파인데도 미국이 그들을 적극 지원하지 않아 미국에 대한 반감이 크다. 게다가 사우디는 유가가 하락하면 러시아에 못지 않는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사우디의 예산은 원유 가격이 배럴당 약 85달러가 돼야 균형이 맞는다.
물론 사우디는 푸틴에 대한 반감도 크다. 푸틴이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모스크바 외곽에서 열린 비밀 회담에서 사우디 국가안보위원장 반다르 빈 술탄 왕자는 푸틴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알려졌다. 러시아가 아사드 지원만 중단한다면 동지중해 석유 채굴에 대해 러시아에게 자유재량권을 주고, 소치 올림픽을 방해할지 모르는 체첸 극단주의자들을 제어하겠으며, 심지어 러시아 해군 기지를 시리아에 설치하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와 레바논 언론이 보도한 그 회담의 녹취록에 따르면 빈 술탄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의 안전한 개최를 위협하는 체첸 반군은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부터 키프로스까지 동지중해의 석유와 천연가스에 러시아가 큰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한다. 또 유럽에 가스를 공급하는 러시아 파이프라인의 중요성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러시아와 경쟁할 생각이 없다. 그 분야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다.”
푸틴은 그런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확고히 밀어주기로 결심한 게 분명하다. 2013년 성탄절에 러시아는 국영 에너지 회사 소유즈네프테가스가 동지중해 레반트 유역 대부분의 석유가스 채굴권을 25년 동안 보장받는 계약을 아사드 정권과 체결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로선 사우디가 러시아와 공멸하기보다 러시아와 대화를 선호하는 듯하다.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사우디의 원유 증산이 없을 경우 서방의 에너지 ‘매파’로서는 유럽의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일이 급선무다. 러시아는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했다. 우크라이나를 통해 가스를 공급받는 유럽국들도 그 피해를 입었다. 가스프롬이 또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고 판단한 유럽 국가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6년부터 2013년 사이에 유럽의 천연가스 소비량 전체에서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39%에서 25%로 줄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스프롬과 자회사들은 독일 최대의 가스 저장시설을 포함해 유럽의 기반시설 매입에 열을 올렸다. 또 유럽에 더 많은 시설을 건설하는 계약도 체결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는 러시아 가스를 발칸 지역으로 보내는 사우스 스트림 파이프라인(가스프롬이 주도한다)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반면 유럽연합(EU)이 지원하는 아제르바이잔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인 나부코(Nabucco)는 가스프롬의 자금력과 러시아 외교에 의해 거듭 발목이 잡혔다. 나부코는 투르크메니스탄과 이라크 등 카스피해와 중동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가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오스트리아에 공급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러시아의 크림공화국 합병은 에너지 문제에서 “유럽에 아주 큰 경종을 울렸다”고 호세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이 지난 3월 말 브뤼셀의 EU-미국 정상회의에서 말했다. “유럽은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아주 강단 있게 노력하는 중이다.” 유럽에서 정치력이 막강한 녹색당이 반대하는 수압파쇄와 핵에너지 기술의 개발을 밀고 나가겠다는 뜻이다.
미 에너지 정보청(EIA)의 자료에 따르면 유럽의 셰일가스 매장량은 약 13조㎥에 이른다. 유럽 전체가 26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그러나 현재는 폴란드와 영국만 셰일가스를 생산한다.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수압파쇄 기술(fracking) 덕분에 폴란드가 10년 안에 “제2의 노르웨이”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엑손모빌, 탈리스만, 마라톤 오일은 2013년 폴란드 셰일가스 탐사를 모두 포기했다. 사실 시코르스키 같은 낙관론자는 소수다. 수압파쇄 기술은 독일, 덴마크, 아일랜드, 네덜란드에서 비공식적으로 금지됐고, 불가리아와 프랑스에선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위기 컨설팅업체 유라시아 그룹의 윌 피어슨 세계 에너지·천연자원 국장은 “프랑스와 독일이 셰일가스 정책을 바꾸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이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 부문에 대한 반감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그러나 그 과정이 신속하진 않을 것이다.
다른 대안은 핵에너지다. 그러나 유럽이 체르노빌 참사의 망령을 극복할 희망은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사고로 깨지고 말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녹색당의 압력에 못 이겨 2022년까지 독일의 모든 원전을 가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메르켈의 계획은 현재 핵에너지로 충당되는 수요의 15%를 신재생에너지로 보충한다는 것이다. 녹색당의 로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독일 정치인은 거의 없다.
정치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유럽이 가스프롬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은 LNG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최근 아니타 오르반 헝가리 에너지 안보 대사는 미국 의회에서 “독점 공급자가 가격을 무기로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불협화음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안 공급선의 확보”라고 말했다. LNG는 사업적으로도 수익성이 높을 수 있다.
현재 유럽인들은 천연가스 1000㎥ 당 거의 300달러를 지불한다. 미국 현물가격의 약 세 배다. 그러나 국제 가스정보 교류협회(CEDIGAZ)의 조프로이 위로 사무총장은 유럽이 미국 가스 수입을 임시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 LNG 사업자의 대다수는 아시아 수출을 선호한다. 가격이 더 높기 때문이다.”
아무튼 미국 LNG 수출 시설로 새로 인가 받은 6개 중 첫째인 루이지애나주 시설은 2015년이 돼야 완공된다. 유럽은 그런 터미널이 이미 22개나 있다. 대부분 알제리, 이집트, 카타르의 가스를 수입하는 데 사용된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도 새로운 시설을 짓고 있다.
유럽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줄이겠다는 위협에 러시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며 오히려 중국으로 수출선을 돌리겠다고 위협한다. 가스프롬은 중국 정부와 체결한 15년 공급 계약을 30년으로 바꾸는 문제를 현재 협상하는 중이다. 분석가들은 5월 푸틴이 중국을 방문할 때 계약이 체결되리라 예상한다.
거대한 두 인접국가인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계약은 어려운 문제가 결코 아니다. 러시아는 석유와 천연가스를 대량으로 생산하며 중국은 그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소비한다. 앞으로 수십 년은 그럴 전망이다. 그러나 그런 계약의 기대는 계속 실현되지 않았다. 두 나라가 수십 년 동안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경제가 급성장하는 반면 러시아의 극동 지역은 개발이 미진하고 거의 비어 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가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해 취임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양국 관계 개선에 관심이 크다. 이번 LNG 계약의 성사 여부가 두 나라 관계의 개선 정도를 반영할 듯하다. 중국은 지금까지 가스프롬이 원하는 가격에 불만을 갖고 다른 중앙아시아 가스 생산국들과 계약을 체결하려고 노력해왔다.
이제 우크라이나 사태와 서방의 강한 반응 때문에 러시아가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서 중요한 시장을 확보하려면 중국의 조건을 수용해야 한다는 압력이 더 커졌다. CEDIGAZ의 조프로이 위로 사무총장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위기로 가스 가격을 둘러싼 러시아와 중국의 협상에서 힘의 균형이 동쪽으로 기울고 있다.
현재 가스프롬의 가스 판매 수입 중 약 55%가 유럽에서 나온다. “러시아는 그 구조를 다변화하고 싶어한다”고 위로는 말했다. 양측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원자재 전문 금융사 간부는 중국이 원하는 조건에 근접한 수준으로 러시아가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이 있는지 묻자 “두말하면 잔소리(Yes and yes)”라고 말했다.
일부 분석가들은 가스프롬이 그 거래를 실행할 능력에 의문을 표했다. 가스프롬의 공공연한 비밀은 러시아 국내 가스 생산의 대부분이 국내에서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비효율적인 산업과 도시들이 그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럽에 수출하는 가스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헐값으로 사들인 것이다.
그러나 2년 전 중국은 가스프롬을 배제하고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중국까지 6400㎞에 이르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건설 비용은 65억 달러였다. ㎞ 당 약 100만 달러다. 그에 비해 가스프롬의 보바넨코보-우크타 파이프라인 건설 비용은 ㎞ 당 1800만 달러다. 중국의 경쟁력이 원산지의 가격을 올려 가스프롬의 이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금액은 상업 비밀이지만 중국은 투르크메니스탄에 가스 1000㎥ 당 100~140달러를 지불하는 듯하다.
중국도 셰일가스 혁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질학적 문제가 많다. 우선 수압파쇄 기술은 수자원 집약적인 과정이다. 중국의 셰일층에는 물이 부족하다. 그러나 낙관적인 예상에 따르면 중국은 2015년 셰일가스를 약 65억㎥, 2020년이 되면 600억~1000억㎥ 생산할 수 있다. 중국이 투르크메니스탄과 중국 내부의 셰일층으로 이미 저렴한 가스를 상당량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이 가스프롬과 계약을 주저하는 또 다른 이유다.
푸틴이 중국과 계약을 체결하든 않든 요점은 이것이다. 크렘린이 러시아 경제의 다변화가 중요하다고 수년 째 이야기하고 있지만 러시아 경제는 여전히 유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지난해 석유와 가스로 벌어들인 돈이 러시아 전체 수출액의 70%, 정부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원유를 하루 700만 배럴 이상 수출한다. 사우디 다음으로 수출량이 많다. 그 수익의 일부는 예비금으로 적립되고 있지만 대부분은 푸틴이 썼다. 예를 들어 소치 동계 올림픽에 530억 달러를 쏟아 부었고, 최근 고위 공무원 임금을 20% 인상했다.
그런 과도한 지출을 감안하면 지금은 유가가 배럴당 117달러가 돼야 러시아 정부가 예산 균형을 맞출 수 있다(2008년에는 배럴 당 45달러로 예산 균형이 맞았다). 푸틴의 크렘린 경력 14년 중 대부분의 기간에 유가가 가차없이 올랐지만 지금 세계 유가는 점진적인 하향 추세다. 소비가 둔화하고 생산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세계 유가의 바닥 수준이 배럴 당 90달러였지만 앞으로는 최고 수준이가 90달러가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시티그룹의 세계 원자재조사국장 에드워드 모스가 말했다.
로마 소재 나토 국방대학의 앤드루 모너건은 서방이 단기적으로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유가를 낮추려고 노력해도 “아직은 러시아에 뚜렷한 피해를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재정 예비 비축금이 완충 역할을 한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뼈아프게 깨달았듯이 쇠락하는 경제보다 지도자의 권력과 인기도에 더 치명적인 것은 없다. 러시아에선 유가가 하락하면 경제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서방이 주도하는 에너지 전쟁은 푸틴이 좋아하는 신속한 영토 점령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강력한 무기다. 제국을 무너뜨리는 효과가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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