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폴레옹의 재발견

프랑스 퐁텐블로 성의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나폴레옹 1세 황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특유의 검정색 펠트 2각모와 녹색 군복 상의, 흰색 반바지 차림에 승마 부츠를 신은 그는 넓은 돌 계단 맨 위에 서서 아래쪽 뜰에 모여 있는 군중을 향해 거수경례를 한다. 그의 시선이 매우 강렬하다.
나폴레옹의 뒤에는 화려한 색상의 제복을 입고 깃털 달린 모자를 쓴 장군들이 허리에 칼을 차고 서 있다. 아래쪽 뜰에는 곰 가죽으로 만든 샤코(깃털 장식이 앞에 달린 군모)를 쓴 황실근위병 수백 명이 차려 자세로 서 있거나 말을 타고 있다. 그들 중 다수가 금 귀걸이를 했다.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다.
친위대는 나폴레옹이 가장 아끼던 군대다. 나폴레옹은 그들에게 “불평가들(Les Grognards)”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나폴레옹 앞에서 대담하게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들 너머로 광장과 근처의 길거리엔 프랑스 시민 약 4만 명이 모였다.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다부진 체격의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15년 동안 통치했다. 마지막 10년은 ‘프랑스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그의 군대는 유럽의 많은 지역을 정복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결국 연합군에 패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황제 직을 박탈 당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사람들 앞에서 감동적인 이별 연설을 할 참이다.
이 무대의 배경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퐁텐블로 성의 안마당이며 시점은 2014년 4월 20일이다. 나폴레옹 역할을 맡은 사람은 프랑스 변호사 프랑크 상송이다. 검정색 가발을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나폴레옹이다. 그는 벌써 10년째 나폴레옹 역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들과 근위대, 그리고 다른 군인들을 포함한 행사 참여자 500명 전원이 상송처럼 나폴레옹 시대의 복장을 입었다. 그들 모두 자비 수천 유로를 들여 옷을 해입고 무보수로 행사에 참여하는 나폴레옹의 열성 팬들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자 군중이 ‘황제 폐하 만세! 황제폐하 만세!”를 외쳤다. “제군들 같은 충신이 있으니 우리는 패배한 게 아니오”라고 가짜 나폴레옹이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에게 말한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망명하는 것은 프랑스의 국익을 위한 자기희생이라고 말한다. “안녕, 나의 아이들. 제군들 모두를 내 가슴에 안고 싶소.”
하지만 이제 더는 “황제 폐하 만세!”라는 외침이 프랑스 곳곳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프랑스인이 그를 좋아하진 않는다. 1814년 봄 망명길에 오른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부를 지날 때 구경꾼들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의 권력욕은 프랑스인 100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있었다.
그 이듬해 나폴레옹은 터미네이터처럼 돌아왔다. 하지만 100일 만에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 헬레나로 두 번째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821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지 200년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도 프랑스인들은 그가 영웅인지 악당인지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견해는 대체로 정당을 기준으로 갈린다”고 파리 나폴레옹 재단의 영국 역사학자 피터 힉스 교수가 말했다. “좌파에서는 나폴레옹을 괴물로 보는 ‘검은 전설(black legend)’이, 우파에서는 지속성 있는 제도를 만든 강력한 지도자로 보는 ‘황금의 전설(golden legend)’이 전해 내려온다.”
프랑스 정치인들과 각 기관들은 나폴레옹의 망명 2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특히 신경을 곤두세우는 듯하다. 퐁텐블로의 ‘이별’ 행사를 비롯해 3주 간의 주말에 걸쳐 열리는 수십 가지 관련 행사의 비용을 파리의 중앙정부뿐 아니라 퐁텐블로 성(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역사적 기념물이다)과 퐁텐블로시가 부담한다.
1989년 프랑스 정부는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반대파 수천 명을 단두대로 처형한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관련된 기념일은 공식적으로 기려지지 않는다. 일례로 10년 전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는 나폴레옹 최대의 군사적 승리로 일컬어지는 오스테르리츠 전투 200주년 기념식을 보이콧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역사의 일부가 아닌 듯 느껴질 정도”라고 힉스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2010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프랑스 점령 당시 망명지 런던에서 프랑스를 이끌었으며 전후에 대통령을 지낸 샤를드 골 장군에 이어 나폴레옹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파리 거리에 세워진 나폴레옹의 동상은 단 두 개뿐이다. 하나는 앵발리드(군사박물관)의 시계탑 밑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방돔 광장의 기념탑 꼭대기에 있다. 앵발리드 돔 아래쪽의 지하 공간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는 붉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장엄함을 뽐낸다.
그의 묘가 이렇게 웅장하게 지어진 것은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권좌에 있던 프랑스 제2제국 시절 유해가 이곳으로 옮겨져 묻힌 덕분인 듯하다. 또 파리엔 나폴레옹의 이름을 딴 광장이나 대로가 하나도 없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센강으로 난 좁은 길에 ‘보나파르트로’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그 역시 나폴레옹 3세 덕분이다.
“나폴레옹은 합당한 만큼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나폴레옹을 쏙 빼 닮은 상송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프랑스를 재건했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그는 후대에 긍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공화파는 자기네 파가 아니면 무조건 싫어한다.”
파리 소르본대 역사 교수이자 나폴레옹 연구소의 소장인 자크-올리비에 부동은 이렇게 설명했다. “나폴레옹과 관련해서 프랑스 여론은 깊이 분열돼 있다. 한 쪽은 그를 위대한 사람, 정복자, 군사 지도자로 존경하지만 다른 한 쪽은 피에 굶주린 폭군, 혁명을 망친 장본인이라고 비난한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권위주의를 꾀한다거나 훌륭한 공화주의자가 아니라는 비난을 들을까 두려워 좀처럼 나폴레옹을 언급하려 들지 않는다.”

지난 3월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가 ‘나폴레옹의 폐해(The Napoleonic Evil)’라는 책을 펴내면서 이 대립이 다시 한번 불거졌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면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나폴레옹이 누리는 영광과 그가 실제로 프랑스와 유럽에 초래한 결과 사이의 격차에 흥미를 느꼈다”고 조스팽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조스팽은 나폴레옹이 “명백한 패배자”라고 말한다. 프랑스와 유럽 전체에 나쁜 일이다. 그가 퇴위 당했을 당시 프랑스는 고립되고 패배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 점령 당하고 지배를 받았으며 미움을 샀고 이전보다 훨씬 더 작아져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으로 깨어난 해방 세력을 질식시켰다. 그리고 군주제의 생존과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민법(뒤죽박죽이던 봉건시대의 법을 대체하는 포괄적인 법 체제) 제정 등 나폴레옹이 남긴 것으로 인정받는 유산 중 일부는 혁명 중에 제안된 것이었다고 조스팽은 주장한다.(하지만 조스팽도 법 제정을 실현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는 혁명의 일부 원칙을 수호했지만 그 방향을 바꿨으며 그것을 완수하고 나서 배신했다”고 조스팽이 말했다. 일례로 나폴레옹은 프랑스 식민지에 노예제를 재도입했고 부자들이 군 징집을 회피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성평등 증진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또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유럽의 진짜 왕족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이기에 앞서 늘 전사였던 그는 자신을 카이사르에 견주었으며 그의 묘에 새겨진 양각 초상에도 토가(고대 로마인이 입던 헐렁한 겉옷)를 입은 모습으로 묘사됐다. 그가 대관식 때 썼던 왕관(금으로 된 월계관)도 이런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의 상징인 독수리 역시 고대 로마에서 빌려 왔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정통성은 군사적 승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데 반해 나폴레옹은 수많은 패배를 경험했다.
케임브리지대의 역사학 교수 크리스 클라크는 조스팽보다 한술 더 뜬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으며 나중엔 황제가 됐다. 프랑스에 깊은 소속감을 느낄 만한 과정이 결여됐다.” 클라크가 뉴스위크에 말했다. “나폴레옹과 혁명의 관계는 극히 양면적이다. 그는 혁명을 안정된 궤도에 올려놓았을까, 아니면 정지시켰을까? 양쪽 다인 듯하다. 그는 민주주의를 거부했고 정치의 대의적 차원을 질식시켰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기 한달 전 제국 설립의 승인을 구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357만2329명이 찬성했고 2567명이 반대했다. 압도적인 찬성이 북한의 선거를 연상케 하는 이 투표는 비밀투표가 아니었다. 모든 ‘찬성’과 ‘반대’ 표가 투표자의 이름, 주소와 함께 기록됐다. 투표자 절대다수가 어떤 쪽을 찍어야 자신에게 유리한지 알고 있었다.
1804년 12월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의 호화로운 대관식엔 850만 프랑(요즘 화폐 가치로 약 87억 원)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형제 자매와 의붓자식들을 왕과 여왕, 공주와 왕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3500명에 이르는 나폴레옹 왕가가 탄생했다. 아무리 봐도 “혁명아(a child of the revolution)”로 자처하던 사람의 행적이라고 믿기 어렵다.
하지만 나폴레옹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동시에 최대 규모의 나폴레옹 협회인 ‘나폴레옹의 기억(Napoléonic Memory)’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인 다비드 샹터란은 나폴레옹의 업적을 열거했다. 민법 제정, 국무회의 창설, 프랑스 중앙은행 설립, 국가감사원 설립, 중앙집권화되고 일관된 행정체제 수립, 고등학교와 대학교 설립, ‘에콜 노르말’로 알려진 사범학교 설립, 상공회의소 창설, 미터법 실시, 종교의 자유 인정 등등.
“이런 업적들은 혁명의 혼란 속에서는 성취하지 못한 야망이었다”고 샹터란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는 프랑스의 구세주였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 기관은 오늘날까지 제 기능을 하며 프랑스 사회를 떠받친다.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 등 나폴레옹이 정복한 나라들이 실제로 이 중 다수를 모방했으며 그것들은 현대 국가의 근간이 됐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나폴레옹 학자 장 튈라르도 나폴레옹이 현대 프랑스의 건축가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는 파티시에(제과·제빵사)이기도 했다고 말하고 싶다. 밀푀유(프랑스어로 ‘천 개의 잎사귀’라는 뜻의 파이 이름)처럼 복잡하면서도 조화로운 행정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온다.” (신기하게도 북미에서는 밀푀유를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
만약 나폴레옹이 왕정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1799년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프랑스는 군주제와 봉건제도로 회귀했을 것이라고 튈라르는 말한다. “고대 로마의 킨키나투스처럼 나폴레옹은 대중 구원을 위한 독재를 원했다. 킨키나투스는 독재집정관(국가 위기 사태의 해결을 위해 원로원에서 임명했다)으로 일하는 동안 전권을 쥐고 있었지만 위기 상황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농부로 돌아갔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구질서가 회복되지 않았다. 1814년 루이 18세가 황제에 즉위한 후 그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는 로마 황제처럼 옷을 입은 나폴레옹이 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한 석고상 등 제1제국의 미술작품이 다수 소장돼 있다.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스테판 게강은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에 매료되는 현상을 “국가적 질병(a national illness)”이라고 표현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매력에 이끌렸다. 요즘도 나폴레옹에 적대적인 사람들조차 그의 매력을 무시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인물의 이중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혁명에서 출발했고 그것을 확장시켰으며 완수했다. 그리고 1804년 이후에는 폭군이요 독재자가 됐다.” 게강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프랑스에는 독재가 아니라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일종의 향수가 있다고 게강은 말한다. “우리 세대는 상상력 부족과 정치적 이상향의 부재로 고통받는다”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나폴레옹에 매료되는 건 프랑스인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의 수백 개 단체가 나폴레옹을 존경하고 그에 관해 연구하고 논의한다. 무대 위에서 의상을 갖춰 입고 그가 이끌었던 전투를 재현하고 화려한 무도회와 행사를 연다. 북미에서 활동하는 나폴레옹 학자로 국제 나폴레옹 협회의 회장인 J 데이비드 마크햄은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에 매료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전 세계가 그에게 매료됐다.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그에 관한 책이 더 많이 쓰여졌다.” 마크햄이 뉴스위크에 말했다.
나폴레옹과 관련된 수집품은 유럽과 북미의 경매장에서 가격이 계속 오르고 있어 매물이 부족한 상황이다. 최근 호주 멜보른의 한 박물관에서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과 반지 등 유물이 도난 당했다. 프랑스의 한 경매에서는 나폴레옹이 임종 당시 입었던 때묻은 잠옷용 셔츠가 매물로 나왔다가 철수됐다. 원래 소장자의 후손들이 그 유품이 외국인에게 팔려 프랑스를 떠나게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 유품의 매각을 방지하는 법원의 금지명령을 얻어냈다.
사람들이 나폴레옹에 매료되는 현상이 향후 200년 동안에도 지속될까?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열정이 사그라지는 듯하다. 요즘 프랑스 학교에서는 나폴레옹과 그의 업적이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과거에 역사는 위대한 남성과 여성에 관한 공부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추세와 이슈, 운동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제 더는 프랑스의 1800년대를 루이 16세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시대로 보지 않는다”고 샹터란이 말했다. “그 시기는 이제 산업혁명의 시대로 받아들여진다.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역사가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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