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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 이젠 젭 부시의 차례?

SPECIAL REPORT | 이젠 젭 부시의 차례?

조지 W 부시 대통령 부부(가운데 왼쪽)는 2005년 1월 6일 백악관에서 부모님인 조지 HW 부시와 바버라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운데 오른쪽)의 결혼 60주년 기념 만찬을 주최했다. 조지 HW 부시 오른쪽이 젭 부시.



보수파는 짜증이 났다. 아니 화가 치밀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우상이 하는 연설을 들으러 왔다. 조연급이며 예일대를 나온 ‘귀족’ 부시는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부시의 연설을 참고 듣기도 짜증나는 판인데 그는 한술 더 떴다. 보수파의 영웅인 그날의 주인공을 준엄하게 질타한 것이다. 참을 수 없었던 보수파 관중은 부시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처럼 사나운 원숭이 떼는 처음 봤다”고 부시가 나중에 돌이켰다. 하지만 그 순간이 부시가(家)의 사람들에겐 결코 이례적인 게 아니다. 그들은 늘 보수파에 다가가려 하지만 골수 보수파는 동부 명문가 출신인 부시 사람들을 곱게 봐주지 않는다. 보수파와 터놓고 어울리기보다 스컬 앤 본스(Skull and Bones, 예일대 부유층 비밀 학생 클럽)를 더 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부시가의 사람들은 늘 좌절한다.

조지 H W 부시가 배리 골드워터와 손잡고 상원의원에 출마한 1964년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 조지 H W 부시가 로널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였던 1980년대의 일도 아니다. 조지 W 부시가 2000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도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였을까? 바로 1952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보수파의 야유는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의 메모리얼 홀 장내를 메아리쳤다.

그곳에서 야유를 받은 인물은 프레스콧 부시 상원의원이었다.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의 부친이자 ‘더비야(Dubya,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애칭으로 중간 이름 ‘워커’의 머리문자 W를 남부 식으로 발음한 것)’와 그의 동생 젭 부시의 조부다. 프레스콧은 코네티컷주의 공화당 의원이었다. 격식을 따지는 귀족으로 만찬에 정장을 차려 입고 예일대의 아카펠라 합창단과 함께 자랑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언제나 자신을 ‘상원의원’으로 불러달라고 고집한 인물이었다.

그날 밤의 절정을 장식한 주인공 연사는 극우파의 영웅 조 매카시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반공주의 마녀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쳤다. 프레스콧은 매카시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매카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반역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잠복처라며 맹비난했다. 반면 프레스콧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친했다.

조지 H W 부시의 부모인 프레스콧 부시와 도로시 워커.


강경 보수파 길들이기당시 코네티컷주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프레스콧은 아르데코풍의 메모리얼 홀 무대에 매카시와 함께 오른다는 사실조차 당혹스러웠다. 결국 프레스콧은 같은 공화당 소속이면서도 매카시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프레스콧은 세심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부시 가문의 상징적인 면을 잃지 않았다. 1957년 매카시가 심한 폭음으로 인해 사망하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프레스콧은 그를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베데스다 해군병원으로 그를 찾아간 마지막 문병객 중 한 명이었다. 귀족적 의연함을 보여준 처신이었다.

요즘 극우파로 뜨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보다 이념적으로 약간이라도 왼편에 위치한 공화당 의원이라면 누구든 강경 보수파 의원을 다루기가 쉽지 않다. 텍사스주 출신인 크루즈는 기이하게도 매카시와 외모도 닮았다. 올 봄 태드 코크런 상원의원(미시시피주) 같은 덕망 있고 품위 있는 공화당 의원들은 중간 선거를 위한 경선에서 보수파 유권자단체 티파티의 지원을 받은 도전자들을 밀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하원의장이 되는 것은 날뛰는 고양이들을 몰아가는 것과 같다고 한 전직 하원의장이 말한 적이 있지만 예를 들어 존 베이너 하원 공화당 대표(현 하원의장)에겐 2010년 티파티를 등에 업은 의원들을 달래기가 사나운 호랑이 길들이기와 같았다.

공직에 종사한 부시가의 사람들은 대대로 극우파를 상대로 언제나 똑 같은 딜레마에 부닥쳤다. 부시 가문이 ‘은밀한’ 온건파이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온건파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야망 때문에 부시 가문이 아닌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게 그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부시가의 가족사는 그들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먼저 공화당의 경선에서 승리해 대선 후보로 지명 받고 그 다음 본선에서 승리할 정도로 폭넓은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일은 근본적인 보수파의 사고방식 없이 단지 그런 시늉만 하는 후보에겐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부시 가문은 어떨까?

가족의 단합된 모습 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혈통 잇기 경쟁, 예일대 출신의 삶 아래 감춰진 금전적 야망, 겉으로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경쟁심이 지독한 스포츠맨십 등.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 영국 귀족 집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시대 드라마)의 부시 가문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야망이 그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경기장으로 내몬다. 정적들은 공격할 무엇인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부시가의 누군가가 공직에 출마할 때마다 거의 그들은 소속당 극우파의 측면 공격까지 받는다. 따라서 지금 젭 부시가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를 고심하는 상황에서 이런 의문이 계속 제기된다. 그가 좀 더 보수적인 상대에게 패배할까 아니면 그들을 길들이는 방법을 찾아낼까? 젭을 포함한 부시 일가의 가족사는 보수파 길들이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특히 올해는 더 그렇다. 30년에 걸쳐 세 번째 부시가의 사람을 내세워 백악관을 공략하는 모습이 보수파에게 결코 곱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를 제어하라프레스콧은 1962년 상원의원 재출마를 포기했다. 자신의 고매한 공화당주의가 코네티컷 유권자들에게는 너무 보수적으로 비치고 소속당에선 너무 진보적으로 간주됐기 때문에 더는 지탱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57세에 시작한 그의 정치 경력이 68세로 끝났다.

1960년대 후반에 가서 프레스콧의 아들 조지 HW 부시도 그와 똑같은 ‘악마’와 씨름했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석유사업을 했던 그는 언제나 보수파의 문화적 반감에 부닥쳤다. 그가 진정한 텍사스맨이 아니라는 사실(코네티컷주 출신이다) 때문에 텍사스 주민들이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는 1964년 상원의원에 출마해 고배를 마신 뒤 1966년 공화당의 상승세를 타고 하원의원에 선출됐지만 70년 다시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또 실패했다.

HW의 아들 조지 W 부시도 1978년 텍사스 서부를 지역구로 하원의원에 출마했지만 민주당 후보에게 보기 좋게 패했다. 당시 그는 귀족 출신 예일맨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상대 후보는 심지어 그의 아침 조깅 습관까지 비웃었다. 당시 텍사스주 시골에서는 아침 조깅이 기이하다고 할 순 없지만 아주 희한한 습관으로 간주됐다.

조지 W 부시의 동생 젭 부시는 1994년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민주당 소속 주지사였던 로턴 차일스에게 패했다. 한 토론회에서 토속 문화에 밝은 진보파 차일스는 플로리다주의 설화에 등장하는 교활한 여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 출신이 아닌 젭은 차일스가 무슨 뜻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방청객과 시청자 대다수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가 지은 멍한 표정 때문에 그는 신뢰도에 큰 상처를 입었다.

부시 집안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젭이 올해 이민법 개혁과 공통학력표준(Common Core)을 지지함으로써 극우파의 조롱을 받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민법과 교육 문제는 어느 주에서든 실용주의를 추구하는 보수파를 괴롭히는 문제다. 그러나 극우파에겐 부시가의 사람이 그런 혐오스러운 정책을 지지한다는 것 자체가 믿지 못할 가문이라는 예단을 확인해주는 셈이다.

젭[사실은 원래 이름이 아니라 존 엘리스 부시(John Ellis Bush)의 약칭(Jeb)이다]이 2016년 대선 출마 여부를 고민하면서 부닥치는 상황이 실제로 그렇다. 과연 젭이 가족사와 거리를 두는 동시에 그 역사를 제어해 역이용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2016년까지 그가 처할 상황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공화당의 보수파는 가장 최근의 두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과 미트 롬니 둘 다가 너무 물렁했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들이 조지 HW 부시를 지지한 사실도 후회한다. 그들은 HW를 “믿어 달라(Read my lips). 세금 신설은 없다(No new taxes)”고 약속했다가 뒷걸음질 친 인물로 경멸한다.

조지 W 부시의 경우 그들은 동료 보수파가 아니라 정부 지출만 잔뜩 불려 놓은 인물로 간주한다. 고령자의 처방약 할인 프로그램부터 낙오학생방지(No Child Left Behind) 프로그램까지 모든 면에서 정부 지출을 늘렸다는 지적이다. 또 보수파는 조지 W 부시가 2000년 대선 운동 당시 개인의 정치 헌금을 제한하는 ‘매케인-페인골드 선거자금 개혁법’에 반대했지만 취임 후 그 법에 서명한 인물로 기억한다.
텍사스주 댈러스의 조지 W 부시 대통령 기념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하는 젭 부시 부부(2013년 4월 25일).





강한 경쟁심보수파에서도 현재 여러 ‘잠룡’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버락 오바마가 초선 상원의원으로 대통령에 선출된 사실에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랜드 폴과 테드 크루즈 같은 공화당 초선 상원의원들은 젭 부시에 반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다. 그럴 경우 ‘부시가의 사람은 이제 그만!(we’ve had quite enough Bushes, thank you)’이라는 주장에 많은 보수파가 공감할지 모른다.

최근 들어 공화당내 보수파인 티파티가 흔들리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중간선거를 위한 경선에서 그들이 공화당의 주류파 현직의원들을 몰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수파의 열정이 줄어들었다거나 티피티가 젭 부시 같은 ‘주류 보수파(governing conservative)’를 지지할 의향이 있다는 신호라고 봐선 안 된다. 젭이 승리하려면 후보 지명을 받기 위해 길고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한다. 물론 그에겐 자금과 기득권 세력의 지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가족사가 주는 부담과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부시 가문은 경쟁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집안이다. 조지 H W 부시는 테니스 코트에서 그런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조지 W 부시도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에서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 조깅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너무도 열심히 밟아 젊은 백악관 직원 대다수가 나가떨어질 정도였다. 젭은 어머니 바버라처럼 좀 더 둥글둥글하게 생겼지만 야구에 일가견이 있으며, 키 191㎝로 프레스콧(193㎝) 이후 부시가의 정치인 중 가장 거구다.

부시가의 사람들은 패배하기도 하지만 이기는 경우가 더 많다. 패배한 뒤 반격하는 데도 뛰어나다. 뉴스위크가 인터뷰한 모든 사람은 젭 자신이 진정으로 2016년 대선 출마 여부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지만 대다수는 타이밍이 좋기 때문에 그가 출마하리라고 생각한다. 집안의 강한 경쟁심을 감안하면 승산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젭으로서도 대선 출마가 결코 터무니없지 않다. 현재 61세이며 직계가족이 별 문제가 없다. 물론 딸 노엘은 약물남용 문제가 약간 있었고 아내 컬럼바는 파리에서 구입한 의류 약 1만9000달러어치를 세관에 축소 신고해 상당한 벌금을 물었다. 컬럼바의 위법 행위는 15년 전의 일이며 가족들은 21세 때부터 함께 살아온 그들 부부에게 그때가 유일하게 불행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젭의 한 친지는 “그가 출마하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그 친지는 부시 집안에서 그런 발언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익명을 요구했다). 젭은 올해 후반에 출마 여부를 결정하겠으며, 자신의 주요 고려사항 중 하나는 네거티브 공격 없이 “즐겁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지 여부라고 말했다. 훌륭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의사를 표명한 거의 모든 후보가 실천에 옮기지 못한 고매한 목표다.

젭이 출마하면 위협적인 보수파 외에도 숱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젭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멕시코계 미국인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라틴계 유권자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과시할 수 있긴 하지만 백인 비율이 상당히 줄어드는 등 미국의 인구 구성 변화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젭은 극우파와 클린턴 다이너스티(빌 클린턴에 이어 힐러리 클린턴도 백악관을 노린다)만이 아니라 행운의 여신이 부리는 변덕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면 젭은 2년 반 뒤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전직 대통령인 아버지와 형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이다.

또 젭의 아들 조지 P 부시도 있다. 그는 올해 텍사스주에서 고위 공직에 선출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그의 중간 이름 P는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인 ‘프레스콧’의 머리글자다. 마치 조립라인처럼 정치인들을 배출하면서 ‘조지’와 ‘프레스콧’ 같은 이름을 끊임없이 재활용하는 ‘패밀리’(그들은 ‘다이너스티’라는 말을 싫어한다)에 걸맞은 이름이다.



케네디가보다 더 큰 집안부시 가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걸출한 ‘퍼스트 패밀리(first family)’로서 애덤스 가문과 케네디 가문을 능가했다. 미국인들이 헌법에서 귀족을 추방했으면서도 여전히 정치 가문을 흠모한다는 것은 미국 문화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지역마다 정치 명문이 있었다. 루이지애나주의 롱 가문, 오하이오주의 태프트 가문, 시카고의 데일리 가문 등. 부시 가문은 야망의 폭과 동부와 남부를 옮겨 다니는 속성 때문에 그들 가문보다 더 두드러져 보인다.

프레스콧 부시는 미국 중서부 출신으로 아내 도로시 워커와 함께 코네티컷주에 뿌리를 내린 다음 월스트리트에서 애버럴 해리먼과 함께 금융업을 했다(해리먼은 나중에 민주당 소속으로 뉴욕 주지사가 됐다). 프레스콧은 코네티컷주를 기반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부시가는 텍사스주 출신 대통령 두 명을 배출했다.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다. 젭은 플로리다에서 주지사를 연임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케네디가의 승리는 미국 동북부에 국한됐다. 물론 그 가문의 사위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예외다. 할리우드 스타 출신의 슈워제네거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지만 저속한 섹스 스캔들로 공직 생활에 오점을 남겼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F 케네디 형제의 암살과 에드워드(테드) 케네디의 비애 등 매사추세츠주의 정치 가문인 케네디가의 비극은 TV에 자주 등장하면서 부시 가문이 필적할 수 없는 정도로 미국의 집단의식 속에 각인됐다. 미국인의 마음에는 부시 가문의 별장 케네벙크포트보다는 케네디 가문의 종가 하이애니스 포트가 더 와 닿는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미국인이라면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군 중위 존 F 케네디의 활약상과 그가 탔던 초계어뢰정 PT-109를 잘 안다.

(1943년 8월 남태평양 솔로몬군도 인근에서 존 F 케네디 해군 중위가 이끌던 초계어뢰정 PT-109이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항복 대신 탈출을 선택한 26세의 케네디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구명조끼 끈을 입에 물고 화상 입은 부대원을 끌면서 5㎞ 가까이를 헤엄쳤다. 천신만고 끝에 인근 섬에 도착한 케네디와 부대원들은 엿새 만에 뉴질랜드 군함에 구조됐다. 이 일로 수많은 훈장을 받은 그는 ‘어떻게 전쟁영웅이 됐느냐’는 물음에 “쉬웠다. 그들이 내 어뢰정을 반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농담했다.)

하지만 조지 H W 부시의 격추된 비행기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그는 VT-51 전투기의 최연소 조종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격추당해 미군 잠수함에 의해 구조됐다.)

부시 가문의 강점은 활동 반경이 넓고 변화무쌍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수많은 미국인처럼 일생을 통해 기독교 교파 소속을 바꿨다. 프레스콧과 조지 H W 부시는 성공회 신자였지만 조지 W 부시는 아내가 믿는 좀 더 힘 있는 교파인 감리교를 택했다. 젭은 아내가 믿는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젭은 지난해 신앙과 자유 연합 모임에 참석해 “나는 가톨릭의 성체를 사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시 가문의 민족성도 달라져간다. 젭의 아내가 멕시코계이기 때문에 아들 조지 P 부시는 자신을 히스패닉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젭의 2016 대권 야망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모른다.
조지 H W 부시(왼쪽)가 두 아들 조지 W(왼쪽 둘째), 젭(오른쪽 둘째)과 함께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에서 낚시를 하기 위해 보트를 몰고 있다.





형과 다른 아우젭은 지난 5월 초 다른 후보 예상자들과 지지도 경합을 벌이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 졸업식 축사를 했다. 그는 졸업생들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촉구하며 연방정부가 “국민의 종교 자유를 침해한다”고 비난했다.

물론 부시가의 모든 정치인과 모든 공화당 후보들이 그런 연설을 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젭의 경우 종교 문제를 논하기가 특히 쉽다. 아버지 조지 H W 부시는 뉴잉글랜드 성공회 신자의 엄격한 과묵함을 아직도 갖고 있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자신이 몰던 전투기가 격추된 후 태평양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관해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젭은 형인 조지 W 부시보다 더 멀리 옮겨 다닌 동시에 고향에 더 가까웠다. 그는 형과 아버지처럼 앤도버 사립학교에 다녔고 그 학교에 다니면서 멕시코 수학여행을 갔다가 아내를 만났다. 거기서 그는 예일대와 스컬 앤 본스(형,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교이며 그 학교의 비밀 학생클럽이다)를 마다하고 텍사스대로 진학했다. 젭은 부시가의 개척자인 셈이다. 그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커머스 뱅크 지점장으로 일하다가 결국 플로리다주에 정착했다. 선출된다면 그는 남미에서 산 적이 있는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될 것이다.

마이애미에서 젭은 부동산을 비롯해 여러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했다. 형과 아버지의 사업 경력과 비슷하다. 가문의 연줄이 사업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정치에 뛰어들기 전에 먼저 재산을 모아야 한다는 부시 가문의 가풍에 따라 그는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다.

1994년 젭은 41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 해는 공화당 후보에게 아주 좋은 시기였다. 뉴트 깅그리치가 공화당 혁명을 이끌었고(그는 곧 하원의장이 됐다) 조지 W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선출됐다. 그러나 젭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4년을 기다린 젭은 다음 선거에서 마침내 당선돼 플로리다주에서 두 차례의 임기를 완전히 마친 첫 공화당 주지사가 됐다.

텍사스주에선 주지사 자리가 허약하기로 유명하다. 권력이 다른 여러 고위 공직에 분산돼 있기 때문이다. 젭의 아들 조지 P 부시가 출마한 텍사스 토지집행관(land commissioner)도 그중 하나다. 그러나 플로리다주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젭은 감세와 예산 삭감, 학교 선택의 폭 확장 등을 힘으로 밀어 붙여 시행할 수 있었다.

성격으로 볼 때 젭은 형인 조지 W 부시보다 더 보수적이다. 형의 대통령 임기 말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그는 정부의 구제금융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구제금융을 지지했을 리 없다”고 한 친구가 말했다. 그가 형과 달리 대규모 지출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외에도 많다.

2012년 11월 4일 플로리다주 샌퍼드에서 유세를 벌이는 미트 롬니(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젭 부시, 코니 맥(연방상원 후보).


정부를 혐오하지 않는 보수파1999년 조지 W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 젭이 플로리다 주지사였을 때 그 두 사람은 백악관에서 열린 전국 주지사협회 행사에 참석했다. 그날 밤의 파티 주최자 중 한 명은 이렇게 돌이켰다. “젭은 아주 정중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한 행정부의 지지에 감사를 표하면서 아주 위엄 있게 행동했다. 반면 그의 형 조지 W 부시는 화장실이 급한 여덟 살짜리와 같았다.”

젭은 주지사 임기를 끝낸 뒤 교육개혁에 몰두했다. 공공자금의 사립학교 투입을 허용하는 차터 스쿨과 학교 선택의 폭 확장 같은 보수주의 의제를 지지했다. 그가 세운 재단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등 부시 행정부에서 일한 인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조엘 클라인도 거기에 포함됐다. 클라인은 뉴욕시 교육감을 지냈고 루퍼트 머독의 교육사업을 맡고 있으며 민주당 소속이다.

그런 젭의 성향은 유권자들이 적어도 추상적으로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측면이다. 초당적이며, 개혁가이고, 일상생활과 밀접한 의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부시가의 한 오랜 측근은 “젭은 아버지나 형보다 정책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이 크다”고 말했다.

머리 아프고 따분하지만 미국 동북부 같은 곳에서 공화당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다. 동북부의 경우 1988년 조지 H W 부시가 뉴저지, 코네티컷, 매릴랜드주를 석권한 이후로 공화당의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2012년 오바마에 맞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미트 롬니는 워싱턴 DC의 동북부에서는 한 주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수파가 젭의 지금까지 실적을 볼 때 그에게서 합법적인 낙태 반대, 세금인상 반대, 지출삭감 지지라는 측면을 쉽게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는 점이 젭이 가진 문제다. 그런 실적은 전국 무대로 진출할 야망을 가진 공화당 후보에겐 필수적이다.

오히려 젭이 열정을 가진 이슈, 예를 들어 교육과 이민법 개혁 같은 문제는 공화당 지지기반이 선호하는 의제와 대부분 상충된다. 최근 뉴햄프셔주에서 열린 보수파 포럼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불법 이민자들이 ‘사랑’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온다는 젭의 언급을 조롱하자 청중이 환호성을 올렸다. 젭의 그 말은 이제 경쟁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된다.

그런 이슈 외에도 젭이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부시 가문이 ‘작은 정부’를 원하지만 그럼에도 정부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프레스콧부터 젭까지 부시 가문의 이념을 아우르는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공직이 명예스러우며 적절히 제어된 정부는 가둬야 할 악마가 아니라 선량한 힘이라는 믿음이다.

프레스콧이 공화당 상원의원으로서 존 F 케네디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을 열렬히 지지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또 조지 H W 부시가 1964년 ‘공산 중국’이 유엔에 가입한다면 미국은 유엔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유엔 주재 대사만이 아니라 중국 특사와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까지 지낸 것도 거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또 조지 W 부시가 메디케어(고령자 의료보장) 지출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국토안보부까지 창설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부시 가문이 정부 무용론을 내세우기는 쉽지 않다. 그들은 정부를 혐오하지 않는 보수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에겐 거의 성스러운 임무다.
2011년 9월 11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9-11 테러 10주년을 맞아 붕괴된 세계무역센터의 터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하고 있다.





부시 가문과 워커 가문하지만 늘 그렇진 않았다. 존 F 케네디의 외할아버지는 보스턴 시장이었다. 케네디 가문은 대다수 아일랜드계처럼 민주당의 틀 안에서 부상했다. 그들에게 정치는 곧 본능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부시와 워커 혈통은 정치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사업을 더 중시했고 19세기 말의 도금시대(Gilded Age)에 상승 가도를 달렸다. 그 이야기는 사실 미국인들에게 익숙하다.

워커 가문은 개츠비처럼 대단한 부를 쌓았다. 그 집안의 딸 도로시는 역시 부유하지만 좀 더 검소한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었던 프레스콧과 결혼했다. 프레스콧은 좀 더 수수한 중서부 부자의 자손이었다. 메인주에 있는 부시 가문의 유명한 별장 케네벙크포트는 도로시 쪽에 아주 소중한 곳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테니스의 데이비스컵에 필적하는 골프 대회로 워커컵을 만들었다.

조지 HW 부시의 성장은 아버지 프레스콧보다 좀 더 안락했다. 대공황 중에도 그리니치 컨트리 데이 스쿨에 전용 운전기사가 딸린 차로 등하교했다. 앤도버 사립고에서는 스포츠와 공부로 이름을 날렸다. 또 H W는 진정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그가 예일대를 졸업한 후 텍사스주 미드랜드로 옮겨간 것도 나름대로 선구적인 행보였다. 물론 가족의 재산이 도움이 됐고 유전과 뒤뜰 바비큐 파티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명문대 동료들도 많았다. 그 전까지 아버지 프레스콧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그리니치의 시의회 정도였다. 정치가 부시가의 본업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였다.

텍사스주에서의 정치적 야망은 조지 H W 부시 가족이 1959년 휴스턴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텍사스주의 석유 수도인 휴스턴에서 부시는 가문의 야망을 드러냈다. 그 야망이 아들 조지 W 부시의 백악관 입성으로 이어졌고 이제 젭도 그 가도를 달릴지 모른다.

조지 HW 부시는 1964년 상원의원에 출마해 고배를 마셨다. 사실 첫 도전자로선 쉽지 않은 정치 입문이었다. 그는 자유주의 보수파 골드워터의 측근으로 출마했으며 민권법(Civil Rights Act)에 반대했다. 1966년 하원의원에 선출됐을 때도 그는 여전히 텍사스주 보수파였다. 그러나 1968년 하원의원 재선에 성공한 뒤 그는 피부색이나 출신국가, 장애 여부 등으로 주택관련 차별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는 공정주거법(Fair Housing Act)에 찬성했다. 그는 1970년 상원의원에 재도전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그래도 그는 정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섀피로 애그뉴가 사임했을 때 HW는 리처드 닉슨의 부통령이 되려고 노력했고, 닉슨이 불명예 속에서 퇴진하고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을 때도 부통령이 되려고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실제로 그 수년 전 아이젠하워는 부통령이던 닉슨을 내쫓고 프레스콧 부시를 대신 앉힐 것을 고려했다. 그때처럼 포드가 넬슨 록펠러를 쫓아낼 때도 그는 부통령 후보감으로 고려됐다. 그러나 결국 포드의 러닝메이트는 밥 돌이 됐다(그는 12년 뒤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을 두고 H W와 맞붙어 패했다).

모든 정치인은 무자비하다. 우리는 흔히 정치적인 투지라면 권력을 향한 열정을 겉으로 내보이는 빌 클린턴 같은 인물을 떠올리지만 H W도 만만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차분하고 초연한 듯 보이기를 원하지만 속으론 아주 단호했다. 그는 1980년 대선 후보를 뽑는 공화당 경선에 출마했다. 당시 그는 레이건의 감세 정책을 ‘미신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곧바로 생각을 바꿔 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부통령으로서 부시는 당시 레이건을 조롱하던 정치인 사교모임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공화당 인사였다. 하지만 부시는 레이건을 적극 두둔하며 그의 뒤를 이었다. 퀘일과 고어 부통령의 정치적 불운에 비하면 H W는 승승장구한 셈이다.



대물림되는 정치 기술그의 아들들인 조지 W 부시나 젭의 경우는 가문의 투지가 그리 확실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W는 30대까지 게으름뱅이였고 젭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긴 했지만 플로리다주에 국한됐을 뿐 전국을 무대로 공직에 출마한 적이 없다.

그러나 W의 경우 연임한 텍사스 주지사와 연임한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수행했을 때 강철 같은 의지가 엿보였다. 부시 가문의 혈통을 감안하면 스포츠와 승리에 치중하면서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공식석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부시 가문에선 언제나 환영이다. 작가 크리스토퍼 버클리는 자신의 새 수필집에서 H W에 관해 이렇게 썼다. “무덤덤한 뉴잉글랜드 귀족치고는 시칠리아의 할머니 같은 눈물샘을 갖고 있었다.” HW 자신도 “고함치는 가족 중에 나만 울보”라고 스스로 자랑했다. 젭과 W는 그처럼 잘 울지는 않는다.

W와 젭 외에도 형제가 두 명이 더 있다. 마빈과 닐이다. 마빈은 벤처 자본가이고 닐은 1980~90년대 저축대부조합 스캔들에 연루됐고 나중에는 진흙탕 싸움으로 번진 이혼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 이혼 과정에서 그는 아시아 출장을 갔을 때 여러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시인했다. 초면인 그 여자들이 호텔 방문을 두드렸다고 닐은 처량하게 증언했다. 또 닐은 디자이너 랠프 로렌의 아들과 결혼한 모델 로렌 부시 로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들의 여동생 도로시는 민주당 인사와 결혼해 아버지 H W에 관한 책을 썼다.

W와 젭은 아버지의 정치 기술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로써 충분할까? 요즘 인기 있는 내기 중 하나는 젭이 ‘스미스’라는 성을 가졌다면 더 유리할지 여부다. 미국이 ‘부시’와 ‘클린턴’이라는 이름에 신물이 난 걸까? 어머니 바버라 부시도 몇 달 전 사람들이 “또 부시냐?”라고 말할지 모른다고 농담했다. 젭이 출마에 관심이 없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W도 최근 동생이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젭이 출마 의사를 굳힌다면 집안의 모든 식구가 나설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출마하고 당선된다면 젭은 어떤 대통령이 될까? 조지 H W 부시의 경우 역사는 관대했다. 그는 이라크전에서 다국적군을 규합했고, 바그다드 점령을 감행하지 않은 현명한 판단력을 가졌으며, 소련의 붕괴를 연착륙시키는 데 기여했고, 기후변화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그러나 조지 W 부시에게 역사는 그리 관대하지 않다.

미국은 아직도 그가 일으킨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의 여파로 휘청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도 아프리카의 에이즈 퇴치를 위해 노력했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으로 벤 버냉키를 임명한 일 등으로 앞으로는 좀 더 나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젭이 대통령이 된다면 성격상 아버지처럼 신중하겠지만 아버지와 형보다는 우익일 것이라고 측근들은 생각한다.



WASP 코를레오네 가문수년 전 뉴스위크 기사에서 하워드 파인먼 기자는 영화 ‘대부’에 빗대 부시 가문을 ‘WASP(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코를레오네 가문’이라고 불렀다. 거의 ‘대부’ 같은 무자비함을 귀족적 측면으로 가리고 있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가 썼듯이 그 비유를 적용하자면 조지 H W 부시가 가장인 비토 코를레오네이고 W는 성미 급한 큰 아들 소니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젭은 마이클이다. 조용하면서도 자제력 있는 아들로 가족 사업을 터득하고 키워나가는 인물 말이다.

딱 맞는 일화가 하나 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테니스 코트에서 이런 말을 즐겨 했다. “치앵을 풀어놔줘(Unleash Chiang)!” 아이젠하워가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영어로 Chiang Kai-shek이라고 한다]를 대만에서 나오지 못하게 묶어두고 있다는 음모론적 반공주의자들의 믿음을 비꼬는 말이다. 그 음모론자들은 장제스가 속박에서 풀려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중국 본토를 되찾기를 원했다.

HW는 테니스 게임에서 자신의 강하지 못한 서브를 스스로 질타하며 ‘파이팅!’이라는 뜻으로 “치앵을 풀어놔줘”라고 외쳤다. 대만 주변을 초계하는 미 해군이 중국의 해방을 가로막는다는 허황된 믿음을 가진 음모론자들을 조롱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젭 부시도 그 비슷한 말을 잘 쓴다. “챙을 풀어놔(Unleash Chang)!” 아버지가 말하던 ‘Chiang’에서 ‘i’를 하나 뺀 것이다. 장제스나 대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수적인 접근법을 취하겠다는 뜻으로 그가 그냥 지어낸 말이다. 부시가의 남자들은 늘 그렇다. 좀 더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부시 가문은 역사의 흐름을 따른다. 이제 젭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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