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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STMENT - 실리콘밸리 ‘큰 손’들의 세계

INVESTMENT - 실리콘밸리 ‘큰 손’들의 세계



게이건 비야니는 대단한 야심을 갖고 있는 청년 CEO다. 그가 창업한 스프리그는 아마 대부분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신생 업체다. 3월의 어느 화창한 날 캘리포니아 멘로파크에 있는 샌드 힐 로드 2550번지 건물 대회의실에 바야니가 들어섰다. 실리콘밸리의 이 특색 없는 사무실 안에서 비야니와 그가 세운 소기업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려는 참이다. 그레일락 파트너스에 자신의 사업계획을 홍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2013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카트만두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600만 명이 에어비앤비 서비스를 이용해 값싸게 숙박을 해결했다. (왼쪽부터) 공동 창업자인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브라이언 체스키, 조 게비아.
화이트보드, 테이블, 의자 몇 개…. 방은 평범하다. 하지만 풋내기 CEO의 눈에 잡힌 광경은 사뭇 달랐다. “안으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레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데이비드가 여기 있었고 애닐이 저기 있었다.” 비야니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내 일생일대의 순간이었다.” 그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막강한 벤처 자본가 몇 명이 이 곳에 모였다.

데이비드 지, 애닐 부스리, 레이드 호프먼, 그리고 그레일락의 다른 모든 파트너였다. 페이스북·링크드인·인스타그램·판도라·드롭박스·에어비앤비를 후원했던 사람들이다. 그 벤처들이 스프리그보다 그다지 크지 않던 때였다. 신생 벤처기업의 고군분투하는 창업자로선 여기서 자신의 사업구상을 소개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신인 투수가 양키 스타디움의 마운드에 올라 전설적인 타자 베이브 루스를 상대하는 격이었다.

그레일락이 매년 심사하는 사업 계획은 수천 건에 달한다. 그중 파트너 전체 회의에 올려지는 사안은 20여 건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만 자금지원을 받는다. 비야니는 스프리그의 투자가치를 입증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날 비야니는 메이저 리그 무대에 섰을 뿐 아니라 그레일락이 투자대상을 어떻게 선정하는지 가까이서 지켜보는 기회를 누렸다.

비야니는 한 가지 놀라운 교훈을 얻었다. 파트너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질 경우 필시 일이 상당히 잘 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자세한 내용을 따져볼 만큼 구미가 당겼다는 의미다. 물론 당시에는 비야니도 이런 사실을 몰랐다. 따라서 부스리가 사업계획의 밑천을 파고들기 시작할 때 특히 잔뜩 위축됐다. 비야니가 가진 스프리그 사업 구상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야심만만하다.

그는 식품업계의 우버(택시 호출 앱)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휴대전화 앱을 누르기만 하면 언제든 어디든 음식을 배달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검증되지 않은 시장의 검증되지 않은 개념이다. 리스크가 아주 크다. 스프리그 시스템 구축에 수백만 달러가 들어가게 된다. 몇 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하기 쉽다. 물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부스리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워크데이(그레일락의 또 다른 성공 투자)의 공동창업자이자 CEO다. 그만큼 기술벤처 창업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그는 스프리그 사업방식의 실행 가능성, 그 시장에 관해 철저히 파고 들었다. 비야니도 답변을 내놓았다. 몇 달 동안 준비해온 답변이었다. 하지만 부스리는 질문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세계 최고 벤처 자본가 중 한 명과 질문 공방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데이비드 지가 뛰어들어 스프리그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때 그레일락을 페이스북 투자에 끌어들이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비야니로선 꿈만 같은 순간이었다. 그의 눈 앞에서 실리콘 밸리의 최고 실력자 2명이 자신의 신생 벤처를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뒤 그 젊은 CEO는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내 평생 한 방에서 그렇게 많은 지적인 에너지가 분출하는 광경은 본 적이 없다”고 그가 말했다. 그 직후 그에게 제의가 들어 왔다. 그레일락이 1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제의였다.

신생 벤처 입장에서 그레일락의 자금후원을 받는다는 건 단순한 현금 수혈 이상의 의미가 있다. “회사가 교황의 축복을 받는 격”이라고 넥스트도어 창업자 니라브 톨리아가 말했다. 넥스트도어는 2년 전 그레일락의 펀딩을 받은 소셜미디어 사이트다. 당시 펀딩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벤처자본가들로부터 투자 제의가 쇄도했다.

“투자회사들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넥스트도어가 어떤 회사인지는 모르지만 데이비드 지가 이사로 참여하는 건 안다. 그러니 수표를 끊어 주겠다.’” 부동산 벤처기업 레드핀의 CEO 글렌 켈만도 그레일락으로부터 펀딩을 받았다. 당시 한 파트너가 이사로 영입하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라고 켈만에게 권했다.

그가 일순위로 꼽은 카맥스 창업자 오스틴 라이건이 곧바로 영입됐다. “버락 오바마를 선택했어도 가능했을 듯한 느낌이었다”고 켈만이 돌이켰다. 폭스의 전 최고운영책임자 피터 처닌이 판도라의 이사로 합류한 이유도 그레일락의 후원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업을 고르고 키우는 데 능하다”고 그가 설명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페이스북·링크드인·인스타그램·판도라·텀블러가 많은 사람에게 모두 터무니 없는 듯한 아이디어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미친 짓 이라고 여기는 일에서 그레일락은 기회를 찾아냈다. 에어비앤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2009년 그레일락이 투자할 당시 완전히 황당무계한 아이디어인 듯했다. 온라인의 생면부지 이방인에게 누가 자기 집을 빌려주겠는가? 하지만 2013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카트만두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600만 명이 그 서비스를 이용해 값싸게 숙박을 해결했다. 아직 기업공개를 하지 않은 이 회사의 지난 1월 평가액이 100억 달러에 육박했다.

“아이디어가 대단히 크고 혁신적일 때는 비정상 아니면 천재적”이라고 호프먼이 말했다. “둘 중 어느 쪽인지를 식별해야 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페이스북·링크드인·인스타그램·판도라·텀블러가 많은 사람에게 모두 터무니 없는 듯한 아이디어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갈등을 장려한다“기업들의 결정방식에 관해 많은 오해가 있다.” 최근의 어느 날 오후 데이비드 지가 자신의 샌드힐 로드 사무실에서 말했다. 뚜렷한 특색이 없는 공간이다. 뉴리퍼블릭 은행 지점 위층 사무실과 칸막이 공간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한쪽 벽에 설치된 특이한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검은 색으로 칠해진 가느다란 나무 형태다. 나무 가지들이 바깥 쪽으로 뻗어나갔다. 가지 마다 끝에 작은 걸이가 달려 있다. 그 안에는 지가 소유한 온갖 휴대전화와 이동통신 기기가 담겨 있다. 벽돌 크기의 US 웨스트 모델로부터 애플 뉴턴, 아이폰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지난 20년 동안 기술이 우리 세상의 거의 모든 부분을 얼마나 빨리 바꿔 왔는지 가시적으로 일깨워준다. 그 시기 중 상당 기간 동안 지는 이 같은 혁명을 이끌어 나가는 기업들을 찾으면서 그 과정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이들 투표 시스템 중 다수는 합의 지향적이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다”고 지가 평한다. 그레일락의 시스템은 다르다. 몇 년 전 파트너들이 자신들의 기업설명회를 분석했다. 최상의 결과와 최악의 결과를 낳은 미팅을 검토했다. 사업안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됐다.

모두가 싫어한 안, 모두가 좋아한 안, 그리고 논란이 있었던 안이다. 그레일락에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준 쪽은 이 마지막 그룹이었다. 페이스북, 판도라, 에어비앤비 모두 논란이 뜨거웠던 사업안들이었다. 에어비앤비를 두고는 지와 호프먼이 충돌했다. 지는 그 아이디어가 절대 통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레일락으로선 다행히 호프먼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다. “우리는 남다르고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outliers and extremes)을 찾는다”고 지가 설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갈등을 조장하려 애쓴다.”

기술 벤처기업이 망하거나 흥할지 이들보다 더 많이 아는 그룹은 거의 없다. 그레일락의 투자 파트너 11명 각자가 주요 벤처기업을 창업했거나 일찍이 벤처기업에 뛰어들었다. 데이비드 지는 엑사이트의 초창기 직원 중 한 명이었다. 구글 이전 시대의 검색 엔진이다. 다른 파트너들도 e베이·야후·모질라·트위터·페이스북·링크드인 출신이다. “이 같은 사업운영을 담당했던 사람들, 그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몸담았던 사람들의 역량을 우리는 믿는다. 그들은 ‘아하, 이게 왜 크게 성공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안목을 지닌다”고 지가 설명했다.

2000년 지가 처음 그레일락에 입사했을 때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아이폰도,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없었으며 노트북은 시멘트 벽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회사도 달랐다. 동해안 지역에선 익히 알려진 회사였다. 테라다인, 뉴트로지나, 프라임 컴퓨터스에 투자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형 벤처 투자계약을 많이 성사시켰다. 하지만 서해안 지역에선 업계의 실세가 아니었다.

그레일락은 지를 영입해 변화를 꾀했다. 예일대와 스탠퍼드대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그는 얼마 전 엑사이트를 나와 벤처 캐피털 업계에서 명성을 쌓아가던 참이었다. 당시 실리콘 밸리에서 그레일락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실세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알짜 기업들을 남보다 앞서 면접하는 기회를 잡지 못한다. “그레일락을 찾아가 회사를 홍보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듯하다.”

2004년 링크드인 투자자를 물색하고 있던 호프먼이 돌이켰다. 페이팰에서 나온 호프먼은 투자자들을 점 찍어 둔 상태였지만 지와 대화를 나눈 뒤 마음을 돌렸다. 그 젊은 벤처자본가는 다른 투자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링크드인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회사의 시스템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누구를 고용해야 하고, 이용자를 어떻게 유치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이트의 디자인이 어때야 하는지까지 언급했다. 투자자라기보다 같은 기업 창업자와 대화하는 듯했다고 호프먼이 말했다. “함께 참호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에 끌리게 마련이다”고 그가 설명했다. 호프먼은 링크드인 상장 후 그레일락의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이어 페이스북 투자안이 들어왔다. 2005년 처음 사업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들어왔을 때 지는 퇴짜를 놓았다. 기업가치가 1억 달러로 평가받던 때 “살펴볼 기회가 있었는데 외면했다. 다른 계약을 성사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라고 그가 돌이켰다. 1년 뒤 페이스북의 평가액이 5억5000만 달러로 훌쩍 뛰었다. 또 한 차례의 자금조달을 위해 마크 저커버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지는 투자하기로 작정했다.

그레일락의 역사상 이 페이스북 회의만큼 논쟁이 치열했던 안건은 거의 없었다. 아직 검증되지 않고 경쟁자(마이스페이스, 프렌드스터, 티클)도 많은 사업체의 평가액이 너무 높다는 점이 파트너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페이스북이 최후의 승자로 남을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트너 중 다수가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던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소셜미디어가 어떻게 스스로 기반을 구축해가고, 대학을 넘어 대중으로 확산되며, 사람들이 소통 채널을 갈구하는지 자세히 묘사했다.

결국 파트너들이 그 투자에 동의하고 회사 역사상 최대 규모로 꼽히는 수표를 끊었다. 1000만 달러였다. 페이스북의 앞선 펀딩에 참여했던 액셀의 파트너 짐 브라이어는 당시 받았던 전화를 기억한다. 그레일락 파트너 중 한 명이 전화를 걸어 말했다. “그냥 재확인 차원에서 묻는 건데 우리가 투자를 제대로 하는 거요?” 5월 말 시점에서 페이스북의 시가총액은 1600억 달러 선이었다.

링크드인 창업자 레이드 호프먼은 회사 상장 후 그레일락의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스텔스 모드’“어젯밤 3시간 반가량 밖에 못 잤다.” 멘로 파크에 있는 로즈우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호프먼이 말했다. 그 앞 쪽의 거대한 전면 유리창을 통해 실리콘밸리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갈색의 관목지대가 산타크루즈 산맥까지 이어졌다. 이 지역에서 호프먼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창업 기업가들은 그를 고군분투하는 신생 벤처들의 후원자로 간주한다. 사업 설명회에선 긴장한 창업자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수완으로 유명하다.

한 창업자는 서로 같은 취미를 갖고 있는 보드 게임에 관해 호프먼이 그에게 조크를 던졌다고 회상했다. 첨단기술 마니아 집단 사이에서 인기 절정인 ‘카탄의 정착자들(Settlers of Catan)’이다. 한번은 창업자들을 후원하려 만든 개인 웹사이트에 호프먼 자신의 초창기 링크드인 사업설명회 자료를 올렸다. 2004년 당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프레젠테이션을 어떻게 바꿀지 주석을 달았다.

이 날 아침 호프먼의 일정은 빡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레일락에서 맡은 역할 외에 링크드인 회장 역할도 그대로 맡고 있었으며 곧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참이었다. 삼성 관계자를 만나 그들의 휴대전화용 링크드인 앱 안건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마무리되지 않은 그레일락 사업을 매듭지어야 한다.

지난 3일 동안 ‘스텔스 모드(stealth mode)’로 활동해온 신생 벤처기업을 추적해 왔다.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방식을 가리키는 실리콘밸리 식 표현이다. 그러나 공동창업자 중 한 명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모든 세부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그것이 투자할 만한 대상이라고 확신한다.

호프먼은 즉시 사업설명회 모임을 소집했다.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이제 투자 제의를 해야 할지 신속히 판단하도록 그레일락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 세계에서 알짜배기 신생 벤처기업들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레일락의 라이벌 투자사 중 2개사가 이미 투자제안을 한 상태였다.

일류 창투사 간의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세쿼이아, 액셀, 벤치마크, 안드리센 호로위츠 등이 그레일락의 최대 라이벌로 꼽힌다. 거의 모든 대형 투자 안건을 두고 경합을 벌인다. 투자자들이 자본을 싸들고 밸리로 몰려들고 있다. 일정 부분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의 엄청난 평가액 덕분이다. 그리고 일류 벤처 투자사들은 방대한 규모의 펀드를 새로 조성했다. 안드리센 호로위츠는 최근 15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출범시켰다.

지난 가을 그레일락은 10억 달러의 기금을 조성했다. 지금은 26억 달러를 운용한다. 동원 가능한 자본이 풍부해 일류 신생 벤처기업들은 종종 복수의 투자제의를 받을 정도다. 예컨대 스프리그는 그레일락 말고도 3건이나 제의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는 어쩌면 창투사들이 어떻게 신생 벤처기업을 고르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창업자들이 투자자들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일지도 모른다.

“내가 과거 벤처투자사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는지 모르겠지만 썩 우호적이지는 않다.” 트위터의 공동창업자 에브 윌리엄스가 말했다. 트위터의 후원자들이 그를 몰아낸 일은 유명하다. 지난 겨울 윌리엄스는 자신이 세운 새 회사 미디엄의 투자자들을 찾아다녔다. 자신이 선택한 투자자들이 있었다. 제2의 트위터에 누가 투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실상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트위터 기업공개(IPO) 덕분에 그의 자산가치가 20억 달러를 웃돈다. 이번에는 그보다 좀 더 추상적인 뭔가를 찾고 있었다.

“내게는 성격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고 그가 말했다. 투자자를 결정하기 전에 그는 다른 창업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벤처자본가들에 관한 평판을 들었다. 한 통의 전화가 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스는 디그(소셜뉴스 사이트)의 공동창업자 케빈 로즈와 통화했다. 그레일락은 디그의 벤처투자사 중 하나였다. 윌리엄스는 한 가지를 알고 싶어했다.

디그가 쓰러져갈 때 익사 직전의 CEO를 데이비드 지가 어떻게 대했는가(지가 그레일락을 그 투자 건으로 끌어들인 파트너였다)? 물론 투자한 돈을 모두 잃을 판인 그 순간에 자본가의 진짜 본성이 드러난다. “지는 항상 기업가들에게 옳은 일을 하려 애썼다는 말이 어김없이 들려 왔다”고 윌리엄스가 말했다. “사람들이 아무 투자자나 가리켜 보편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지난 1월 그레일락이 미디엄의 주요 투자자 역할을 맡는다고 윌리엄스가 발표했다. 실리콘밸리의 희한한 계산법과 인연에서 미디엄이 트위터의 근처라도 따라가는 성공을 거둔다면 그레일락의 디그 투자가 그나마 결실을 거두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투자자들이 자본을 싸들고 밸리로 몰려들고 있다. 지금은 오히려 벤처 창업자들이 투자자들을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람 빼돌리기도 능력“조시, 트위터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했어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그레일락의 젊은 파트너 조시 엘만(38)이 한 사무실에 앉아 있다. 넥스트도어의 제품 엔지니어, 디자이너, 관리자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넥스트도어는 링크드인이 구직자들의 네트워크 역할을 했듯이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같은 역할을 하려는 취지의 신생 벤처기업이다.

탁 트인 사무실 공간에는 커다란 창문들이 달려 있다. ‘우리의 선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한쪽 벽면을 덮고 있다. 프로그래머들이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다. 복장은 자유분방하다. 플라넬 셔츠나 튀는 티셔츠, 버디 홀리 안경(동명의 전설적인 록가수가 착용하던 검은 뿔테 안경) 차림이다. 모히칸 헤어스타일(닭벼슬 머리)을 한 사람도 있다.

“잠깐, 페이스북을 참고하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엘만이 자신의 노트북을 두드린다. 엘만은 앞면에 고양이들이 그려진 오렌지색 티셔츠와 청바지에 운동화를 착용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엔지니어나 관리자들과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입장에 있었다. 엘만은 트위터의 ‘성장 해커(growth hacker)’였다. 사람들이 사이트를 이용하도록 만드는 기술자를 가리키는 실리콘밸리 용어다.

그 전에는 페이스북 커넥트(다른 사이트에서 페이스북 계정으로 로그인하는 기능)를 출범시켰으며 그 전에는 링크드인의 초창기 제품 관리자로 일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 구축에 관해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그 일들을 어떻게 했는지 넥스트도어에 보여주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됐다. 그들도 배워서 따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레일락은 넥스트도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레일락은 1년여 전 이 회사에 1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뒤로 넥스트도어는 빠른 성장세를 보여 왔다. 페이스북과 링크드인이 깔아 놓은 토대 위에 들어서는 차세대 소셜미디어 플랫폼의 물결에 속한다. 지역 시장을 잡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요즘 소비자 기술 분야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업종 중 하나다.

가령 강아지를 잃어버렸거나 뒷마당 세일을 할 경우 동네 전체에 벽보를 붙이는 대신 넥스트도어에 올리면 된다. 수입이 없으며 또는 앞으로 수입을 어떻게 창출할지 아무런 계획도 없다. 하지만 몇 년 동안 버텨낼 만큼 넉넉한 현금을 보유한다. 그레일락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한 6개월 뒤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바이어스를 비롯한 다른 투자자들로부터 또 다시 6000만 달러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온갖 가능성과 펀딩에도 불구하고 신생 벤처기업의 세계는 불확실성투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항상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가 튀어나온다. 예컨대 지난 5월 넥스트도어의 톨리아가 중죄에 해당하는 뺑소니로 기소됐다. 고속도로에서 차선변경을 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았다고 한다. 두 차량은 충돌하지 않았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넥스트도어가 성공하려면 창업 당시의 고속성장 목표를 고수해야 한다. 이들은 최대한 빨리 많은 사람이 사이트를 이용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대형 팀을 운영한다. 현재 미국 전역의 3만5000개 지역에서 사업활동을 벌인다(총 이용자 수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지만 소셜미디어에서 더 큰 실력자가 되려면 몸집을 더 키워야 한다. 페이스북의 현재 이용자는 한 달에 10억 명을 웃돈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이 일을 할 때는 여기에 버튼을 많이 설치했다”며 엘만은 자신의 스크린을 가리켰다. “지금 보니 훨씬 더 깨끗하게 만들었다. 마음에 든다.”

그레일락만큼 참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려는 벤처투자사는 거의 없다. 사업설명회의 화려한 쇼가 끝나고 은행에 돈이 입금되면 회사를 세우는 진짜로 어려운 일이 시작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신생 기업들은 그레일록의 진정한 우위를 인식하게 된다. 그 자신들이 과거 창업자였기 때문에 파트너들은 단편적인 아이디어의 토대 위에서 실질적인 사업을 일구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안다.

“현재 자신이 대처하는 상황을 모두 경험했고 그것도 사상 가장 성공적인 인터넷 기업 두 곳에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기 위해 얼마나 지불할 용의가 있는가?” 톨리아가 물었다. 한 번은 넥스트도어 사이트에 새 기능을 시도했다가 이용자들의 불만이 빗발치는 큰 위기를 겪었다.

데이비드 지도 페이스북에서 새 기능 일부가 이용자들의 원성을 샀던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넥스트도어 팀이 난관을 헤쳐나가도록 가이드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넥스트도어의 관리자 중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발표했다. 그때도 지가 그를 설득해 눌러 앉혔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들이 지닌 영향력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고 켈먼이 말했다.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물색할 때 헤드헌팅 회사의 관심을 끌기에 그 자신은 너무 무명인사였다. 그레일락 파트너 중 한 명이 그 대신 전화를 넣었다. 잠시 후 레드핀은 온라인 신발 쇼핑몰 자포스의 전 CFO 크리스 닐슨을 영입했다.

채용은 그레일락이 특히 중점을 두는 문제다. 현재 실리콘밸리에선 치열한 인재 유치 경쟁이 벌어진다. 미국에는 첨단기술 회사들의 막대한 수요에 부응할 만큼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가 많지 않다. 신생 벤처기업 입장에선 대형 기술기업들만큼 거액의 연봉을 지급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창업자는 한 대형 기술기업으로부터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려다가 연봉이 100만 달러를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아연실색했다. 현재 그레일락의 투자대상 기업 전반에 걸쳐 최고관리자 자리 40개 외에도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 자리 수십 개가 비어 있다.

신생 벤처들의 우수 인재 물색을 돕기 위해 그레일락은 자체 스카우트 팀을 구성했다. 2011년 제프 마코위츠와 댄포틸로를 영입했다. 실리콘 밸리에서 방대한 인맥을 구축한 기술분야 일류 스카우터들이다. 이들은 그레일락의 신생 벤처기업들에 거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최근의 몇몇 성공사례로 자기 회사를 휴렛패커드에 매각한 톰 라일리를 클라우데라의 CEO로, 구글 수석 엔지니어였던 댄 클랜시를 넥스트도어의 엔지니어링 책임자로, 넷플릭스의 제품혁신 담당 부사장 브렌트 에어리를 크리에이티브 라이브의 혁신 책임자로 연결시켜줬다. 중견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채용 문제의 경우 창업자들이 자력으로 해결하도록 그레일락이 교육을 실시한다. ‘100 원칙’ 같은 지침도 있다. 쓸 만한 후보자 15명을 확보하기 위해 면접해야 할 인원 수를 나타낸다.



남다르게 생각하라샌프란시스코의 창업보육센터 해치 투데이의 늦은 오후. 신생 벤처세계의 최전선 참호다. 비좁고 혼잡한 공간 전체에 작은 테이블들이 줄줄이 놓여 있다. 청장년이 뒤섞여 책상 앞에 빽빽이 몰려 앉아 분주하게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해시고, 웨블리시팰, 스왑돔 등 일부는 깃발 배너를 설치했다.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을 듯한 회사명들이다. 아무도 스프리그라는 이름이 적힌 배너 뒤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필시 이 사무실 안에서 그만한 실력자는 없을 성 싶다. 그레일락의 파트너 중 한 명인 사이먼 로스먼이다. 하루 종일 이곳에서 스프리그가 펀딩 자금 1000만 달러를 어떻게 활용할지 계획을 수립하도록 도왔다.

“속도가 나는 사업이다. 빠르게 움직인다. 우버나 리프트(승차 공유 앱)처럼 반응이 있는 드문 케이스 중 하나다.” 과거 e베이 모터스를 이끌었던 로스먼이 설명했다. 모두 계획대로 된다면 머지 않아 스프리그가 인큐베이터를 벗어나 독립 건물에 사무실을 설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도 그레일락이 도움을 줄 수 있다. 부동산 중개 전문가를 고용해 신생 벤처들이 업무공간을 찾도록 돕는다. 그러나 이 회사가 그레일락의 다음 히트작이 될지는 모두가 답을 알고 싶어하는 수수께끼다.

“실패의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지가 말했다. “진짜 관건은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느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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