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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자원 둘러싼 냉전의 신호탄?

북극 자원 둘러싼 냉전의 신호탄?

노르웨이 해안 부근의 국제수역 상공을 비행하는 러시아 Tu-95 베어 전폭기(2007년).
노르웨이 마게뢰 방공감시 기지는 수도 오슬로 남쪽으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수한 출입문 곁의 작은 초소엔 병사 1명만이 경비를 서고 있다. 노르웨이의 첨단 방어 시스템을 관장하는 중요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나치 점령을 소재로 영화를 찍는 세트처럼 보인다.

산속으로 난 좁고 긴 터널을 따라가면 보안이 삼엄한 통제실이 나온다. 컴퓨터와 레이더 모니터가 즐비하다. 정보 전문가들은 노르웨이 영공의 항공기 이동 상황을 표시하는 점멸 점들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여느 때와 같은 최근 어느 날 오후 레이더 모니터 오른쪽 위에서 점 2개가 반딧불이처럼 깜빡거리며 이동했다.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러시아 Tu-95 베어 전폭기였다. 몇 책상 건너 항공병이 전화기를 들고 노르웨이 북부 해안에 위치한 보되 군사기지를 호출했다. 곧바로 노르웨이 공군의 F-16 전투기 2대가 발진했다.

다행히도 러시아 전폭기들은 노르웨이 북극 영공 외곽에서 선회비행 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지난 1월 28일에도 Tu-95 베어 전폭기 2대가 공중급유기와 러시아 최첨단 전투기 미그-31기의 호위를 받으며 노르웨이 북부 영공을 침입했다. 무선통신을 도청한 런던 선데이 익스프레스 신문에 따르면 러시아 전폭기 중 하나는 ‘핵폭탄’을 장착하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엔 러시아의 Tu-22 초음속 폭격기 1대가 노르웨이 북부 영공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북구권 뉴스 전문매체 바렌츠 옵서버의 블로그에 따르면 그 폭격기는 발사 준비가 된 크루즈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었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숱하게 보고됐다.

러시아 전투기들은 비행계획을 제출하지 않고 이륙해 트랜스폰더(무선 응답기)를 끄고 번잡한 상업 항로를 비행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불상사가 일어날 위험이 크다. 그 때문에 항공사와 나토군 조종사들이 골머리를 앓는다. 최근 몇 달 동안 러시아 전투기들은 자국 기지에서 멀리까지 날아가 영화 ‘톱건’에서 보는 듯한 곡예 비행을 서슴치 않았다. 덴마크 코펜하겐과 오슬로 사이를 오가는 스칸디나비아항공 여객기에 예고도 없이 바짝 다가갔고, 노르웨이 공군 F-16기 곁을 스치듯이 지나가 조종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게뢰 기지를 지휘하는 아르비드 할보르센 대령은 레이더 모니터에서 러시아 공군 Tu-95 전폭기를 표시하는 점멸 점을 보면서 “이런 일은 수년 만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작전도 최근 들어 더 정교해졌다.” 갈수록 작전 규모가 커지며 전폭기가 전투기, 공중급유기, 감시기의 호위를 받고 노르웨이 영공 부근을 비행하는 경우도 많다.

냉전 당시에는 소련이 수많은 전투기를 동원해 서방을 상대로 무력을 과시했다. 현재는 위협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노르웨이 부근의 러시아 전투기 출격 횟수는 2007년부터 매년 크게 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략폭격기의 국제공역 비행 재개를 지시한 이후부터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세계가 우크라이나에 눈이 팔려 있는 동안 푸틴은 슬그머니 북극 전략을 강화했다. 크렘린은 최초로 북극에서 러시아 이익을 지키는 전략이 포함된 군사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그에 따라 러시아군 북극 여단 2개가 신설될 예정이다.
 재정 지원 받기 쉬운 프로젝트 ‘북극’
러시아 북해함대 훈련 중 전함 표트르 벨리키호에 탑승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2005년).
핀란드 국경에서 50㎞도 채 떨어지지 않은 러시아 알라쿠르티의 폐쇄된 군사기지도 다시 문을 열었다. 또 러시아 공병대는 여러 북극해 섬에서 냉전시대에 사용하다가 버려진 기지들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북해함대의 블라디미르 콘드라토프 수상함 그룹 사령관은 러시아 투데이 방송 인터뷰에서 “우리의 주된 목표는 북극해에서 여러 가지 조건을 조사·평가하고 극지에서 우리 무기와 장비의 적합성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했다.

푸틴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노르웨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했듯이 북극 지방의 영토를 장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부추기지 않으려고 조용히 대응한다. 그러나 75년 전 나치의 침공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노르웨이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최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아직은 모호한 개념이다. 미 국방부 민간정보 전문가 출신으로 알래스카주 앵커리지 소재 북부연구소에서 북극안보정책을 분석하는 키스 스타인보는 “러시아군이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격적이라고 말하는 건 과장일지 모른다고 그는 덧붙였다. “공격성의 의미를 규정하고 냉전시대 소련의 행동과 비교해봐야 한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전 CIA 간부도 스타인보의 말에 동의했다. 옛 소련권 국가에서 10여 년 동안 비밀 공작요원으로 활동한 그는 요즘 러시아 공군의 움직임이 활발하지만 “냉전이 한창일 때 매주 발생한 소련의 나토 영공 침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의 전력이 지난 몇 년 동안 상당히 나아졌지만 여전히 옛 소련군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푸틴도 그런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러시아는 강화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위를 높이고 국제무대에서 더 존중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러시아로선 돈낭비라고 캐나다 밴쿠버 소재 사이먼스재단의 북극안보 전문가 어니 레게르가 지적했다. “뻔히 이득이 되지 않을 일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레게르는 최근 보고서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전투기와 전폭기의 상징적인 비행은 적에게 그런 무기가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려는 의도다. 그러나 합리적인 세계에선 러시아가 나토를 상대로, 또는 나토가 러시아를 상대로 그런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그런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어느 쪽도 그런 무기를 사용하기를 원치 않는다.”

미 국방부에서 38년을 일한 스타인보는 러시아의 북극 군비증강에 좀 더 세속적인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막대한 돈이 걸린 문제라는 이야기다. “현재 러시아 군사 시스템에서 프로젝트 하나에 자금을 할당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프로젝트 이름에 ‘북극’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여러 프로젝트가 글로벌 대테러전을 들먹여 자금지원을 받았다. 또 지금은 별 관계가 없어도 무조건 ‘사이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재정 지원을 받기 쉽다.”

그러나 노르웨이인은 문 앞에 서 있는 러시아 곰의 망령을 떨치기 어렵다고 노르웨이의 주요 신문 아프텐포스텐의 레이둔 사무엘센 편집국장이 말했다. “우리 마음엔 그런 망령이 늘 가까이 있다.”

냉전시대 미국에서 핵전쟁의 두려움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오락물로 표출됐듯이 노르웨이인의 러시아 의도에 대한 우려도 곧 드라마로 분출될 전망이다. 노르웨이의 유명한 범죄소설 작가 조 네스뵈(소설 20권이 40개국에서 2300만 부가 팔렸다)가 대본을 쓰고 있는 정치 스릴러 주간 드라마 ‘점령당하다(Occupied)’가 내년 노르웨이 TV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홍보 자료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러시아가 석유자원을 장악하려고 노르웨이를 ‘부드럽게’ 침공하는 미래의 가상 사건”을 다룬다.

작가 네스뵈는 뉴스위크에 보낸 이메일에서 “노르웨이의 녹색·좌파 정부가 화석연료 에너지 생산을 중단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그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러시아가 들이닥쳐 석유시설을 장악한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서면으로만 항의하고 노르웨이 지도자들도 군사행동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러시아가 석유 자원 장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동안 협상을 시도한다. 점령이라고 하지만 노르웨이인은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한다. 소수의 러시아인이 들어와 있고 그들 대다수는 정장 차림이다. 검열도 없는 듯하다. 노르웨이인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고, 세계 최고 부자 국민으로서 계속 살아간다.”

이 드라마 제작 소식은 노르웨이 보안당국이 실제로 중대 음모의 증거를 발견한 시기에 전해졌다. 일부 외국 정보기관(북극해의 항로를 탐내는 러시아와 중국이 주 용의선상에 올랐다)이 오슬로의 정부청사 주변에 IMSI 캐처를 설치했다. 휴대전화 신호를 은밀히 포착할 수 있는 도청장치다. 공식적으로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노르웨이 소식통에 따르면 정부는 어느 조직의 소행인지 알면서도 전면적인 국제 스캔들로 비화될까 우려해 발표하지 않았다.

네스뵈는 예정된 드라마의 줄거리가 타당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일상적인 물질 세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유, 독립, 민주주의 같은 표현을 위해 사람들이 무엇을 기꺼이 희생하려 할까? 누가 먼저 저항할까? 국가가 그런 저항을 지지할까? 이런 문제가 중요하다.”
 북극의 게릴라
2014년 12월 2일 노르웨이군의 레이더 영상은 러시아 미그-31기와 노르웨이 F-16기가 아슬아슬하게 충돌을 피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런 의문은 1940년 노르웨이가 독일에 항복한 기억을 되살릴지 모른다. 당시 독일은 비드쿤 크비슬링(노르웨이 육군 장교 출신으로 나치 점령기에 나치에 협조해 괴뢰정부를 수립했다)이 이끄는 노르웨이 내부 나치당원들의 도움을 받고 노르웨이를 점령했다. 국왕과 애국자 수만 명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 정부를 세우고 저항운동을 펼쳤다. 영국 정보기관이 훈련시킨 노르웨이 독립군 부대의 게릴라들은 본토로 침투해 나치에 저항했다.

노르웨이인은 그런 역사적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는다. 지난 1~2월 6주 동안 매주 일요일 밤 노르웨이인 5명 중 1명 이상은 드라마 ‘중수 전쟁’을 시청했다. 독일이 핵무기 제조를 위해 압류한 중수(중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물)를 게릴라들이 파괴하는 영웅적인 행동을 극화한 드라마다.

노르웨이군에는 지금도 게릴라 사고방식이 중요한 특성으로 남아 있다. 노르웨이 특수전 사령관 요한 홀테 해군 소장은 부하 장교 10명을 데리고 첫 노르웨이 게릴라들이 백병전과 폭탄 기술을 배웠던 스코틀랜드의 훈련소를 방문했다. 그는 “우리의 뿌리를 찾고 싶었다”며 “장교들이 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노르웨이 게릴라부대 본부는 웅장한 중세의 아케르스후스 요새에 있다. 700년 전 해상 침입자들로부터 오슬로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성채다. 1940년엔 나치가 그곳을 점령했다.

1988년 노르웨이 정부는 예산 절감 차원에서 육군 산하에 소규모로 설치됐던 특수전 부대를 해체했다. 그러자 북해 석유시추 시설에 대한 공격을 우려한 석유업계 등이 시위를 벌여 다시 복원됐다. 그 이래 특수전 대원들은 발칸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작전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국방장관 직속 부대로 독립했다.

홀테 사령관은 다른 노르웨이 군간부나 정치인처럼 최근 러시아의 행동을 사악한 의도로 규정하는 문제에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의 위협에 관해 묻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잠재적인 적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노르웨이를 넘보지 마라. 큰코다친다. 우린 얼마든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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