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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킹은 무조건 나쁘다?

해킹은 무조건 나쁘다?

‘CSI 사이버’ 촬영 중 배우 피터 맥니콜(왼쪽)이 제작진의 연기 지시를 받고 있다. 현실에선 좋은 편과 나쁜 편이 이 드라마처럼 명백하지 않다.
‘세기의 재판’을 기억하는가? 1994년 6월 백인 여배우 니콜 브라운과 애인 로널드 골드먼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저택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전 미식축구 스타로 브라운의 전 남편인 O J 심슨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과학수사 결과는 그의 범행임을 시사했다. 피 묻은 장갑, 혈흔, 머리카락, 카펫 섬유 등 법의학적 증거가 숱하게 확보됐다. 그런데도 검찰은 배심원단이 그의 유죄 평결을 내리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배심원들이 과학수사 기법과 법의학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심슨은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그 유명한 재판이 끝난 지 5년 뒤인 2000년 TV 범죄 드라마 시리즈 ‘CSI 과학수사대(CSI: Crime Scene Investigation)’가 처음 방영됐다. 시청자는 처음으로 범죄현장에 쳐진 경찰의 노란색 테이프를 넘어가 법의학과 과학수사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매회 라스베이거스를 무대로 먼저 시신 발견되고, 그 다음 수사팀이 증거를 수집·분석하고 증인을 심문한 뒤 범인을 체포하는 형식이었다.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자 속편 시리즈가 두 가지로 만들어졌다. 2002년 ‘CSI 마이애미’, 2004년엔 ‘CSI 뉴욕’이 시작됐다. 2007년이 되자 CSI 시리즈가 하나의 문화현상(cultural phenomenon)으로 자리 잡았다. 시청률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뿐 아니라 일반대중이 과학 수사에 사용되는 용어와 법의학 지식까지 갖추게 됐다.

2010년 원래 시리즈의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속편 시리즈들이 종영되자 CSI 제작진은 미개척지였던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로 게임과 같은 오락성을 학습에 재미 요소로 부가해 학습동기를 강화하고 학습효과를 높이는 프로그램]’ 영역으로 진출하고 시청률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발상을 했다. 그 결과물이 ‘CSI 사이버(CSI: Cyber)’다. 디지털 시대정신이 반영된 이 새 시리즈는 지난 3월 4일 CBS 방송에서 첫선을 보였다.

‘CSI 사이버’는 사이버심리학자 애버리 라이언(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패트리샤 아켓이 맡았다)이 이끄는 FBI 사이버범죄 수사팀의 활동을 다룬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완전한 익명 영역인 ‘다크넷(darknet)’의 언저리에서 활동한다(다크넷은 신뢰하는 사용자들 간 파일 공유를 위한 폐쇄형 사설 네트워크로 표준 프로토콜과 포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IP 주소가 공적으로 공유가 안 되는 익명성이 보장돼 기관이나 정부의 간섭을 쉽게 피할 수 있다). 이 시리즈의 비공식 슬로건에 따르면 그들은 ‘생각에서 시작되고 온라인으로 이뤄지지만 현실세계에서 결과가 나타나는’ 범죄를 해결한다.

‘CSI 사이버’에서 사이버심리학자 애버리 라이언 역을 맡은 패트리샤 아켓
CSI 시리즈 크리에이터 겸 수석 프로듀서 앤서니 자이커는 “CSI 팬이라면 편안하게 느낄 정도로 익숙한 CSI 특성이 그대로 들어 있는 드라마”라고 설명했다. 또 10년 이상 CSI 시리즈 제작을 총괄해온 파멜라 비시는 우리가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매일 사용하는 이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CSI 시리즈가 그 문제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팩스에서 컴퓨터, 그리고 송수신 신호까지 어떤 영역이든 범죄의 가능성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전까지 CSI 드라마가 제공한 교육이 유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 드라마의 전성기에 전문가들은 한가지 불길한 추세를 발견했다. 극중에서 과학수사가 과대포장되면서 배심원들이 법의학적 증거를 지나치게 중시하게 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른바 ‘CSI 효과’다. 과학자들은 극중에서 많은 사람을 감옥으로 보낸 ‘이로 깨문 자국 분석’ 같은 법의학적 기법을 ‘쓰레기 과학’이라고 비판했다.

새로운 시리즈 ‘CSI 사이버’의 경우도 그와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할지 모른다. 우선 이 드라마에서 사이버범죄자와 피해자 둘 다를 분석하는 사이버심리학자 라이언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팀을 이끈다. 그중 한 명이 해커 브로디 넬슨(래퍼 겸 배우인 섀드 모스가 연기한다)이다. 그는 증권거래소를 해킹해 5억 달러를 빼돌리려다 체포된 뒤 FBI의 사이버 수사를 돕든지 감옥에 가든지 선택을 강요 받아 팀원이 됐다.

그처럼 개심한 범죄자가 또 있다. 수사팀에서 소셜미디어와 사이버추세 전문가로 일하는 레이븐 라미레즈(헤일리 키요코)다. 그와 달리 언제나 정부를 위해 일해온 ‘화이트 해커’(컴퓨터와 온라인의 보안 취약점을 연구해 해킹을 방어하는 전문가) 대니얼 크루미츠(찰리 쿤츠)도 팀원이다.

그런 설정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법집행 기관은 범죄를 저지른 해커를 공개적으로 고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극중에서 하는 일도 현실과 동떨어진다. 사실 해킹은 아주 따분한 일이다. 오랜 시간(며칠 또는 몇 주)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프로그램 코드를 뚫어지게 쳐다봐야 한다. 해킹을 적발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CSI 사이버’에선 양성 코드는 녹색, 악성 코드는 붉은색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팀은 즉시 컴퓨터 시스템에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 군인 출신으로 범죄자를 직접 뒤쫓는 FBI 요원 일라이자 문도를 연기하는 제임스 반 더 비크는 “50분 동안 4명이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감초 역할을 한다.”

FBI 요원을 연기하는 제임스 반 더 비크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드라마의 다른 단점은 정부의 편견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극중인물 라이언은 실제 사이버심리학자인 메리 아이큰을 모델로 한다(아이큰은 이 드라마의 자문역을 맡고 있다). 미국 정부만이 아니라 인터폴, 유로폴에서도 일한 아이큰은 요즘 다크넷에 숨어 있는 범죄자가 첨단 디지털 수단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잘 안다. 그러나 법집행 기관과 긴밀한 관계에 있어 극중에서 범죄자 묘사에 편향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큰은 이렇게 항변했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법집행 기관에 가서 ‘CSI 사이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는 멋진 플랫폼’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들의 일을 미화시켜주기 때문이다. 수사관이 영장도 없이 디지털 수색을 실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지만 아이큰은 극중에선 FBI 요원이 “용의자를 대상으로 디지털 감시를 하려면 언제나 영장을 발부 받는다”고 말했다.

또 수사기관이 언제나 ‘좋은 편’이라는 극중 설정은 제작진이 정부의 불법행위를 폭로하는 문제를 다룰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실에선 여러 수사기관이 교묘한 방법으로 불법적인 감시를 자행한다는 사실이 자주 폭로된다. 자이커는 “하지만 우리는 중립성을 지킬 뿐 드라마를 통해 정치적 선언을 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런 중립성 주장은 정부를 지지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드라마의 다른 자문역 제임스 아킬리나도 정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 디지털 위험 관리·수사를 전문으로 하는 업체 스트로즈 프리드버그에서 일하는 그는 정부 기관을 포함해 다양한 조직에서 의뢰 받은 디지털 수사를 지휘한다. 또 9·11 테러사태 직후에는 FBI 긴급작전센터의 법무팀을 이끌었다.

섀드 모스는 해커 브로디 넬슨 역할을 준비하면서 “실제 해커의 자문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해커에게 자문을 받았다면 정부의 이익에 반해 활동하는 세력이 반드시 나쁜 편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정부의 은밀한 도감청 행위를 폭로한 전 국가안보국(NSA) 분석가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 국민을 위해 큰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법집행 기관에 편향된 자문역들은 사이버범죄자 묘사, 범죄 구성요건 구축, 사이버범죄 수사 방식 등을 지도한다. 대중에게 전달되는 이런 메시지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인터넷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극중인물들은 ‘다크웹’을 사악한 곳으로 말하면서도 그게 실제로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진 않는다. 드라마의 초점이 그곳에서 일어나는 범죄에 맞춰져 시청자는 다크웹이 무조건 나쁘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다크웹에서 흔히 사용되는 브라우저 ‘토르(Tor)’는 미 해군이 만들었다. 다크넷 활동이 전부 나쁘며 그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은 중대한 위협 인물이라고 시사하는 것은 ‘정부는 무조건 좋은 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셈이다.

지난해 9월 애플과 구글이 운영체제를 자동으로 암호화하는 방식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하자 법집행 기관들은 즉각 비난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 기기 소유자의 비밀번호 없이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은 백도어(backdoor, 시스템 설계자가 시스템에서 만들어 놓은 보안이 제거된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정부기관이 사실상 장님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범죄와 싸우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처럼 그런 선언도 정부 활동을 보호하려는 연막인 셈이다.

예를 들어 정부기관들이 은밀한 감시에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약점을 찾고 있으며 그 결과를 제조사에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널리 보도됐다. 그들이 사이버 활동을 훔쳐보려는 욕구를 국민의 사이버 보안과 사생활 보호보다 우선시한다는 얘기다. 시민자유 보호와 인터넷 보안, 정부의 법집행 능력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찾으려는 논의와 논란이 뜨거워지는 상황에서 ‘CSI 사이버’가 해킹과 사이버범죄를 편향된 시각으로 그려내면 정부만 유리해질 수 있다.

얼마 전 악명 높은 다크넷 마약 시장 ‘실크로드’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된 로스 울브리히트가 배심원의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일각에선 FBI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영장 없이 비공개 인터넷 브라우저에 침투하는 등 미심쩍은 수사 기법을 사용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 측이 배심원단의 기술적 지식 격차를 이용할 것이 분명했다. 모두진술에서 검사 측은 ‘실크로드’를 “인터넷의 어둡고 은밀한 부분”으로 설명했다. 반면 변호인 측은 ‘실크로드’가 정부의 관할권 밖에서 상품을 사고 파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울브리히트는 ‘실크로드’가 정부의 규제와 감시를 뛰어넘어 진정으로 자유롭고 열린 시장을 만들려는 자신의 시도였다고 거듭 주장했다. 마약 거래, 돈세탁, 컴퓨터 해킹 등 7가지 혐의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그는 최소한 징역 30년을 선고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CSI 사이버’에서 FBI 요원 일라이자 문도를 연기하는 제임스 반 더 비크는 “15년이나 20년 뒤엔 무엇이 악성코드인지 모두가 알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알리는 팝업은 절대 클릭하지 않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그러나 이 드라마 때문에 NSA가 민간인의 개인정보를 은밀히 캐내기가 더 쉬워진다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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