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아랍계 프랑스인 모헤드 알트라드의 기업가 정신 - 프랑스가 나아갈 미래를 보여주다
- 아랍계 프랑스인 모헤드 알트라드의 기업가 정신 - 프랑스가 나아갈 미래를 보여주다
세계 최대 건축 비계 생산업체 경영주인 모헤드 알트라드는 유럽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 거물 기업인이다. 최근에는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샤를리 에브도의 비극이 생생히 남은 프랑스에서 시리아계 프랑스인 알트라드는 기업가 정신을 통한 사회 통합의 길을 몸소 보여준다.모헤드 알트라드(Mohed Altrad)는 자신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시리아 사막을 유랑하는 베두인족 사이에서 태어났고, 출생일을 보여주는 증명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출생 연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프랑스 몽펠리에(Montpellier)로 이사왔던 1948년으로 정했다. 당시 프랑스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하루 한 끼로 연명했다. 프랑스에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몽펠리에 럭비 경기장에 가면, 은색 물결무늬 벽을 가로질러 십 수번 이상은 그의 이름이 되풀이 된다. 경기장은 최근 알트라드(와 같은 이름의 회사) 이름으로 재명명됐다. 구단주 전용 박스석에서 알트라드를 만났다. 그의 몸을 단단히 감싼 짙은 남색 코트는 회색 곱슬머리와 잘 어울렸다. 알트라드는 자리에 앉아 1만5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관객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데다 이름을 새기는 건 대개 죽었을 때 아닌가.”
구단 인수는 몽펠리에 시민으로서 행한 의무였다. 2011년 몽펠리에 시장은 주민 중 최고 부자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재정난에 빠진 29년 역사의 럭비팀 에호 럭비(Herault Rugby)를 살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럭비 경기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몽펠리에 시민으로 나선 알트라드는 구단을 인수했다. 지금은 럭비 경기를 빠지지 않고 참관한다. 그가 입은 남색 블레이저 위에는 2005년 수여한 프랑스 최고 명예훈장 ‘레종 드뇌르’ 붉은 핀이 더욱 돋보였다.
알트라드는 호라시오 엘저 소설에 자주 나오는 ‘인생역전’ 이야기의 화신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유년 시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회사 알트라드 그룹을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세계 최고 비계 제조사로 키워냈다. 알트라드는 콘크리트 혼합기에서 손수레까지 다양한 건축 장비를 제공하면서 6%로 추산되는 순수익률을 확보했고, 인수를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25년 가량 꾸준히 매출액과 수익을 성장시킨 결과, 지난 5년간 매출은 2배로 증가했고, 그가 보유한 회사 지분(80%)의 가치는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덕분에 그는 3월 포브스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알트라드에서 제작한 비계는 미국을 비롯한 100여 개 국가의 건축 및 산업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파리에서 일어난 언론인 학살 테러 이후, 프랑스는 존재론적 질문에 맞닥뜨렸다. 프랑스 국민은 정확히 누구인가, 복합적 층으로 구성된 이 국가에서 규모가 상당(하고 대부분 가난)한 아랍계 인구를 사회로 통합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알트라드는 프랑스가 나아갈 길을 보여준다. 반아랍 정서가 팽배했을 당시(알제리 독립전쟁은 프랑스인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프랑스에 들어왔지만, 프랑스어를 열심히 배운 그는 현재 평단의 찬사를 받는 프랑스어 소설가가 됐다. 이후에는 프랑스 회사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 내기도 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프랑스 경제가 필요했던 건 새로운 도약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알트라드의 기업가 정신이었다. 게다가 그가 키워낸 회사는 바게트, 보르도와 함께 프랑스의 정신적 지주에 가까운 건축양식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알트라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내막을 알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4살이었을 때 10대 소녀였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어머니를 강간했던 부족장 아버지는 그와 인연을 끊었다. 알트라드의 유일한 남자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학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알트라드는 할머니와 함께 텐트에서 살았다. 할머니와 손자는 염소와 양, 낙타를 위해 목초 오아시스를 찾아 비를 쫓아다니는 유목민을 따라다니며 살았다. 할머니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유목민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트라드는 할머니가 잠에서 깨기 전 몰래 텐트를 빠져나가 사막의 모래 언덕을 한 시간 이상 맨발로 건너 학교에 갔다. 교육을 받는 건 할머니의 분노를 견딜 가치가 있었다. 급우들의 끊임 없는 놀림도 상관없었다. 그는 베두인족 사이에서도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본능이었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내가 저주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알았다. 유일한 구원의 기회는 학교였다.”
7살 때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자전거를 줬다. 사막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다. 기업가 정신이 처음 발휘된 건 이 때다.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빌려줘 번 돈으로 학용품을 샀다.
수년 후, 그는 라카(Raqqa) 근처에 있는 다른 친척 집으로 갔다. 지금은 소위 ‘이슬람 국가’의 본부가 위치한 곳이다. 라카에서 알트라드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했고, 지역 최우등으로 졸업해 시리아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 대학에 진학했다.
“특별한 꿈이 있던 건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내게 주어진 최초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만 있었다.”
1969년 알트라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프랑스의 지중해 근방 도시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수개월간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지만, 몽펠리에 대학 물리학·수학 강의에서는 교수가 하는 말의 10%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초 파리로 거주를 옮겨 컴퓨터 과학 박사학위를 딸 때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프랑스 여성과 만나 결혼을 할 정도로 프랑스어에 능숙해졌다. 공부하면서 기술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그는 시민권 획득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국영 석유회사에 취직해 아부다비에서 4년간 근무했다. 세금이 낮고 별로 할 일도 없어서 계약이 끝난 1984년에는 수십만 달러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구 3명과 함께 휴대용 컴퓨터를 생산하는 벤처 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재빨리 매각했다. 매각으로 60만 달러의 순수익을 챙겼지만, 그 돈으로 뭘 해야 할지는 몰랐다. 1985년 8월, 알트라드는 아내와 함께 아내가 태어난 프랑스 남부 마을 플로헝삭(Florensac)을 찾아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이때 한 이웃이 다가와 부채로 허덕이는 비계 제조사를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200명의 직원을 둔 메프랑(Mefran)은 매년 수십만 달러 적자를 보면서 막대한 은행 빚을 떠안고 있었다. 건축업이나 기본 회계원칙, 심지어 ‘비계’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를 알지도 못했지만, 알트라드는 아부다비에서 만나 컴퓨터 회사 경영 파트너가 되어 준 영국인 친구 리처드 알콕과 함께 회사를 인수하기로 했다.
“직관적 결정이었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상품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건설, 정유, 공항 등 모든 분야에서 비계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즉시 비용을 감축했고, 성과보수에 기반을 둔 비용체계를 도입했다. 프랑스 근로자들은 사장이 회사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음을 알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지난 5년간 번 모든 돈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사장이 우리를 믿는구나’라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회사는 소폭의 수익을 냈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때는 그냥 몸집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콘크리트 혼합기, 건설 장비 등 비계와 같은 고객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연관 분야로 다각화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불경기가 시작됐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매출액 25%가 급감하는 시련을 맞았다. 업계 경험도 없는 시리아 출신 기업가에게 은행은 쉽사리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기업 재정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알트라드는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난에 처한 회사를 저가에 인수해서 운영 효율성을 높이고 수익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많이 힘든 시기였다”고 그는 말했다. “은행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2003년 전환점이 왔다. 회사는 단단한 기반 위에 섰고, 21개 자회사에서 1억3000만 달러의 돈이 들어왔다. 이때 업계에서 평판이 아주 좋은 독일 경쟁사 플레탁(Plettac)을 인수할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인수 중 최대 규모였다. 플레탁 인수로 알트라드 그룹은 유럽 전체에서 입지를 다지고 산업계약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 유럽 다른 업체와의 통합도 잇따랐다. 알트라드는 한 해 평균 3건의 인수를 해치웠다. 손실이 난 인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알트라드 그룹 본사는 몽펠리에의 나른한 주택 지역 좁은 골목에 있다. 자신의 진정한 고향으로 본사를 이전하겠다는 CEO의 결심 덕분이다. 알트라드 그룹은 파리 이외 도시에 있는 프랑스 최대 기업 중 하나다. 사무실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알트라드의 개인 저택(‘시골집(Le Cottage)’이라는 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린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수영장이 3개가 있고, 마당에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1대씩 나란히 주차되어 있다. 직원 사무실은 옛날 하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이었고, 알트라드의 사무실은 마구간이었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 때문인지 고객 100만 명, 직원 7000명의 대기업 본사가 있을 장소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25명밖에 되지 않고, 알트라드는 비서조차 두지 않고 있다. 그는 간결한 체계의 지주사, 반자율적 구조를 가진 자회사처럼 권한을 분산시킨 것이 알트라드 그룹의 성공 원인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인수할 때에는 최소한의 규칙만 적용하고 직원과 기업문화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 원칙이다. “자유를 사랑하고 우리 직원들이 자유롭게 일했으면 좋겠다”고 그는 말했다. “합의를 이루고 나면, 각자 다른 사람과 조율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합의를 이행하면 된다.”
위계질서를 아주 싫어하는 알트라드의 가치관은 605쪽에 달하는 기업 헌장(프랑스어와 영어로 되어 있다)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기업 선언문으로만 보일 때도 있지만, 현실에도 잘 적용되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92개에 달하는 각각의 자회사는 벤처 회사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며, 현지 시장을 자세히 파악하고, 다국적 기업이 제공하는 풍부한 현금, 제품, 비용 효율성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런 방식이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건 4년 전 프랑스 국영펀드가 이끈 1억 달러의 투자 덕분이었다. 2011년 이후 알트라드 그룹은 22건의 인수를 완료했다. 최대한 세계적 사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카타르와 모로코 기업 등도 인수했다. 다음 목표는 미국이 될지 모른다. 상당한 규모의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미국 시장은 뿌리를 깊이 내린 경쟁자도 많고, 더 저렴한 중국산 비계를 선호해서 다른 곳보다 더 힘들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업공개를 하지는 않겠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기업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자신의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떠난 옛 파트너 알콕은 “그가 (경영의 자유를) 놓아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영인 알트라드는 말 그대로 투명한 사람이다. 사무실 벽 양면도 천정에서 바닥까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직원들은 출근할 때 사장이 뭘 하는지 볼 수 있다. 햇살은 산호색 벽을 환히 비추고 널찍한 타일 바닥으로 흘러들어온다. 가장자리가 금으로 장식된 검은 가죽 의자는 흡사 왕좌처럼 보인다. 천정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무겁게 달려 있다. 왕궁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수십 개의 가족사진이 있어서 균형을 잡아준다. 자녀 5명의 사진과 그의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의 사진이다. (아내와는 1995년 이혼했고, 영국계 프랑스인 변호사와 13년간 함께 사는 중이다.)
그의 과거를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는 벽에 액자로 걸린 책이다. 1994년 출판되고 2002년 개정된 그의 소설 『바다 위(Badawi)』다. “거기 있는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베두윈’이란 뜻의 『바다위』는 비참했던 소년의 인생역전 성공담이라기 보다 두 개의 세상 사이에 갇힌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동이 트기 전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잠이 잘 오지 않아서다. “때로는 삶이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스포츠를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술을 마신다. 나는 글을 써야 한다.” 평단의 반응은 좋았고 2003년에는 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 몽펠리에 아카데미에서는 이 책을 지역학교 교과과정에 추천하기도 했다.
“진실한 문학”이라고 아를(Arles)에 본사를 둔 출판사 악드 스워드의 프헝스와즈 니성 이사는 말했다. “그는 인생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보다 깊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똑똑하고, 문학적 성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 정도로 겸손하다.”
알트라드가 이후 출간한 다른 소설 2편은 첫 소설 옆에 나란히 액자로 걸려 있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탐구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관해 물어본다. 사랑에 관한 책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프랑스에는 특별히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특히 아랍계 프랑스인 사이에서 최근 반 유대주의가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진짜 재난이다. 사람이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을 뜻하는데,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프랑스 교포들이 수용해야 할 시각이다. 알트라드를 친구라 생각하는 전직 프랑스 문화부 장관·국방장관인 프랑수아 레오타르는 말했다. “그가 자신의 젊은 날에 멋지게 본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아랍계가 계속 성장한다면, (물론 그렇게 되겠지만) 이는 사막의 자식에게 어떤 한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 KATIA SAVCHUK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다르다. 몽펠리에 럭비 경기장에 가면, 은색 물결무늬 벽을 가로질러 십 수번 이상은 그의 이름이 되풀이 된다. 경기장은 최근 알트라드(와 같은 이름의 회사) 이름으로 재명명됐다. 구단주 전용 박스석에서 알트라드를 만났다. 그의 몸을 단단히 감싼 짙은 남색 코트는 회색 곱슬머리와 잘 어울렸다. 알트라드는 자리에 앉아 1만5000명까지 수용 가능한 관객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데다 이름을 새기는 건 대개 죽었을 때 아닌가.”
구단 인수는 몽펠리에 시민으로서 행한 의무였다. 2011년 몽펠리에 시장은 주민 중 최고 부자에게 구조 신호를 보냈다. 재정난에 빠진 29년 역사의 럭비팀 에호 럭비(Herault Rugby)를 살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럭비 경기라곤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몽펠리에 시민으로 나선 알트라드는 구단을 인수했다. 지금은 럭비 경기를 빠지지 않고 참관한다. 그가 입은 남색 블레이저 위에는 2005년 수여한 프랑스 최고 명예훈장 ‘레종 드뇌르’ 붉은 핀이 더욱 돋보였다.
알트라드는 호라시오 엘저 소설에 자주 나오는 ‘인생역전’ 이야기의 화신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유년 시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회사 알트라드 그룹을 매출 10억 달러 이상의 세계 최고 비계 제조사로 키워냈다. 알트라드는 콘크리트 혼합기에서 손수레까지 다양한 건축 장비를 제공하면서 6%로 추산되는 순수익률을 확보했고, 인수를 통해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25년 가량 꾸준히 매출액과 수익을 성장시킨 결과, 지난 5년간 매출은 2배로 증가했고, 그가 보유한 회사 지분(80%)의 가치는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덕분에 그는 3월 포브스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알트라드에서 제작한 비계는 미국을 비롯한 100여 개 국가의 건축 및 산업 현장에서 사용하고 있다.
파리에서 일어난 언론인 학살 테러 이후, 프랑스는 존재론적 질문에 맞닥뜨렸다. 프랑스 국민은 정확히 누구인가, 복합적 층으로 구성된 이 국가에서 규모가 상당(하고 대부분 가난)한 아랍계 인구를 사회로 통합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시리아 유목민 부족장의 아들
알트라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내막을 알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4살이었을 때 10대 소녀였던 어머니는 병에 걸려 죽었다. 어머니를 강간했던 부족장 아버지는 그와 인연을 끊었다. 알트라드의 유일한 남자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학대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알트라드는 할머니와 함께 텐트에서 살았다. 할머니와 손자는 염소와 양, 낙타를 위해 목초 오아시스를 찾아 비를 쫓아다니는 유목민을 따라다니며 살았다. 할머니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유목민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트라드는 할머니가 잠에서 깨기 전 몰래 텐트를 빠져나가 사막의 모래 언덕을 한 시간 이상 맨발로 건너 학교에 갔다. 교육을 받는 건 할머니의 분노를 견딜 가치가 있었다. 급우들의 끊임 없는 놀림도 상관없었다. 그는 베두인족 사이에서도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본능이었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내가 저주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알았다. 유일한 구원의 기회는 학교였다.”
7살 때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자전거를 줬다. 사막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물건이었다. 기업가 정신이 처음 발휘된 건 이 때다. 그는 다른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빌려줘 번 돈으로 학용품을 샀다.
수년 후, 그는 라카(Raqqa) 근처에 있는 다른 친척 집으로 갔다. 지금은 소위 ‘이슬람 국가’의 본부가 위치한 곳이다. 라카에서 알트라드는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했고, 지역 최우등으로 졸업해 시리아 국비 장학생으로 프랑스 대학에 진학했다.
“특별한 꿈이 있던 건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내게 주어진 최초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만 있었다.”
1969년 알트라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경 사이에 있는 프랑스의 지중해 근방 도시 몽펠리에에 도착했다. 수개월간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지만, 몽펠리에 대학 물리학·수학 강의에서는 교수가 하는 말의 10%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초 파리로 거주를 옮겨 컴퓨터 과학 박사학위를 딸 때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프랑스 여성과 만나 결혼을 할 정도로 프랑스어에 능숙해졌다. 공부하면서 기술 기업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그는 시민권 획득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국영 석유회사에 취직해 아부다비에서 4년간 근무했다. 세금이 낮고 별로 할 일도 없어서 계약이 끝난 1984년에는 수십만 달러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구 3명과 함께 휴대용 컴퓨터를 생산하는 벤처 회사를 설립하고 이를 재빨리 매각했다. 매각으로 60만 달러의 순수익을 챙겼지만, 그 돈으로 뭘 해야 할지는 몰랐다.
부채로 허덕이는 비계 제조사를 인수
“직관적 결정이었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상품이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건설, 정유, 공항 등 모든 분야에서 비계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즉시 비용을 감축했고, 성과보수에 기반을 둔 비용체계를 도입했다. 프랑스 근로자들은 사장이 회사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음을 알고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지난 5년간 번 모든 돈을 투자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사장이 우리를 믿는구나’라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회사는 소폭의 수익을 냈고,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때는 그냥 몸집을 키우는 것이 목표였다.” 그는 콘크리트 혼합기, 건설 장비 등 비계와 같은 고객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연관 분야로 다각화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 불경기가 시작됐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회사는 6개월 만에 매출액 25%가 급감하는 시련을 맞았다. 업계 경험도 없는 시리아 출신 기업가에게 은행은 쉽사리 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기업 재정 상황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알트라드는 사업을 시작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경영난에 처한 회사를 저가에 인수해서 운영 효율성을 높이고 수익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많이 힘든 시기였다”고 그는 말했다. “은행이 나를 믿어주지 않아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2003년 전환점이 왔다. 회사는 단단한 기반 위에 섰고, 21개 자회사에서 1억3000만 달러의 돈이 들어왔다. 이때 업계에서 평판이 아주 좋은 독일 경쟁사 플레탁(Plettac)을 인수할 기회가 왔다. 지금까지 인수 중 최대 규모였다. 플레탁 인수로 알트라드 그룹은 유럽 전체에서 입지를 다지고 산업계약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췄다. 유럽 다른 업체와의 통합도 잇따랐다. 알트라드는 한 해 평균 3건의 인수를 해치웠다. 손실이 난 인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알트라드 그룹 본사는 몽펠리에의 나른한 주택 지역 좁은 골목에 있다. 자신의 진정한 고향으로 본사를 이전하겠다는 CEO의 결심 덕분이다. 알트라드 그룹은 파리 이외 도시에 있는 프랑스 최대 기업 중 하나다. 사무실은 100년의 역사를 가진 알트라드의 개인 저택(‘시골집(Le Cottage)’이라는 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린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수영장이 3개가 있고, 마당에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1대씩 나란히 주차되어 있다. 직원 사무실은 옛날 하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이었고, 알트라드의 사무실은 마구간이었다.
평화로운 전원 풍경 때문인지 고객 100만 명, 직원 7000명의 대기업 본사가 있을 장소로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은 25명밖에 되지 않고, 알트라드는 비서조차 두지 않고 있다. 그는 간결한 체계의 지주사, 반자율적 구조를 가진 자회사처럼 권한을 분산시킨 것이 알트라드 그룹의 성공 원인이라고 말했다. 회사를 인수할 때에는 최소한의 규칙만 적용하고 직원과 기업문화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 원칙이다.
고객 100만 명, 직원 7000명의 대기업
위계질서를 아주 싫어하는 알트라드의 가치관은 605쪽에 달하는 기업 헌장(프랑스어와 영어로 되어 있다)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기업 선언문으로만 보일 때도 있지만, 현실에도 잘 적용되는 중이다. 세계적으로 92개에 달하는 각각의 자회사는 벤처 회사처럼 기민하게 움직이며, 현지 시장을 자세히 파악하고, 다국적 기업이 제공하는 풍부한 현금, 제품, 비용 효율성을 잘 활용하고 있다.
이런 방식이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건 4년 전 프랑스 국영펀드가 이끈 1억 달러의 투자 덕분이었다. 2011년 이후 알트라드 그룹은 22건의 인수를 완료했다. 최대한 세계적 사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카타르와 모로코 기업 등도 인수했다. 다음 목표는 미국이 될지 모른다. 상당한 규모의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미국 시장은 뿌리를 깊이 내린 경쟁자도 많고, 더 저렴한 중국산 비계를 선호해서 다른 곳보다 더 힘들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업공개를 하지는 않겠다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기업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자신의 지분을 모두 매각하고 떠난 옛 파트너 알콕은 “그가 (경영의 자유를) 놓아 버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경영인 알트라드는 말 그대로 투명한 사람이다. 사무실 벽 양면도 천정에서 바닥까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직원들은 출근할 때 사장이 뭘 하는지 볼 수 있다. 햇살은 산호색 벽을 환히 비추고 널찍한 타일 바닥으로 흘러들어온다. 가장자리가 금으로 장식된 검은 가죽 의자는 흡사 왕좌처럼 보인다. 천정에는 커다란 샹들리에가 무겁게 달려 있다. 왕궁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수십 개의 가족사진이 있어서 균형을 잡아준다. 자녀 5명의 사진과 그의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의 사진이다. (아내와는 1995년 이혼했고, 영국계 프랑스인 변호사와 13년간 함께 사는 중이다.)
그의 과거를 알려주는 유일한 표지는 벽에 액자로 걸린 책이다. 1994년 출판되고 2002년 개정된 그의 소설 『바다 위(Badawi)』다. “거기 있는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알트라드는 말했다. ‘베두윈’이란 뜻의 『바다위』는 비참했던 소년의 인생역전 성공담이라기 보다 두 개의 세상 사이에 갇힌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동이 트기 전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잠이 잘 오지 않아서다. “때로는 삶이 힘들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스포츠를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술을 마신다. 나는 글을 써야 한다.” 평단의 반응은 좋았고 2003년에는 문학상을 받았다. 2012년 몽펠리에 아카데미에서는 이 책을 지역학교 교과과정에 추천하기도 했다.
“진실한 문학”이라고 아를(Arles)에 본사를 둔 출판사 악드 스워드의 프헝스와즈 니성 이사는 말했다. “그는 인생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보다 깊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똑똑하고, 문학적 성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알 정도로 겸손하다.”
알트라드가 이후 출간한 다른 소설 2편은 첫 소설 옆에 나란히 액자로 걸려 있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는지 탐구하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관해 물어본다. 사랑에 관한 책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프랑스에는 특별히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이야기다. 특히 아랍계 프랑스인 사이에서 최근 반 유대주의가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양립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진짜 재난이다. 사람이 함께 살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쟁을 뜻하는데,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프랑스 교포들이 수용해야 할 시각이다. 알트라드를 친구라 생각하는 전직 프랑스 문화부 장관·국방장관인 프랑수아 레오타르는 말했다. “그가 자신의 젊은 날에 멋지게 본때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아랍계가 계속 성장한다면, (물론 그렇게 되겠지만) 이는 사막의 자식에게 어떤 한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 KATIA SAVCHUK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포브스 코리아 온라인 서비스는 포브스 본사와의 저작권 계약상 해외 기사의 전문보기가 제공되지 않습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속보]알테오젠 ‘ALT-B4’ 美 물질특허 등록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이데일리
팜이데일리
일간스포츠
MLB 올스타전 신기하네, 홈런 스윙오프 실시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영끌 후폭풍 무서워”…고가 아파트 포기하는 계약자들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미분양에 발목 잡힌 대방이엔씨, 불어난 미수금에 차입 부담 과중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비보존, 비마약성 진통제 본격 판매…5년 내 매출 1000억 정조준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