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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 (105)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미국 정치지형 바꾸는 헤지펀드 개척자

[글로벌 파워 피플 (105)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미국 정치지형 바꾸는 헤지펀드 개척자

조지 소로스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 회장. / 사진:중앙포토
조지 소로스(85)는 헤지펀드의 초창기 개척자인 미국 금융인이다. 활발한 사회 참여와 기부로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정치 전문 블로그 ‘더 픽스’가 선정한 ‘미국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 데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억만장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60억 달러의 재산을 소유한 소로스 회장은 조지 W 부시 공화당 정부의 테러 정책 등에 반대하면서 민주당의 최고액 기부자가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도왔으며, 현재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대선 캠페인 수퍼팩(특별 정치활동위원회)의 공동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조지 소로스는 1979~2011년에 80억 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했다. 그의 기부는 인권, 복지, 교육에 집중됐다. 특히 자신이 태어난 헝가리에 많은 투자를 했다. 아직 공산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굴라시(헝가리 국민음식) 공산주의’라는 말을 들으면서 소련과는 다른 독자적인 경제와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헝가리에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많은 투자와 기부를 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체제 이행이 순조롭고 평화적으로 이뤄지게 노력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199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설립된 중부유럽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에 유럽 사상 최대의 고등 교육 기부금인 8억8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영어로 강의하는 이 국제대학은 동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인재를 길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확산에 기여했다는 평이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30여개국 출신의 교수 305명이 100여개국에서 온 1600명의 학생(박사과정생 410명)을 가르치는 유럽의 명문 국제대학으로 성장했다.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슈바르츠 기외르지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슈바르츠는 성이고 기외르지는 이름이었다. 헝가리에서는 동아시아인처럼 성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 헝가리 태생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도 조국 헝가리에선 리스트 페렌츠로 불린다. 독일식인 프란츠는 헝가리어로 페렌츠다. 소로스의 아버지 티바다르(영어로는 시어도어)는 변호사였고 어머니 에르제베트(영어로 엘리자베스)는 견직물 유통업자 집안 출신이었다. 소로스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소집돼 참전했다가 러시아 전선에서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러시아혁명 와중의 혼란기 속에서 탈출해 헝가리로 돌아왔다. 공산혁명의 비인간성과 잔혹함에 대한 부친의 경험은 이후 아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힐러리 대선 캠페인 수퍼팩의 공동 수장
지난 9월 CNN과의 인터뷰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오른쪽에서 둘째)과 함께 나온 조지 소로스(맨 오른쪽). / 사진:중앙포토
소로스의 부모는 유럽 거주 유대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아슈케나짐) 출신이다. 아슈케나짐은 중세에 독일 서부 라인란트에 거주하던 유대인 집단에서 시작해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등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인구가 800만~1200만으로 추산돼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이룬다. 유럽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 600만명에 이르는 미국 거주 유대인도 대부분 이들이다. 시온주의 운동에 따라 이스라엘로 돌아간 사람도 많아 현재 이스라엘에 300만~400만명이 살고 있다. 이스라엘 인구 800만 중 유대인이 600만이고 아랍인이 170만임을 감안하면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유대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나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인 세파라딤과 함께 유대인의 양 갈래를 이룬다. 이슈케나짐이라는 용어는 중세 히브리어로 독일을 가리키는 ‘아슈케나즈’에서 비롯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도 대부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다.

소로스는 1947년 영국 유학에 나서면서 헝가리를 떠났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 체제가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소로스가 헝가리를 떠난 직후인 1947년 8월 공산당은 1당이 됐으며 1949년 5월 총선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합당한 노동자당이 99.8%의 지지율을 얻었다. 그 결과 같은 8월 공산주의 헌법을 통과시키면서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소로스의 젊은 시절 벌어진 이런 역사적인 사건은 사회활동가로서 소로스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 난민이자 이민자로서 영국 런던에 도착한 소로스는 대다수 유대인처럼 교육을 통해 성공의 사다리에 올랐다. 런던정경대(LSE)에서 철학자 칼포퍼의 제자가 된 그는 철도역에서 짐을 들어주는 포터와 웨이터로 일하며 고학했다. 퀘이커 자선단체로부터 약간의 현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소로스는 은행에서 일하며 1951년 LSE를 졸업했으며 1954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로스는 2006년 한 모임에서 LA타임스의 국제 에디터 앨빈 슈스터로부터 “어떻게 이민자에서 금융인이 됐으며, 언제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학 졸업 뒤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웨일스의 휴양지 해변이나 선물가게에서 팬시용품을 팔기까지 했다. 그때 이런 일만 해서는 제대로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모든 상업은행의 책임자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은 겨우 한두 장 정도 받았지만 마침내 상업은행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은행이 바로 상업은행인 싱거&프렌드랜더다. 중소기업을 상대로 투자은행 역할을 하고 부유층의 금융 자산 관리도 해주는 업체다. 이 회사는 2005년 아이슬랜드 은행인 카우프트힝으로 넘어갔으며 2008년에는 ING그룹의 자회사인 ING다이렉트 소유가 됐다.”
 철학자의 꿈 접고 금융인으로
1954년 싱거&프렌드랜더에 입사해 말단 행원으로 일하던 소로스는 차익거래 담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를 눈여겨 본 동료 행원 로버트 메이어는 소로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미국 뉴욕에서 운영하는 주식중개업체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1956년 뉴욕으로 이주한 그는 1959년까지 주식중개업체인 F.M. 마이어에서 차익거래 담당으로 일했다. 그는 유럽 주식 담당으로 일하며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1951년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가 석탄과 철강 자원의 공동 관리를 위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면서 이뤄진 유럽경제 통합 분위기가 주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ECSC는 1957년 유럽 경제통합을 지향하는 유럽경제공동체(EEC, 공동시장으로도 불림)로 발전했으며 1967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이 추가로 합류해 유럽공동체(EC)를 이뤘다. 이는 1993년 유럽연합(EU)의 모태가 됐다. 초창기 유럽 경제통합 분위기가 젊은 소로스에게 기회를 엿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소로스는 1959년 투자 업체인 워사임으로 옮겨 유럽 주식을 담당했다. 그는 이 회사에 5년간 다니면서 50만 달러를 모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 다음 이 돈을 들고 런던으로 돌아가 철학을 계속 공부해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스승인 칼 포퍼의 영향을 받은 자신의 ‘반사율’ 이론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이 이론을 실물 경제에 적용했다. ‘시장 가치는 상황에 대한 경제학적인 기반뿐만 아니라 참여자의 잘못되기 쉬운 생각에 의해서도 좌우된다’는 주식 격언이 바로 이 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이후 1963년부터 투자은행 안홀드 블라이크뢰더에서 부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1970년 소로스 펀드매니지먼트를 창업해 회장이 됐다. 지금은 세계적인 투자가가 된 짐 로저스, 스탠리드럭컨밀러 등과 함께 일했다. 1973년에는 조세피난처인 네덜란드령 안티과와 케이먼 군도에 퀀텀 펀드를 창립해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퀀텀은 핵물리학 용어인 양자에서 따온 것이다. 소로스 펀드매니지먼트와 퀀텀 펀드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1992년 9월 16일에 벌어진 이른바 ‘블랙 수요일’ 사건이었다. 당시 소로스의 헤지펀드사를 중심으로 여러 헤지펀드가 영국 파운드화를 대량 투매해 파운드화의 가치를 폭락하게 한 사건이다.

영국은 1990년 10월 8일 유럽환율메커니즘(ERM)에 가입했기 때문에 1992년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의 ±6%의 한도 내에서만 변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독일이 1990년 10월 3일 재통일되자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을 마련하고 동독의 화폐를 1:1의 가치로 교환해주기 위해 마르크화를 대량 풀었다. 독일연방은행은 고금리 정책으로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경제를 안정화시킨다. ERM 가입국들은 기준 변동폭 안에서 금리를 최대한 올렸다. 이에 따라 불황이 이어지고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화폐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이탈리아의 리라와 스페인의 페세타는 가치가 폭락했으며, 스웨덴은 화폐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단기 금리를 5배로 올렸다. 버티지 못한 핀란드가 1992년 9월 8일 금리 연동을 포기했다. 영국은 기준 안에서 환율 하락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했다.
 ‘잉글랜드 은행을 부순 남자’
소로스는 이 기회를 노렸다. 100억 달러를 동원해 영국 파운드화를 투매하기 시작했고 다른 헤지펀드도 돈을 들고 달려들었다. 영국 파운드화 환율이 하한선까지 떨어지자 영국 중앙은행은 환율 방어에 나섰다. 헤지펀드들이 투매한 파운드화를 외환 보유액을 총동원해 사들였다. 하지만, 하루에 두 차례나 단기 이자율을 올렸음에도 환율이 계속 떨어지자 잉글랜드 은행은환율 방어를 포기하고 그해 9월 16일 ERM에서 탈퇴했다. 영국 재무부는 검은 수요일에 34억 파운드를 날렸다. 이후 영국 파운드화는 재조정됐다. 이를 통해 소로스는 개인적으로 10억 달러를 벌었다. 세계적인 투자가로서 명성과 ‘잉글랜드 은행을 부순 남자’라는 별명도 함께 얻었다. 하지만, 헤지펀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동시에 생겼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소로스와 유대인들이 그 배후에 있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2006년 소로스를 만난 마하티르는 소로스가 아시아 외환위기에 책임이 없다고 인정했다. 불명예를 지운 소로스는 헤지펀드로 번 돈으로 동유럽의 복구를 돕고 미국 민주당의 재정적인 지원자로 자신의 정치적인 의사를 표현한 힘있는 인물로 역사에 남을 전망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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