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워 피플 (106) 일본 최대 e커머스 업체 -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 일본 전자상거래산업의 선구자
[글로벌 파워 피플 (106) 일본 최대 e커머스 업체 - 라쿠텐의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 일본 전자상거래산업의 선구자
세계가 인터넷산업으로 불황 탈출과 경제 부흥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일본도 인터넷산업 중심의 e비즈니스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하지만, 페이스북 등으로 이를 주도하는 미국에 비해 아직도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일본의 e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고 있는 경영자가 미키타니 히로시(50·三木谷浩史) 라쿠텐 회장이다. 일본 최대 인터넷 상거래 업체인 라쿠텐의 창업자이자 회장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현직 경영인이다. 그는 e비즈니스로 맨손에서 일본 3위의 부호로 올라선 인물이다.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의 2015년 일본 부호 순위에서 87억 달러의 재산으로 3위(세계 151위)를 차지했다. 유니클로의 창업자인 야나이 다다시 회장(66)이 202억 달러로 일본 1위(세계 41위)를 차지했으며 소프트방크의 창업자인 손 마사요시(58)가 141억 달러의 재산으로 2위(세계 75위)에 올랐다. 미키타니 회장의 재산은 10월 105억 달러로 늘었다. 미키타니 회장은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는 재산 순위 세계 23위에 올라 있다. 라쿠텐은 일본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다. 1997년 2월 엠디엠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회사는 그해 5월 ‘라쿠텐 시장 서비스’라는 이름의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시작했다. 1999년 6월 서비스 이름에 맞춰 회사 이름을 라쿠텐으로 바꿨다. 지난해 1만 1800명의 직원을 고용하며 53억 달러의 매출과 4억 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라쿠텐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작해 일본 최대의 e커머스 업체로 성장했으며 2000년 자스닥에 상장했다. 현재 전자상거래는 물론이고 금융업, 통신업, 신용카드·결제 서비스업, 포털 미디어, 여행업, 증권업, 프로스포츠 사업까지 진출했다. 센다이에 본거지를 둔 일본 프로야구 도후쿠 라쿠텐 이글스와 축구 J리그 비셀코베도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현지에서 e북 사업 등을 벌이는 한편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터넷으로 라쿠텐이 파는 일본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전 세계 21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일본 상품을 주문해 받을 수 있다. 일본 경제 부흥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는 알리바바를 통해 중국에 한국 상품을 팔려는 한국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국민은 해외직구로 외국 물품을 사는데 인터넷으로 우리 상품을 전 세계에 파는 거대 e커머스 업체가 없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경쟁력 차원에서 생각해볼 문제다.
주목할 점은 미키타니 회장이 2010년 사단법인 일본신경제 동맹(Japan Association of New Economy, JANE)을 설립해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기반의 콘텐트산업 관련 기업이 참여하는 경제단체로 702개의 회원사를 거느리고 있다. e비즈니스나 IT비즈니스 등 이른바 신산업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촉진, 활성화해 국민생활을 향상 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질적으로는 일본 IT 업계와 일본 정부가 서로 협력하는 단체다. 이 단체를 통해 업계는 정부의 경제 부흥 관련 프로젝트에 협조하고, 일본 정부는 IT 발전정책을 추진한다. 신산업의 발전을 통해 국정을 건실하게 운영하고 지역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내용을 정관에 담고 있다. 사실상 ‘인터넷 사업 보국’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경제단체다.
이 단체는 신경제를 일본 경제 부흥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해왔다. 2013년 4월 이 단체는 도쿄 뉴오타니 호텔에서 신경제세미나를 열었는데 행사 전날의 전야제에 아베 총리가 직접 참석했을 정도다. 게다가 신 경제연맹은 일본 정치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3년 7월에 열렸던 일본 총선에 출마한 정치인 중 8명을 추천 후보로 선정해 발표했다. 미키타니 회장은 2011년 6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업정책을 주장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에 반발해 탈퇴했다. 이를 통해 그는 IT와 e비즈니스 중심의 미래 산업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미키타니 회장의 성장 전략은 인수·합병(M&A)이다. 2000년 상장 이후 더욱 공격적인 M&A에 나서 오늘날 거대 라쿠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포털사이트인 인포시크와 중고품 판매·매입 서비스인 이지시크 운영사인 비즈시크를 손에 넣었다. 무료 홈페이지 서비스를 제공하던 훕스, 축하 카드 서비스 업체인 와이낫, 골프장 예약 서비스 ‘골프포트’를 제공하는 메디오포트도 인수했다. 2002년에는 라이코스 재팬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이듬해 라쿠텐의 자회사인 인포시크와 합병했다.
미키타니의 M&A는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 포브스에 따르면 미키타니 회장은 글로벌 비즈니스 분야에서 헌터, 즉 사냥꾼으로 불린다. 미키타니 회장은 지난해 1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의 온라인 리베이트 업체인 이베이츠(Ebates)를 인수했다. 1998년 창업해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이베이츠는 메이시 백화점이나 가정용품 유통 업체인 홈데포 같은 데서 물품을 구입하면 나중에 캐시백을 해주는 업체다. 전 세계 1800개가 넘는 제휴 업체를 상대로 캐시백과 쿠폰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들이 이 회사를 통해 쇼핑한 액수는 연간 22억 달러가 넘는다.
올해 3월에는 4억1000만 달러를 들여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전자서적 업체인 오버드라이브(OverDrive)를 사들였다. 놀라운 사실은 같은 달 미국 교통 네트워크 업체인 리프트(Lyft)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미키타니 회장의 놀라운 자금 동원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 통해 리프트 주식 12%를 인수했다. 리프트는 미국 65개 도시에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통근자들이 서로 카풀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앞으로 미국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으로 있는 야심만만한 기업이다. 미키타니 회장은 지난 6월 이 회사의 이사를 맡았다.
미키타니 회장은 오뚝이 같은 인물이다. 그의 성장과 창업 과정은 많은 일본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1965년 일본 간사이 지방의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베 상과대학 교수로 금융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미키타니 회장은 어려서 대학교원주택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예일대 연구원으로 도미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가서 2년 이상 거주했다. 이때 배운 영어와 글로벌 감각은 미키타니가 창업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데 평생 도움이 됐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해외 생활은 그에게 부담도 됐다. 귀국 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귀국 부적응 증세’가 나타났다. 일본식 스파르타식 교육을 견디지 못한 그는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겪은 끝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정성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갈 수 있었던 그는 지독한 노력으로 다시 일본 학교에 적응하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키타니는 이 절치부심의 청소년기에 대해 “용수철처럼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튀어올랐다”라고 표현했다. 고베 명문인 아카시 고교에 진학한 그는 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 간사이 지역의 주니어부 16강까지 올랐다. 테니스를 통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덕분에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건전하고 활기찬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재수를 거쳐 1984년 도쿄의 히토츠바시대 상학부에 진학했다. 도쿄상과대학으로 출발한 이 대학은 도쿄대, 교토대와 더불어 일본의 명문 국립대 중 하나다. 대학에서도 그는 테니스부에 가입해 주장까지 지냈다. 대학 재학시 금융업에 관심이 많아 ‘기업의 자본조달과 자본의 최적구성’이라는 논문을 썼다. 대학을 마치고 일본흥업은행(인수합병을 통해 현재 미즈호 은행으로 바뀜)에 입사했다. 나고야 지점을 거쳐 본점에서 외환업무를 맡았다. 은행에서도 테니스부를 이끌며 은행대항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은행에서 그는 전도양양한 젊은 행원이었다.
1991년 결혼한 직후 회사 지원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 유학 길에 올랐다. 회사에서 보내준 연수이지만 MBA 과정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창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진취적인 분위기는 일본의 경제 엘리트가 창업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하버드에서 국제 M&A를 중점적으로 파고들었던 그는 1993년 MBA 과정을 은행에 복귀한 뒤 기업금융개발부에서 M&A업무를 맡았다. 당시 고객 중 소프트방크 창업자 손마사요시와 유통 업체 츠타야 창업자인 마쓰다 무네아키 등이 있었다.
1995년 일본 한신고베대지진으로 고향인 고베에 살던 인생의 멘토 숙부와 숙모가 세상을 떠난 일도 그의 인생관에 영향을 줬다. 한번뿐인 인생, 보장된 삶과 익숙한 편안함에 만족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미키타니는 출세가 보장된 금융인의 길을 포기하고 1995년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라쿠텐을 세운 건 아니었다. 일단 자신의 학식과 경험을 자산 삼아 컨설턴트 업체인 크림슨 그룹을 공동 창업했다.
미키타니가 자신의 진짜 꿈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97년 2월 이었다. 그동안 크림슨 그룹에서 벌어들인 6000만엔을 들고 창업한 것이다. 자금 마련과 함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준비도 충분히 한 다음 창업한 것이다. 일본 e비즈니스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스피드 경영을 중시했다. 고객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통해 회사 비즈니스의 하나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2002년 미국 경제잡지 포춘에 젊은 부호 명단 6위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3000억엔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때였다. 2008년 처음으로 포브스 일본인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38억 달러의 재산으로 8위에 오른 그는 2010년 47억 달러로 6위, 2011년 56억 달러로 5위에 올랐으며 올해 3위까지 이르렀다. 눈에 띄는 것이 미키타니 회장이 다른 일본 경영인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작은 집이 미덕인 일본에서 도쿄 중심가 시부야에 2000만 달러를 들여 저택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또 다른 저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라쿠텐은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인터넷은 전 세계로 통하기 때문에 비즈니스 영역은 당연히 글로벌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 기업이 일반 비즈니스는 물론 회사 업무도 영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도쿄 필하모니교향악단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그의 신선하고 유연하며 문화중심적인 발상이 거대 e비즈니스 그룹인 라쿠텐을 이렇게 키운 원동력이 됐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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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위, 세계 151위의 부호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 적극적으로 진출해 현지에서 e북 사업 등을 벌이는 한편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인터넷으로 라쿠텐이 파는 일본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전 세계 21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일본 상품을 주문해 받을 수 있다. 일본 경제 부흥에 정치적 생명을 걸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가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이는 알리바바를 통해 중국에 한국 상품을 팔려는 한국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국민은 해외직구로 외국 물품을 사는데 인터넷으로 우리 상품을 전 세계에 파는 거대 e커머스 업체가 없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경쟁력 차원에서 생각해볼 문제다.
주목할 점은 미키타니 회장이 2010년 사단법인 일본신경제 동맹(Japan Association of New Economy, JANE)을 설립해 지금까지 대표를 맡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 기반의 콘텐트산업 관련 기업이 참여하는 경제단체로 702개의 회원사를 거느리고 있다. e비즈니스나 IT비즈니스 등 이른바 신산업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촉진, 활성화해 국민생활을 향상 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질적으로는 일본 IT 업계와 일본 정부가 서로 협력하는 단체다. 이 단체를 통해 업계는 정부의 경제 부흥 관련 프로젝트에 협조하고, 일본 정부는 IT 발전정책을 추진한다. 신산업의 발전을 통해 국정을 건실하게 운영하고 지역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내용을 정관에 담고 있다. 사실상 ‘인터넷 사업 보국’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경제단체다.
이 단체는 신경제를 일본 경제 부흥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해왔다. 2013년 4월 이 단체는 도쿄 뉴오타니 호텔에서 신경제세미나를 열었는데 행사 전날의 전야제에 아베 총리가 직접 참석했을 정도다. 게다가 신 경제연맹은 일본 정치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13년 7월에 열렸던 일본 총선에 출마한 정치인 중 8명을 추천 후보로 선정해 발표했다. 미키타니 회장은 2011년 6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업정책을 주장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에 반발해 탈퇴했다. 이를 통해 그는 IT와 e비즈니스 중심의 미래 산업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전방위적 M&A로 회사 키워
미키타니의 M&A는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 포브스에 따르면 미키타니 회장은 글로벌 비즈니스 분야에서 헌터, 즉 사냥꾼으로 불린다. 미키타니 회장은 지난해 1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의 온라인 리베이트 업체인 이베이츠(Ebates)를 인수했다. 1998년 창업해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이베이츠는 메이시 백화점이나 가정용품 유통 업체인 홈데포 같은 데서 물품을 구입하면 나중에 캐시백을 해주는 업체다. 전 세계 1800개가 넘는 제휴 업체를 상대로 캐시백과 쿠폰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들이 이 회사를 통해 쇼핑한 액수는 연간 22억 달러가 넘는다.
올해 3월에는 4억1000만 달러를 들여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전자서적 업체인 오버드라이브(OverDrive)를 사들였다. 놀라운 사실은 같은 달 미국 교통 네트워크 업체인 리프트(Lyft)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는 사실이다. 미키타니 회장의 놀라운 자금 동원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를 통해 리프트 주식 12%를 인수했다. 리프트는 미국 65개 도시에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통근자들이 서로 카풀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한다. 앞으로 미국 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으로 있는 야심만만한 기업이다. 미키타니 회장은 지난 6월 이 회사의 이사를 맡았다.
미키타니 회장은 오뚝이 같은 인물이다. 그의 성장과 창업 과정은 많은 일본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는 1965년 일본 간사이 지방의 효고현 고베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베 상과대학 교수로 금융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미키타니 회장은 어려서 대학교원주택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예일대 연구원으로 도미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가서 2년 이상 거주했다. 이때 배운 영어와 글로벌 감각은 미키타니가 창업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데 평생 도움이 됐다.
하지만 청소년기의 해외 생활은 그에게 부담도 됐다. 귀국 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귀국 부적응 증세’가 나타났다. 일본식 스파르타식 교육을 견디지 못한 그는 극심한 노이로제 증상을 겪은 끝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정성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갈 수 있었던 그는 지독한 노력으로 다시 일본 학교에 적응하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 나중에 미키타니는 이 절치부심의 청소년기에 대해 “용수철처럼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다시 튀어올랐다”라고 표현했다. 고베 명문인 아카시 고교에 진학한 그는 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 간사이 지역의 주니어부 16강까지 올랐다. 테니스를 통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덕분에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건전하고 활기찬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고교 졸업 후 재수를 거쳐 1984년 도쿄의 히토츠바시대 상학부에 진학했다. 도쿄상과대학으로 출발한 이 대학은 도쿄대, 교토대와 더불어 일본의 명문 국립대 중 하나다. 대학에서도 그는 테니스부에 가입해 주장까지 지냈다. 대학 재학시 금융업에 관심이 많아 ‘기업의 자본조달과 자본의 최적구성’이라는 논문을 썼다. 대학을 마치고 일본흥업은행(인수합병을 통해 현재 미즈호 은행으로 바뀜)에 입사했다. 나고야 지점을 거쳐 본점에서 외환업무를 맡았다. 은행에서도 테니스부를 이끌며 은행대항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은행에서 그는 전도양양한 젊은 행원이었다.
1991년 결혼한 직후 회사 지원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 유학 길에 올랐다. 회사에서 보내준 연수이지만 MBA 과정을 공부하면서 처음으로 창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진취적인 분위기는 일본의 경제 엘리트가 창업의 꿈을 꾸게 만들었다. 하버드에서 국제 M&A를 중점적으로 파고들었던 그는 1993년 MBA 과정을 은행에 복귀한 뒤 기업금융개발부에서 M&A업무를 맡았다. 당시 고객 중 소프트방크 창업자 손마사요시와 유통 업체 츠타야 창업자인 마쓰다 무네아키 등이 있었다.
1995년 일본 한신고베대지진으로 고향인 고베에 살던 인생의 멘토 숙부와 숙모가 세상을 떠난 일도 그의 인생관에 영향을 줬다. 한번뿐인 인생, 보장된 삶과 익숙한 편안함에 만족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미키타니는 출세가 보장된 금융인의 길을 포기하고 1995년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라쿠텐을 세운 건 아니었다. 일단 자신의 학식과 경험을 자산 삼아 컨설턴트 업체인 크림슨 그룹을 공동 창업했다.
미키타니가 자신의 진짜 꿈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97년 2월 이었다. 그동안 크림슨 그룹에서 벌어들인 6000만엔을 들고 창업한 것이다. 자금 마련과 함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준비도 충분히 한 다음 창업한 것이다. 일본 e비즈니스의 선두주자로서 그는 스피드 경영을 중시했다. 고객 트렌드를 빠르게 파악해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통해 회사 비즈니스의 하나로 자리잡게 하는 것이다. 2002년 미국 경제잡지 포춘에 젊은 부호 명단 6위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3000억엔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때였다. 2008년 처음으로 포브스 일본인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38억 달러의 재산으로 8위에 오른 그는 2010년 47억 달러로 6위, 2011년 56억 달러로 5위에 올랐으며 올해 3위까지 이르렀다.
안정된 금융인의 길 포기하고 창업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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