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매년 생산되지도 않고, 오래 기다렸다 마셔야 하며, 병당 수십 만원을 호가한다. 그럼에도 그 진면목을 경험한 와인애호가들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향해 길을 떠났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위치한 몬탈치노(Montalcino)는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전통 음식과 훌륭한 와인이 생산되는 흥미로운 언덕 마을이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2시간을 달리면, 해발 고도 500m에 위치한 몬탈치노가 나온다. 시원스레 뻗은 사이프러스 나무 길, 굽이치는 수많은 언덕과 패치워크 같은 포도원이 눈에 들어온다. 몬탈치노의 새벽, 검푸른 하늘에선 별이 쏟아지고, 숨쉬는 공기는 달콤하다. 언덕을 뒤덮는 짙은 안개는 하루에도 여러 번 밀물과 썰물처럼 일렁인다. 이 안개 사이로 보이는 몬탈치노의 일출과 일몰은 인간이 볼 수 있는 모든 빛으로 물들어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른 아침 산책길엔 멋진 가죽 자켓을 입고 출근 하는 와인생산자와 새벽 안개가 걷히는 장관을 보며 커피를 마시는 여행자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제우스의 피’라 불리는 산지오베제(Sangiovese)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레드 품종이다. 이 품종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자라며, 다양한 토양과 미세 기후에 맞춰 진화한 결과 수많은 변종을 만들었다. 몬탈치노에서는 산지오베제 그로쏘(Sangiovese Grosso)가 자라며, 유난히 포도 알이 크고 갈색을 띠어 이곳 사람들은 브루넬로(Brunello)라 부른다. 바로 이 브루넬로 100%로 만든 와인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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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넬로 100%로 만든 최상급 명품
카스텔로 반피의 자이언트 보티.브루넬로는 부르고뉴 피노누아 만큼 재배가 까다롭다. 하지만, 자신이 자란 환경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훌륭한 향과 맛을 낸다. 이런 최상의 모습을 얻기 위해 와인생산자들은 너무 춥지도 또 너무 덥지도 않아 브루넬노가 완벽하게 익은 해에만 와인을 만든다. 실제로 브루넬노 디 몬탈치노는 지난 20년 간 단 8개의 빈티지만 생산됐다. 몬탈치노의 와인생산자들은 농사가 잘 된 해의 브루넬로를 ‘몬탈치노의 프리마 돈나’에, 그 반대일 때는 ‘이상한 야수’에 비유했다.
브루넬로는 와인 양조, 특히 숙성 과정에 많은 공을 들인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은 18~24개월간 오크 통에서 숙성된 뒤 출시된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규정 상 최소 2년 오크 통에서 숙성된 뒤, 병입 후 최소 4개월 숙성을 거친 뒤 출시된다. 따라서, 대부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수확 년도에서 최소 5년째 되는 해 1월부터 와인 시장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즉, 2016년에 양조된 와인이라면, 2021년 1월부터 구입이 가능하다. 이렇게 긴 숙성을 하면, 브루넬로가 지닌 강한 떫은 맛과 산미가 부드러워져서 브루넬로의 참 맛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와인생산자들은 와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법적으로 정한 기간보다 훨씬 긴 4년 동안 와인을 오크 통에서 숙성한다.
출시 직후 바로 마시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체리와 딸기, 말린 꽃잎으로 만든 포푸리 향이 가득하며, 산미와 떫은 맛이 상당히 느껴진다. 이 산미와 떫은 맛은 와인이 수십 년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장기 숙성 잠재력의 밑바탕이 된다. 대부분의 와인애호가들은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수확 년도에서 10년 이상 보관했다가 마신다. 오랜 숙성을 거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말린 무화과와 체리, 헤이즐넛 등의 향을 낸다. 입에서는 다크초콜릿을 녹이는 듯 부드러워진 떫은 맛과 둥글려진 산미를 느낄 수 있다. 한 잔을 비울 때마다 길게 이어지는 여운까지 와인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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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넬로를 세상에 알린 카스텔로 반피
비스코티와 사과 파이에 곁들인 콜도르치아 모스카델로 와인.몬탈치노 도심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하는 카스텔로 반피(Castello Banfi)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데님 자켓을 입고 아이패드를 손에 든 85세 존 마리아니(John Mariani)가 바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바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전세계에 알린 주인공이다. 반피 와이너리는 몬탈치노에서 가장 큰 포도원이고, 와인 생산량도 최고다. 반피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전세계 85개국에 와인을 수출되고 있으며, 한국은 중국을 제치고 아시아 최대 시장이다.
존 마리아니씨는 1978년부터 1983년까지 밀라노 대학과 함께 브루넬로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한 품종인 줄 알았던 브루넬로가 몬탈치노에서만 수백 종으로 구별되며, 이 중 12개 변종이 몬탈치노에서 최상의 결과를 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저명한 와인연구자들과 머리를 맞대어 와인 양조 기술과 오크 숙성법도 발전시켰다. 그 모든 연구 결과를 지역 와인생산자들과 공유하고 그들이 이를 적용하는 데 도움을 주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양조장과 와인 저장고를 둘러봤다. 마리아니씨는 자랑스런 눈빛으로 사람 키보다 큰 한 오크 통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반피는 프랑스산 오크 통에서 2년 간 와인을 숙성 한 뒤 이 자이언트 보티(Giant Botti)로 옮겨 다시 2년을 숙성해요. 이 오크 통은 크기가 커서 와인과 접하는 면적이 적어 와인에 지나친 오크 풍미를 주지 않고, 브루넬로 본연의 모습을 담을 수 있게 하지요.” 반피 와이너리에서는 하루 두 번씩 양조장과 와인저장고를 물청소한다. 두통 유발 물질을 만드는 미생물의 성장을 막아주고 오크 통이 건조해지지 않도록 와인 저장고의 습도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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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불이 남작의 와이너리, 콜도르치아
카스텔로 반피를 시작한 존 마리아니.반피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라 타베르나(La Taverna)에 도착하자 존의 아내 파멜라 마리아니(Pamela Mariani)가 고운 미소를 띠며 맞이한다. 따뜻하고 명랑한 그녀는 소르본대학에서 존을 만났고, 곧 결혼 50주년을 축하할 예정이라고 했다. 셰프와 의견을 나누더니 곧바로 반피 와인과 어울리는 메뉴를 내놓았다. 새우, 시금치, 그리고 리코타 치즈를 넣은 라비올리는 고소하며 진한 풍미를 보여줬다. 제철을 맞아 향이 진한 포르치니 버섯(Porcini Mushroom)을 곁들인 비프 필레는 스파이시하며, 감칠맛과 개운한 산미를 지닌 포지오 알레 무라(Poggio Alle Mura) 2011년 산과 훌륭한 조화를 이뤘다. 함께 식사를 하며 존 마리아니에게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고 생각하는 지 물었다. “와인은 음식이에요. 전 식사 하는 동안 가장 빨리 줄어드는 와인이 최고라고 생각해요.”라고 답했다. 반피의 식탁에선 음식과 와인에 곁들인 올리브 오일과 12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도 탁월한 맛과 향을 보여줬다. 모두 반피에서 직접 만든 것들이다.
몬탈치노 남쪽으로 이동해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발 도르치아(Val d’Orcia)에 도착했다. 500살이 훌쩍 넘은 사이프러스 나무 길 사이로 들어가니 몬탈치노에서 3번째로 오래된 와이너리인 콜도르치아(Col d’Orcia)가 보인다. 흰 수염이 멋진 프란체스코 마로네 친자노(Francesco Marone Cinzano) 백작이 인사를 건넨다. 1975년 콜도르치아를 인수한 친자노 백작은 담배와 밀을 뽑고 토양에 더욱 적합한 포도를 심었다. 그의 이러한 결단은 ‘몬탈치노에 행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와인전문가들로부터 평가 받고 있다. 콜도르치아는 지금도 지역의 리더로서 꾸준한 품질 향상을 거듭하고 있으며, 유기농 인증을 받는 등 더 높은 품질 기준을 정립하고 있다. 몬탈치노의 270개 와이너리 중 유기농 인증을 받은 곳은 14개로 드문 편이다.
콜도르치아의 전통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직접 재배한 식재료들을 가지고 만든다고 진자노 백작은 설명했다. 돼지 간과 다진 베이컨을 돼지 창자로 감싸 튀긴 짭짤한 돼지간 요리에 콜도르치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Col d’Orcia Brunello di Montalcino) 1995년 산을 곁들였다. 20년 이상 숙성된 와인은 감초, 미네랄, 검붉은 과실, 무두질이 잘 된 가죽 등 복합적인 향에 아주 부드러운 맛을 냈다. 헤이즐넛과 피스타치오가 든 비스코티(Biscotti)엔 모스카델로 디 몬탈치노(Moscadello di Montalcino) 2012년 산을 곁들였다. 친자노 백작은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모스카델로로 만든 달콤한 와인은 과거 수도회에서 많이 사용했어요.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배급되기도 했었죠.”라고 말했다. 와인은 말린 망고와 살구 풍미가 가득하며,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탁월해 식후 한잔 즐기기에 좋았다.
몬탈치노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면, 참나무에 둘러 쌓여 요새처럼 보이는 성, 카스텔로 로미토리오(Castello Romitorio)가 나온다. 이곳은 피렌체(Firenze)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산드로 키아(Sandro Chia)가 1984년 인수한 와이너리다. 와이너리 측에 따르면, 산드로 키아는 ‘예술과 와인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표현의 도구’이며, 예술과 와인 모두 ‘손으로 작업’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와이너리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카스텔로 반피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와인들.카스텔로 로미토리오는 포도원, 시음 공간, 심지어 양조장과 와인저장고를 산드로 키아의 작품들로 멋지게 꾸몄다. 와인저장고에 들어서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빨강, 초록, 파랑 물감으로 그린 수많은 얼굴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언뜻 보면 무심하게 그린 듯 하지만, 얼굴마다 표정이 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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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승화한 카스텔로 로미토리오
몬탈치노 도시 중심 모습. 걸어서 한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카스텔로 로미토리오에서 생산되는 모든 와인은 산드로 키아가 그린 그림으로 레이블을 입힌다. 와인 병을 손에 쥐면, 마치 작품을 얻은 듯한 느낌이다. 이 와이너리의 최상급 와인 카스텔로 로미토리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필로 디 세타(Castello Romitorio Brunello di Montalcino Filo di Seta) 2010년 산은 매혹적인 체리 향과 실크처럼 부드러운 타닌을 지닌 와인이다. ‘비단 실’이라는 의미의 와이너리 근처 개울가 포도원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단일 포도원 와인으로 2010년 산은 단 3000병 생산됐다. 그 윗등급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리제르바 2010년은 탁월한 미네랄과 넘실대는 붉은 체리의 풍미가 좋다. 리제르바(Riserva)는 유난히 농사가 잘 된 해에만 생산되는 와인으로 더 긴 시간 숙성된다.
팁 하나. 몬탈치노는 사냥 고기 요리가 발달했다. 오스테리아 디 포르타 알 카세로(Osteria di Porta al Cassero)는 그 중 멧돼지 요리 전문 레스토랑이다. 만나는 와인생산자들마다 이곳을 적극 추천할 정도로 명소다.
- 글·사진 정수지 와인21닷컴 와인 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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