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의 영화, 지나치게 감상적인 원작 소설의 한계 못 벗어나 외딴 섬의 등대지기로 자원한 참전용사 톰 (마이클 패스벤더)은 이사벨(알리샤 비칸데르)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른다.멜로드라마는 좋은 평가를 못 받는다. 평론가들은 어떤 영화에 대해 ‘멜로드라마로 전락했다’든가 ‘감상으로 침몰했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과거 할리우드의 일부 감독들에게는 멜로드라마가 한 차원 더 높은 뭔가를 의미하던 때도 있었다. 1950년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 영화를 이끈 더글라스 서크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요즘 대런 아로노프스키, 데이비드 핀처 같은 감독들은 여동생의 인형을 해코지하는 10대 소년처럼 ‘감정적인 톤’ 따위는 무시한다. 그들의 영화는 ‘바비 인형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경향은 (감독의) 미숙함 또는 소심함으로 비쳐질 수 있다. 미학적인 과감함을 가장한 감정 표현의 두려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따라서 ‘블루 발렌타인’과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 같은 훌륭한 인디 영화로 선댄스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이 멜로드라마에 도전했다는 소식은 매우 반가웠다. M. L. 스테드먼의 시대극 베스트셀러 소설 ‘바다 사이 등대(The Light Between Oceans)’를 원작으로 한 ‘파도가 지나간 자리’(국내 개봉 3월 8일)는 호주 서부 해안의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톰(마이클 패스벤더)은 그 섬의 등대지기로 자원한다.
그 일자리를 얻을 때 톰은 “사방 160㎞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당신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섬뜩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로 “서부전선보다 더 험하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 등대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피아노 아르페지오처럼 거칠고 격렬하면서도 아름답다. 톰은 그런 등대를 상대로 어느 쪽이 더 접근하기 어려운가 경쟁이라도 하듯 까칠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등대가 이겼다. 톰은 아름다운 여인 이사벨(알리샤 비칸데르)과 사랑에 빠진다. 활짝 핀 꽃처럼 화사한 미모를 자랑하는 비칸데르는 상대 배우인 패스벤더 옆에서 한층 더 빛난다. 이사벨의 조심스런 손짓과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듯 싶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는 미소에서 이 생기 넘치는 여인이 자제심으로 똘똘 뭉친 톰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톰은 이사벨을 등대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만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사벨이 아기를 두 번이나 유산하면서 슬픔이 닥친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부부는 바닷가로 밀려온 배 안에서 남자의 시신과 여자 아기 한 명을 발견한다. 이사벨은 톰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아기를 키우겠다고 고집한다. “이 애가 우리 아기가 아니라는 걸 아무도 모를 거예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여기서부터 이들의 행복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대본과 영화의 나머지 부분도 함께 와해된다. 이처럼 플롯의 개연성이 아니라 괴로움에 겨운 여주인공의 집착과 격렬한 감정이 영화를 이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나 ‘검은 수선화’(1947) 등이 그런 예다.
시엔프랜스 감독은 영상문법(visual grammar)에 의존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사벨의 첫 번째 유산은 폭풍 속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등대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힘 없이 자갈과 풀을 손으로 훑는다. 영화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오래된 기법이다. 그 슬픔이 너무도 커서 이사벨은 업둥이를 발견했을 때 이성을 잃고 그냥 키우겠다고 고집한다. 이렇게 해서 도덕적 갈등은 톰의 몫이 된다. 패스벤더는 조용히 불길한 앞날을 내다보는 연기를 펼친다. 말하자면 ‘맥베스’에서 사악한 부인이 빠진 솔로 맥베스 같다고 할까?
예상대로 아기의 진짜 어머니(레이철 와이즈)가 나타난다. 와이즈는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인상 깊은 연기로 이 영화의 도덕적 음모에 결정타를 날린다. 비칸데르의 변화무쌍한 심리상태가 영화의 전반부를 이끌고 패스벤더의 앞날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후반부를 인도한다면 마지막 대목에서 눈길을 잡아 끄는 건 와이즈가 연기하는 한나다. 두 어머니의 양육권 다툼에서 아이에 대한 비칸데르의 집착은 극적으로 약화한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에서는 더스틴 호프먼이 어린 아들에게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어주는 장면이 수없이 나온다. 하지만 비칸데르와 업둥이 딸의 유대를 보여주는 부분은 아기 침대를 배경으로 한 짤막한 장면과 소풍 대목이 전부다. 그렇게 잠깐 스쳐 지나가듯 등장했을 뿐인데도 그 아이(플로렌스 클레이)가 우리의 마음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이유는 뭘까? 클레이는 아역 배우계의 베티 데이비스라고 불릴 만하다.
난 이 영화가 스트라디바리우스 같은 깊은 감동을 전해주길 원했지만 아쉽게도 내 마음의 한구석을 약간 건드렸을 뿐이다. 스테드먼의 원작은 시엔프랜스 감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싸구려 멜로였다. 시엔프랜스 감독은 훌륭한 영화촬영술과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들로 그 작품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 톰 숀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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