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4) | 공민왕과 신돈] 무자격 참모의 전횡, 국정 문란 불러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4) | 공민왕과 신돈] 무자격 참모의 전횡, 국정 문란 불러
공민왕, 비선 실세 신돈 발탁해 무한 권한 부여 … 권력은 자격과 책임 병행돼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1369년(공민왕 18) 여름, 온 나라에 한재(旱災)가 들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명덕태후는 문안을 온 아들 공민왕(恭愍王, 1330~1374년)을 엄히 꾸짖었다. “왕께서는 하늘이 가뭄을 내린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작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굶어 죽었는데 금년에 또 크게 가물었습니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으니 왕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임금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어찌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십니까? 어찌 토목 공사를 일으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십니까? 왕께서 원자(元子)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혹시라도 왕께서 임금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며 충혜왕의 무도함을 원망하였습니다. 나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충혜왕 때에는 해마다 거듭 풍년이 들었고 사람을 죽인 일도 적었습니다. 어이하여 지금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왕께서 나이가 어리지 않으신데 나라의 대권을 다른 사람의 손에 빌려주고 계신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여기서 명덕태후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것.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 것. 셋째, 임금으로서의 권한과 역할을 신하에게 위임한 것.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 공민왕은 승려 신돈(辛旽, 생년 미상~1371년)에게 전권을 넘기고 국사를 방임한 채 부인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윗사람이 자신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은 아니다. 윗사람이 정상적으로 집무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대통령이 각 부 장관에게 인사권을 이양하듯 권한을 적절히 넘겨줌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임받은 권한이나 대행한 권력은 정당성을 갖출 수가 없다. 더욱이 유고 상황이 아닌데도 함부로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책임정치가 붕괴하고 지휘계통이 혼란에 빠진다.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권력 남용과 방종으로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공민왕과 신돈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1365년(공민왕 14년) 신돈을 임금의 고문으로 삼아 정계에 등장시켰는데, 그 이전의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고려사 열전]에 “공민왕의 꿈에 어떤 사람이 칼을 뽑아 임금을 찔러 죽이려고 하니 한 승려가 나타나 구해주었다. 다음날 태후를 뵈었을 때 마침 김원명이 신돈을 태후에게 알현시켰는데, 그의 생김이 꿈에서 본 승려와 매우 닮았다. 기이하게 여긴 왕이 대화를 나누어보니 총명하여 사리분별이 좋았고, 스스로 도를 깨달았다고 말하며 큰소리를 쳤는데 모두 왕의 뜻에 부합했다. 왕이 평소 부처를 믿는데다가 꿈에 미혹돼 이때부터 여러 차례 은밀히 궁궐로 불러들였다… 왕을 뵌 다음부터 신돈은 거짓으로 자신을 꾸미는 데 힘써서 행색을 검소하게 하고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항상 해진 장삼 한 벌만 입으니 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 이승경이 그것을 보고 ‘나라를 어지럽힐 자가 반드시 이 중놈일 것’이라 했고, 정세운은 그를 요망한 승려라고 여겨 죽이고자 했는데 왕이 은밀히 피신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봤을 때 신돈은 최소한 6년 전에 공민왕과 만났고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비선 자문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을 비판한 이승경이 죽은 해가 1360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공민왕은 1365년 12월 신돈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이라는 거창한 공신 칭호를 내리고 정1품 품계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최고의결기관의 장인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군부와 감찰기관을 함께 총괄하는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불교 교단을 관장하는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천문지리와 역수(曆數)의 책임자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의 직함을 겸직하게 했다. 정치·행정·군사· 감찰·종교를 모두 책임지게 한 것으로 왕이나 다름없는 대권을 쥐여준 것이다.
이러한 신돈의 발탁은 신하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그가 공직 경험이 없는데다가 능력을 검증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승려가 나라의 행정수반을 맡은 것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뜬금 없이 나타난 승려 하나가 하루아침에 왕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니 위태롭기 그지없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요지부동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이야말로 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얽히고 설킨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고려를 전면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구질서에 물들지 않고 기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따라서 “세속에 떨어져 홀로 선 사람을 얻어 그를 크게 사용하면 구습을 혁파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의 선택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것은 우선 신돈의 권위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품계와 지위를 받긴 했지만 절차와 관행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는 승복을 끌어내지 못했다. 신돈이 훌륭한 정책을 시행하더라도 자격이 없는 자가 임금 노릇을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신돈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최영을 숙청하고 인품과 능력이 뛰어났던 유숙을 교살하면서 반감만 샀다.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이제현, 경복흥, 이공수 등의 명망가와도 대립했는데, 조정 내부의 건전한 세력까지 모두 배척함으로써 개혁의 추동력을 상실해버렸다.
공민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방임으로 일관한다. 만약 공민왕이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가운데 개혁의 추진 실무를 신돈에게 맡긴 것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신돈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이는 조정의 혼란과 함께 신돈의 오만을 낳게 된다. 위임받은 권력을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양 여기게 된 것이다. 신돈이 분수를 잃어버린 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그는 임금과 나란히 앉아 음식상을 받았으며 의복과 장신구가 “모두 왕과 똑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능행에 갔을 때는 임금과 백관이 모두 절하는데도 그만이 홀로 선 채로 절을 하지 않았다. 또한 중앙 뿐 아니라 지방까지 수중에 넣기 위해 자신을 5도 사심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강요했고, 충주로의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람한 행동들이 쌓여 결국 공민왕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이다.
무릇 권력은 자격과 책임이 병행될 때 비로소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다. 공민왕은 신하인 신돈에게 왕의 권한을 넘김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방기했을 뿐 아니라 정치질서의 문란을 가져왔다. 크나큰 권력에 취한 신돈이 점점 방종했음에도 이를 적절히 통제하지 않았다. 보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참모에게 맡겨버릴 때, 그리고 참모에게 위임한 권한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을 때, 얼마나 큰 폐해가 야기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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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1369년(공민왕 18) 여름, 온 나라에 한재(旱災)가 들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명덕태후는 문안을 온 아들 공민왕(恭愍王, 1330~1374년)을 엄히 꾸짖었다. “왕께서는 하늘이 가뭄을 내린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작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이 굶어 죽었는데 금년에 또 크게 가물었습니다.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가 없으니 왕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임금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어찌 신하에게 정사를 맡기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십니까? 어찌 토목 공사를 일으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십니까? 왕께서 원자(元子)가 되었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혹시라도 왕께서 임금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며 충혜왕의 무도함을 원망하였습니다. 나 또한 그랬습니다. 그러나 충혜왕 때에는 해마다 거듭 풍년이 들었고 사람을 죽인 일도 적었습니다. 어이하여 지금은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왕께서 나이가 어리지 않으신데 나라의 대권을 다른 사람의 손에 빌려주고 계신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여기서 명덕태후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무고한 신하들을 죽인 것. 둘째,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 것. 셋째, 임금으로서의 권한과 역할을 신하에게 위임한 것.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 공민왕은 승려 신돈(辛旽, 생년 미상~1371년)에게 전권을 넘기고 국사를 방임한 채 부인 노국공주를 추모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윗사람이 자신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일은 아니다. 윗사람이 정상적으로 집무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있을 수 있고, 대통령이 각 부 장관에게 인사권을 이양하듯 권한을 적절히 넘겨줌으로써 효율성을 높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임받은 권한이나 대행한 권력은 정당성을 갖출 수가 없다. 더욱이 유고 상황이 아닌데도 함부로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책임정치가 붕괴하고 지휘계통이 혼란에 빠진다. 권한을 위임받은 자의 권력 남용과 방종으로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신돈, 왕 대신 국사 좌지우지
아무튼 공민왕은 1365년 12월 신돈에게 ‘수정이순논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이라는 거창한 공신 칭호를 내리고 정1품 품계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최고의결기관의 장인 ‘영도첨의사사사(領都僉議使司事)’, 군부와 감찰기관을 함께 총괄하는 ‘판중방감찰사사(判重房監察司事)’, 불교 교단을 관장하는 ‘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천문지리와 역수(曆數)의 책임자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의 직함을 겸직하게 했다. 정치·행정·군사· 감찰·종교를 모두 책임지게 한 것으로 왕이나 다름없는 대권을 쥐여준 것이다.
이러한 신돈의 발탁은 신하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그가 공직 경험이 없는데다가 능력을 검증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승려가 나라의 행정수반을 맡은 것도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뜬금 없이 나타난 승려 하나가 하루아침에 왕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으니 위태롭기 그지없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은 요지부동이었다. 공민왕은 신돈이야말로 개혁을 추진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얽히고 설킨 지배층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고려를 전면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구질서에 물들지 않고 기존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필요하다. 따라서 “세속에 떨어져 홀로 선 사람을 얻어 그를 크게 사용하면 구습을 혁파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이다.
참모의 권한은 적절히 제어해야
공민왕은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방임으로 일관한다. 만약 공민왕이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가운데 개혁의 추진 실무를 신돈에게 맡긴 것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공민왕은 신돈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이는 조정의 혼란과 함께 신돈의 오만을 낳게 된다. 위임받은 권력을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양 여기게 된 것이다. 신돈이 분수를 잃어버린 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그는 임금과 나란히 앉아 음식상을 받았으며 의복과 장신구가 “모두 왕과 똑같아서 보는 사람들이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능행에 갔을 때는 임금과 백관이 모두 절하는데도 그만이 홀로 선 채로 절을 하지 않았다. 또한 중앙 뿐 아니라 지방까지 수중에 넣기 위해 자신을 5도 사심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강요했고, 충주로의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람한 행동들이 쌓여 결국 공민왕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이다.
무릇 권력은 자격과 책임이 병행될 때 비로소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다. 공민왕은 신하인 신돈에게 왕의 권한을 넘김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방기했을 뿐 아니라 정치질서의 문란을 가져왔다. 크나큰 권력에 취한 신돈이 점점 방종했음에도 이를 적절히 통제하지 않았다. 보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참모에게 맡겨버릴 때, 그리고 참모에게 위임한 권한을 적절히 제어하지 않을 때, 얼마나 큰 폐해가 야기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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