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경영의 정석 | 경영도 리셋하자(3)
김동호의 경영의 정석 | 경영도 리셋하자(3)
인터넷 정도에 머물던 디지털 혁명이 모바일로 급속도로 옮겨갔다. 인간은 하루 2시간 가깝게 모바일을 통해 세계를 만난다. 기업이 이러한 모바일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유목민처럼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 자연의 세계에도 동물들은 물이 마르고 풀이 없어지면 거대한 이동을 시작한다. 악어가 득실대는 강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런 자연의 이치는 인류는 물론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목민은 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말과 양을 이끌고 부지런히 새로운 신천지를 개척한다.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가축이 뜯어먹을 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기업의 경영도 마찬가지다. 기업 경영을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이에 맞춰 바뀌지 않으면 결국 고사되고 만다. 기업에게 결정타는 기술의 변화다. 제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갖고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유하고 있어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기존 기술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수많은 사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기존의 모든 질서가 재편된다. 인간의 생활방식이 저절로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되면서다. 처음에는 인터넷 정도에 머물던 디지털 혁명이 이제는 모바일로 급속도로 옮겨갔다. 인간은 하루 2시간 가깝게 모바일을 통해 세계를 만난다. 기업이 이러한 모바일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유목민처럼 새로운 신천지를 찾아 떠나야 한다. 변화는 쉽지 않다. 아직 뜯어먹을 풀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려면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완전히 리셋을 해야 한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대전환의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가 온다는 것은 이미 10년 전부터 예고됐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속도가 완만했고 실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같은 4차 산업혁명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영화 한 편을 소파에 누워 모바일로 관람하고, 손가락 몇 번 움직여 피자와 치킨, 옷을 비롯한 생활용품을 배달하는 시대가 됐다.
지금 살아남은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를 통해 살아남았다. 삼성의 성장 과정만 봐도 그렇다.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삼성은 이름만 그대로일 뿐이고 사업의 중심 축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세운 핵심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이었다. 이 두 원칙만 지키면 회사는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계속 성장해나갈 수 있다.
우선 소비자 제일주의다. 그가 1930년대 벌였던 정미소와 양조장 사업이 그랬다. 먹고 입는 게 절박했던 50년대에는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해 설탕과 옷감을 생산했다. 70년대에는 석유화학·중장비·가전제품을 만들고 80년대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순탄했던 적은 없었다. 새 도전에 나설 때마다 “우리 기술로는 무모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안팎의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손대는 사업마다 출발이 불안했다. 제일제당이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로 처음 설탕을 뽑자 백설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일모직이 독일제 기계로 원단을 뽑았을 때도 옷감으로 쓸 수 없는 불량품이 나왔다. 기술이 부족했던 탓이다. 반도체 성공은 미국·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미래에 새롭게 육성해 나갈 신수종(新樹種) 사업엔 늘 위험이 뒤따른다. 조금만 삐끗하면 기존 사업까지 휘청거린다. 그래도 변화는 불가피하다. 삼성그룹의 기함인 삼성전자는 중국의 후발 주자에 쫓기는 처지다. 위기를 돌파하려면 차별화와 고부가가치 사업 진출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삼성이 2010년 신수종으로 선정한 바이오 사업 진출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과정이다. 이 역시 회의적 시각이 많았지만 ‘소비자에게 필요한 제품을 공급한다’는 창업 전통 덕분인지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불과 5년 만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인천시 송도에 자리 잡은 제3공장이 2018년 가동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36만L의 생산 능력을 갖춰 1위 로젠과 2위 베링거인겔하임을 제치고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1위 기업이 된다. 삼성은 2020년까지 CMO의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바이오의약품은 생물공학 기술을 이용해 만드는 인슐린·호르몬·백신·항체·단백질·줄기세포 같은 의약품으로, 고령화와 의학 발전에 따라 수요가 폭발적이다. 시장 규모가 메모리 반도체의 2.2배에 달할 만큼 성장성이 크다. 삼성은 바이오로직스에 3조원 가까운 자금을 투자했다. 고용 창출 규모는 1500명에 달한다. 성과는 가시적이다. 현재 로슈(스위스)와 BMS(브리스틀마이어스 스퀴브·미국) 등 글로벌 제약사의 의약품을 위탁 생산하면서 바이오의약품 CMO의 새로운 강자로 급성장했다.
2011년 설립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자회사로 두고 바이오시밀러(복제약) 생산에도 진출하고 있다. 바이오시밀러는 특허가 끝난 의약품을 복제한 것으로 시장 전망이 밝다. 선진국의 전유물로만 생각했던 바이오 분야에서도 한국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엔브렐의 바이오시밀러 ‘브렌시스’에 이어 두 번째로 바이오시밀러를 내놓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11월 호주 식약청에서 레미케이드의 바이오시밀러 ‘렌플렉시스’ 최종 판매허가를 받았다. 렌플렉시스는 존슨앤드존슨의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레미케이드를 본떠 만든 약이다. 레미케이드는 연 9조원가량 팔리는 블록버스터 바이오 의약품이다. 현지 판매는 다국적 제약사 머크샤프앤드돔(MSD)이 담당한다. 이미 진출한 셀트리온의 램시마와 경쟁을 펼치게 된다.
호주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시장은 연 5000억원 규모에 달한다. 호주 정부는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바이오시밀러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바이오시밀러는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이다. 그래서 일반의약품 복제약처럼 원약품과 100% 똑같지 않다. 그래서 유사하다는 뜻의 시밀러로 불리운다. 하지만 의약품이기 때문에 임상을 모두 거쳐야하는 만큼 투자비가 적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은 기본인 것처럼 핵심 사업의 내재화도 성장의 비결이다. 두 회사의 관계는 쉽게 말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이고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퀄컴이라고 보면 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를 생산하고, 퀄컴은 중앙연산처리장치(CPU)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복제약을 대량 생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복제약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두 기능을 모두 보유할 때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러한 역할 분담과 핵심 사업의 내재화는 경쟁우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자금 조달 창구 역시 이분화돼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한국거래소에 상장했다. 지난해 11월 상장했지만 시가총액은 11조원이 넘는다. 셀트리온·한미약품의 활약으로 증시에 형성된 바이오 테마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가세하면서 강력한 테마를 형성하게 됐다. 이에 비해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나스닥의 문을 두드린다. 자금 조달처까지도 한 곳에 의존하지 않고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해외에 상장하면 해외투자자들의 접근은 한층 쉬워진다. 바이오시밀러 시장은 2013년 12억 달러 시장이었으나 2019년 239억 달러 시장이 될 전망이다. 5~6년 사이에 시장 규모가 2000% 급팽창하는 셈이다. 이는 이 기간 중 기존 바이오의약품 특허 만료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미증유의 고령화시대가 열리는 것도 바이오시밀러의 수요를 키우고 있다.
바이오는 삼성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다. 동물 떼가 새로운 풀밭을 찾아서 악어가 득실대는 거대한 강을 넘는 과정과 같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지금은 핵심이지만 바이오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것은 미래를 내다본 투자다. 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가 40%, 삼성물산이 60%를 보유하고 있다. 바이오에피스는 로직스가 90%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의 순서다. 삼성바이오 기업의 모태는 기업이 환경 변화에도 핵심 가치만 지키면 어느 분야든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기업 진화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 기업은 예외 없이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왔다. 올해로 215년 생존해 온 미국 기업 듀폰의 핵심 가치는 ‘안전과 건강, 인간 존중, 윤리적 행동’이다. 이런 핵심 가치 아래 듀폰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변화를 시도하면 60~70%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100% 죽는다”고 강조해 왔다. 이런 식으로 듀폰은 확고한 핵심 가치 아래 화약산업에서 화학산업을 거쳐 생명과학산업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현실에 안주해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쇠퇴한 노키아·모토로라·코닥은 걷지 못한 길이다.
애플의 위력도 예전만 못하다. 중국 토종기업들이 근력을 키우면서 거대시장 중국에서 존재감이 약화되면서다. 삼성도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가성비를 앞세우고 중국의 애국마케팅까지 활용한 중국 후발업체의 추격은 불가피하다. 비단 삼성뿐 아니라 LG와 현대차도 같은 운명이다. 이들 한국 기업이 중국 후발 업체의 추격을 따돌리고 생존하려면 바이오·스마트카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계속 진출해야 한다. 진화만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생존 조건은 시장 다변화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중국시장의 성장에 과도하게 기대어 왔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투자의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제는 빠르게 정상화해야 한다. 중국발 무역장벽이 만리장성처럼 갈수록 넓고 높게 겹겹히 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굴기를 달성한 중국이 자국 기업의 육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비관세·반덤핑 같은 전방위 무역규제 장벽을 쌓는 조짐이 가시화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전기차 배터리 인증 기준을 새로 내놓으면서 연간 8GW(기가와트)의 배터리를 생산해야 모범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다. 이는 기존보다 40배 늘어난 것으로 한국 기업은 직격탄을 맞게 됐다. LG화학과 삼성SDI의 중국 내 생산능력은 3GW 안팍에 불과해 인증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새로운 인증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중국의 비야디(比亞迪)뿐이다. 결국 보조금이 끊긴 한국 업체는 매출이 20~30% 감소하게 됐다. 전형적인 비관세 장벽의 횡포다.
반덤핑 관세도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태양전지 재료인 한국산 수입 폴리실리콘에 대한 반덤핑 재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미 1차 조사를 벌여 2.4~48.7%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도 한국산 수입량이 계속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경쟁업체의 요구로 시작된 이번 조사로 관세가 추가 부과되면 OCI·한화케미칼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런 상황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보복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한국 기업의 경쟁우위가 거의 사라진 데 따른 결과로 봐야 한다. 주력 산업 대부분이 따라잡혔고, 중국이 따라올 수 없다던 자동차·휴대전화·TV시장에서도 중국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급상승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성장성과 낮은 인건비에 따른 기회 확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평소 과도한 애국심 선동으로 유명한 중국 공산당 기관지를 앞세운 한국 기업 때리기는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인민일보의 해외판 공식 SNS 뉴스 계정인 샤커다오(俠客島)가 ‘단교’라는 말로 포문을 열더니,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롯데를 중국 시장에서 축출하자”고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이 신문의 영문판인 글로벌 타임스는 ‘한국, 쓴맛 봐야’라는 기사에서 “한국이 무릎 꿇을 때까지 우리 주장을 계속할 것”이라며 “삼성과 현대도 곧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막말을 쏟아냈다. 또 전문가 입을 빌려 ‘성주 타격’을 거론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거친 표현은 한·중 수교 이후 지난 25년간 누적된 ‘중국 리스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수출 비중 25%를 차지할 만큼 한국에 큰 시장이다. 한국은 진작에 미래를 내다보는 전략적 관점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여 왔어야 했다.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성장성을 내다보고 진출했던 중국 상황이 이제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국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2005~2016년 사이 세 배 뛰면서 멕시코·브라질보다 50% 높아졌고 성장률은 6%대로 둔화됐다. 더구나 중국은 수입대체산업을 본격화하면서 비관세 장벽을 높이고 있다. 통관을 불허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고, 전기자동차 배터리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삼성SDI·LG화학을 제외한 것도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한 노골적 차별행위다. 설상가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이 본격화하고 미·중 간 무역 갈등이 불붙으면 한국의 수출 환경은 더욱 악화할 수 있다.
삼정KPMG 경제연구소는 2012~2016년 한국을 겨냥한 외국의 비관세 수입 규제 증가율이 45.7%에 달해 세계 평균의 배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관영 언론의 거친 주장은 수출 다변화를 통한 특정 국가 의존도 완화와 제품 경쟁력 강화를 통한 무역장벽 돌파가 한국 기업의 미래 살길이란 점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김동호 -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와 산업에 관한 칼럼과 사설을 쓰고 매주 목요일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소니가 삼성에 따라잡힌 이유는』, 『대통령 경제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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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러나 처음에는 속도가 완만했고 실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같은 4차 산업혁명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영화 한 편을 소파에 누워 모바일로 관람하고, 손가락 몇 번 움직여 피자와 치킨, 옷을 비롯한 생활용품을 배달하는 시대가 됐다.
지금 살아남은 기업들도 이러한 변화를 통해 살아남았다. 삼성의 성장 과정만 봐도 그렇다. 창업 당시부터 지금까지 삼성은 이름만 그대로일 뿐이고 사업의 중심 축은 끊임없이 바뀌어왔다. 삼성 창업자 이병철은 회사를 경영하면서 세운 핵심 원칙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이었다. 이 두 원칙만 지키면 회사는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계속 성장해나갈 수 있다.
우선 소비자 제일주의다. 그가 1930년대 벌였던 정미소와 양조장 사업이 그랬다. 먹고 입는 게 절박했던 50년대에는 제일제당·제일모직을 설립해 설탕과 옷감을 생산했다. 70년대에는 석유화학·중장비·가전제품을 만들고 80년대 반도체에 뛰어들었다. 순탄했던 적은 없었다. 새 도전에 나설 때마다 “우리 기술로는 무모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안팎의 반대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손대는 사업마다 출발이 불안했다. 제일제당이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로 처음 설탕을 뽑자 백설탕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일모직이 독일제 기계로 원단을 뽑았을 때도 옷감으로 쓸 수 없는 불량품이 나왔다. 기술이 부족했던 탓이다. 반도체 성공은 미국·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웠다.
미래에 새롭게 육성해 나갈 신수종(新樹種) 사업엔 늘 위험이 뒤따른다. 조금만 삐끗하면 기존 사업까지 휘청거린다. 그래도 변화는 불가피하다. 삼성그룹의 기함인 삼성전자는 중국의 후발 주자에 쫓기는 처지다. 위기를 돌파하려면 차별화와 고부가가치 사업 진출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삼성이 2010년 신수종으로 선정한 바이오 사업 진출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과정이다. 이 역시 회의적 시각이 많았지만 ‘소비자에게 필요한 제품을 공급한다’는 창업 전통 덕분인지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불과 5년 만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인천시 송도에 자리 잡은 제3공장이 2018년 가동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36만L의 생산 능력을 갖춰 1위 로젠과 2위 베링거인겔하임을 제치고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CMO) 1위 기업이 된다. 삼성은 2020년까지 CMO의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의 선제적 바이오투자 가시적 성과
2011년 설립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자회사로 두고 바이오시밀러(복제약) 생산에도 진출하고 있다. 바이오시밀러는 특허가 끝난 의약품을 복제한 것으로 시장 전망이 밝다. 선진국의 전유물로만 생각했던 바이오 분야에서도 한국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엔브렐의 바이오시밀러 ‘브렌시스’에 이어 두 번째로 바이오시밀러를 내놓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지난해 11월 호주 식약청에서 레미케이드의 바이오시밀러 ‘렌플렉시스’ 최종 판매허가를 받았다. 렌플렉시스는 존슨앤드존슨의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레미케이드를 본떠 만든 약이다. 레미케이드는 연 9조원가량 팔리는 블록버스터 바이오 의약품이다. 현지 판매는 다국적 제약사 머크샤프앤드돔(MSD)이 담당한다. 이미 진출한 셀트리온의 램시마와 경쟁을 펼치게 된다.
호주 류머티즘 관절염 치료제 시장은 연 5000억원 규모에 달한다. 호주 정부는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바이오시밀러 사용을 독려하고 있다. 바이오시밀러는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이다. 그래서 일반의약품 복제약처럼 원약품과 100% 똑같지 않다. 그래서 유사하다는 뜻의 시밀러로 불리운다. 하지만 의약품이기 때문에 임상을 모두 거쳐야하는 만큼 투자비가 적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것은 기본인 것처럼 핵심 사업의 내재화도 성장의 비결이다. 두 회사의 관계는 쉽게 말하면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이고 삼성바이오에피스는 퀄컴이라고 보면 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를 생산하고, 퀄컴은 중앙연산처리장치(CPU)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복제약을 대량 생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복제약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두 기능을 모두 보유할 때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러한 역할 분담과 핵심 사업의 내재화는 경쟁우위를 극대화할 수 있다.
자금 조달 창구 역시 이분화돼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한국거래소에 상장했다. 지난해 11월 상장했지만 시가총액은 11조원이 넘는다. 셀트리온·한미약품의 활약으로 증시에 형성된 바이오 테마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가세하면서 강력한 테마를 형성하게 됐다. 이에 비해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나스닥의 문을 두드린다. 자금 조달처까지도 한 곳에 의존하지 않고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해외에 상장하면 해외투자자들의 접근은 한층 쉬워진다.
핵심가치 지키면서 변화와 혁신 추구
바이오는 삼성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다. 동물 떼가 새로운 풀밭을 찾아서 악어가 득실대는 거대한 강을 넘는 과정과 같다.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지금은 핵심이지만 바이오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것은 미래를 내다본 투자다. 바이오로직스는 삼성전자가 40%, 삼성물산이 60%를 보유하고 있다. 바이오에피스는 로직스가 90%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에피스의 순서다. 삼성바이오 기업의 모태는 기업이 환경 변화에도 핵심 가치만 지키면 어느 분야든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기업 진화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 기업은 예외 없이 핵심 가치를 지키면서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 왔다. 올해로 215년 생존해 온 미국 기업 듀폰의 핵심 가치는 ‘안전과 건강, 인간 존중, 윤리적 행동’이다. 이런 핵심 가치 아래 듀폰의 최고경영자(CEO)들은 “변화를 시도하면 60~70%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100% 죽는다”고 강조해 왔다. 이런 식으로 듀폰은 확고한 핵심 가치 아래 화약산업에서 화학산업을 거쳐 생명과학산업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현실에 안주해 가열되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쇠퇴한 노키아·모토로라·코닥은 걷지 못한 길이다.
애플의 위력도 예전만 못하다. 중국 토종기업들이 근력을 키우면서 거대시장 중국에서 존재감이 약화되면서다. 삼성도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가성비를 앞세우고 중국의 애국마케팅까지 활용한 중국 후발업체의 추격은 불가피하다. 비단 삼성뿐 아니라 LG와 현대차도 같은 운명이다. 이들 한국 기업이 중국 후발 업체의 추격을 따돌리고 생존하려면 바이오·스마트카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계속 진출해야 한다. 진화만이 생존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생존 조건은 시장 다변화다.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중국시장의 성장에 과도하게 기대어 왔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는 투자의 기본 원칙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제는 빠르게 정상화해야 한다. 중국발 무역장벽이 만리장성처럼 갈수록 넓고 높게 겹겹히 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굴기를 달성한 중국이 자국 기업의 육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비관세·반덤핑 같은 전방위 무역규제 장벽을 쌓는 조짐이 가시화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내 전기차 배터리 인증 기준을 새로 내놓으면서 연간 8GW(기가와트)의 배터리를 생산해야 모범 인증을 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다. 이는 기존보다 40배 늘어난 것으로 한국 기업은 직격탄을 맞게 됐다. LG화학과 삼성SDI의 중국 내 생산능력은 3GW 안팍에 불과해 인증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새로운 인증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업은 중국의 비야디(比亞迪)뿐이다. 결국 보조금이 끊긴 한국 업체는 매출이 20~30% 감소하게 됐다. 전형적인 비관세 장벽의 횡포다.
반덤핑 관세도 고개를 들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태양전지 재료인 한국산 수입 폴리실리콘에 대한 반덤핑 재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미 1차 조사를 벌여 2.4~48.7%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도 한국산 수입량이 계속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 경쟁업체의 요구로 시작된 이번 조사로 관세가 추가 부과되면 OCI·한화케미칼는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런 상황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보복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한국 기업의 경쟁우위가 거의 사라진 데 따른 결과로 봐야 한다. 주력 산업 대부분이 따라잡혔고, 중국이 따라올 수 없다던 자동차·휴대전화·TV시장에서도 중국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급상승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성장성과 낮은 인건비에 따른 기회 확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평소 과도한 애국심 선동으로 유명한 중국 공산당 기관지를 앞세운 한국 기업 때리기는 그칠 줄 모르고 있다. 인민일보의 해외판 공식 SNS 뉴스 계정인 샤커다오(俠客島)가 ‘단교’라는 말로 포문을 열더니,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롯데를 중국 시장에서 축출하자”고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이 신문의 영문판인 글로벌 타임스는 ‘한국, 쓴맛 봐야’라는 기사에서 “한국이 무릎 꿇을 때까지 우리 주장을 계속할 것”이라며 “삼성과 현대도 곧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막말을 쏟아냈다. 또 전문가 입을 빌려 ‘성주 타격’을 거론했다.
중국 관영매체들의 거친 표현은 한·중 수교 이후 지난 25년간 누적된 ‘중국 리스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수출 비중 25%를 차지할 만큼 한국에 큰 시장이다. 한국은 진작에 미래를 내다보는 전략적 관점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여 왔어야 했다.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성장성을 내다보고 진출했던 중국 상황이 이제는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국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2005~2016년 사이 세 배 뛰면서 멕시코·브라질보다 50% 높아졌고 성장률은 6%대로 둔화됐다.
수출 다변화로 중국 의존도 완화해야
삼정KPMG 경제연구소는 2012~2016년 한국을 겨냥한 외국의 비관세 수입 규제 증가율이 45.7%에 달해 세계 평균의 배에 달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관영 언론의 거친 주장은 수출 다변화를 통한 특정 국가 의존도 완화와 제품 경쟁력 강화를 통한 무역장벽 돌파가 한국 기업의 미래 살길이란 점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김동호 -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와 산업에 관한 칼럼과 사설을 쓰고 매주 목요일 페이스북 라이브를 진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소니가 삼성에 따라잡힌 이유는』, 『대통령 경제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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