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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에 누가 감히 손대려 하는가”

“내 집에 누가 감히 손대려 하는가”

주민 100만 명을 강제 이주시키려는 모스크바 시당국의 재개발 계획이 반푸틴 운동으로 비화할 수도
지난 5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시당국의 재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 사진·PAVEL GOLOVKIN-AP-NEWSIS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자영업을 하는 엘미라 샤기아크메토바는 얼마 전까지 만해도 시위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5월 14일 그녀는 러시아 중류층 수만 명과 함께 자신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아파트 말이다.

모스크바 시당국은 옛 소련 시절 지어진 저층 아파트 수천 채를 철거하고 현대식 고층 아파트를 지어 약 100만 명을 재정착시킬 계획이다. 세계 최대의 재개발 프로그램 중 하나다. 세르게이 쇼뱌닌 모스크바 시장이 발의한 법안에 따르면 철거 예정인 아파트의 입주자들은 새 아파트 문제에 관한 한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주에 동의하지 않으면 법정에 서야 한다.

그런 강압적인 재개발 계획이 러시아의 재산권 미래에 불길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이 쏟아지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상징적인 고르키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의 튼튼한 옛 아파트에 사는 샤기아크메토바는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이 집에서 그 끔찍한 개미둑 같이 형편없이 지어지는 고층 아파트 22층으로 이사가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걱정이 많다. 그 법안에 따르면 건설업자들이 주택의 안전과 환경 기준에 관한 규정을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법안을 근거로 당국은 구역 전체를 ‘재개발 지대’로 선언할 수 있다. 지정된 구역의 모든 건물이 언제든 철거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불편한 곳에 지어지는 아파트를 배정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소뱌닌 시장은 모스크바의 주택 단지를 개선하기 위해선 낡고 붕괴 위험이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철거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개발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은 그 프로젝트가 정부와 연줄이 있는 건설업체와 부패한 관리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계획됐다고 주장했다. 시 당국은 그런 비난을 근거 없는 추측이라며 일축했다.

지난 5월 15일 재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 시내에 사는 주민 수백 명과 시 관리들이 공개적인 토론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한 고령의 남자는 “이 법은 범죄행위와 다름없다”고 고함쳤다. 관리들은 진정하라며 달래려 했지만 주민들은 기세등등했다. 한 중년 여성은 “어디서 감히 나보고 조용하라고 말하느냐”고 따져 우레같은 박수를 받았다.

소뱌닌 시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통합러시아당 소속이다. 푸틴 대통령과 소뱌닌 시장은 둘 다 내년 재선에 도전할 계획이다. 반대자들이 ‘강제이주 프로그램’이라고 이름 붙인 모스크바 재개발 계획이 그들의 재선에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 2012년 대선 당시 전통적으로 야당이 우세한 모스크바에서 푸틴 대통령은 47%의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전국적으로 볼 때 그에게 최악의 득표율이었다. 소뱌닌 시장은 2013년 시장 선거에서 반부패 운동가이자 야권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 후보를 상대로 힘겨운 승리를 거둬 2차 결선 투표를 가까스로 면했다(관리들이 소뱌닌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 5월 14일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시민 약 3만 명이 소뱌닌 시장의 재개발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 중 다수는 소뱌닌 시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과거의 시위와 달리 이번엔 고령자도 많았고 어린 자녀와 함께 나온 가족도 자주 눈에 띄었다. 팔에 문신을 한 건장한 젊은이 파벨(그는 성을 밝히지 않고 단지 ‘국가’를 위해 일한다고만 자신을 소개했다)은 “내가 이런 시위 행진에 참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번 재개발 계획은 우리에게 치욕”이라고 말했다.

재개발 법안 반대자들은 아직까지 러시아의 반푸틴 운동과 공식 연대하진 않았다. 야권 지도자 나발니와 그의 아내 율리아, 어린 아들이 시위에 참석하려 했지만 폭동 진압 경찰이 그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그러나 분석가들에 따르면 철거를 둘러싼 분노가 확산되면서 그동안 정치에 무관심하던 러시아인 중 다수가 급진화될 수 있다고 당국은 우려한다. 샤기아크메토바는 “나도 이전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부패에 맞선 이전의 여러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게 부끄럽다. 하지만 이젠 국영 TV부터 정부 최고위층까지 러시아의 모든 것이 거짓말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폭동진압 경찰은 5월 14일에 있은 재개발 반대 시위 현장에서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와 그의 아내 율리아, 어린 아들을 강제로 쫓아냈다. / 사진·PAVEL GOLOVKIN-AP-NEWSIS
지금까지 모스크바 재개발 법안 반대운동은 주로 여성이 주도했다. 남성 지배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다. 5월 14일 시위의 주도자 중 한 명인 IT 전문가 카리 구겐베르게르는 “난 이 계획이 발표되기 전엔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말했다. “취미생활이나 개인적인 관심사에만 매달렸다. 하지만 내게 가장 소중한 ‘우리집’을 빼앗아 가려는 이 위협이 나의 세계관과 철학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철거 예정인 아파트 대부분은 1950년대에 지어졌다. 니키타 흐루쇼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러시아인 수백만 명에게 처음으로 개인 소유 아파트를 제공하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지시함에 따라 건설된 5층짜리 조립식 패널 아파트 ‘흐루쇼프카’다. 혼잡한 공동 주택(화장실과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했다)에서 성장한 당시 러시아인들은 그 프로젝트를 대환영했다. 1962년 공연된 소련 뮤지컬에서 주인공들은 새 아파트를 보며 행복에 겨워 이렇게 노래했다. “이 아파트가 우리 거야, 우리 것! 부엌도 우리 거야, 우리 것! 창도 문도 우리 거야! 믿을 수 없어, 정말!”

그 프로젝트에서 1차로 건설된 아파트 중 다수는 싸구려 자재를 사용했고 25년 정도 버틸 수 있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나머지는 더 튼튼하게 지어져 150년은 거뜬히 살 수 있도록 설계됐다. 현재 시당국이 철거하려는 아파트 수천 채는 벽돌과 콘크리트로 건설돼 아직 상태가 좋다.

국제건축가연맹(UIA)의 저명한 회원인 유리 예킨은 지난 5월 러시아 언론에 “모스크바 시장은 이 5층짜리 아파트 전부 또는 그중 상당수가 너무 낡았거나 심지어 붕괴 조짐을 보이는 위험한 상태라고 말했지만 그에 관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모스크바 시청이 위험하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아파트는 오히려 철거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시당국은 주민을 달래기 위해 신속히 움직였다. 모스크바 시의회 하원은 5월 말로 예정됐던 흐루쇼프카 재개발 법안 2차 심의를 7월 이후로 연기했다. 이 법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푸틴 대통령도 재개발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풀뿌리 운동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듯하다. 그는 지난 5월 4일 “무엇이라도 주민에게 강요해선 안 되며 주민의 권리를 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 시청도 입주자 과반수가 찬성하지 않으면 아파트를 철거하지 않겠다며 전자투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주민투표는 시당국이 쉽게 조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민투표 규정에 따르면 등록하지 않거나 기권하면 철거에 찬성하는 표로 계산된다. 5월 15일 모스크바 시관리들은 약 2만 명이 투표를 마쳤으며 반대표는 1표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비판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기자 출신으로 모스크바 북부의 아파트에 사는 블라디미르 크라실니코프(69)는 “당국은 주민을 등 돌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크라실니코프는 크렘린 기자단에 있으면서 15년 동안 푸틴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 전역과 세계 곳곳을 방문했다. 그는 1차 체첸 전쟁을 취재하다가 입은 부상의 보상으로 NTV 방송사로부터 무이자 대출을 받아 2000년 방 3개짜리 아파트를 구입해 현재 3대가 함께 아파트에서 산다. “내가 흘린 피로 얻은 아파트”라고 그는 말했다. “이제 당국이 이 아파트를 빼앗아 가려고 하니 개인적인 모욕을 느낀다.”

샤기아크메토바의 아파트는 1차 철거 대상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의 아파트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그녀는 시청에 대한 강한 불신을 표했다. “1차에선 빠졌지만 우리 아파트는 다음에 철거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난 불도저가 올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 마크 베네츠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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