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두께 달리한 60가지 사이즈 출시 … 3D 프린터 이용한 제작은 ‘탈규모화 경제’의 신호탄 콘돔 산업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신기술이 업계의 품질관리와 관련된 낡은 규제로 발목 잡혀 있다. / 사진:GETTY IMAGES BANK여자가 데이트 남성을 집으로 맞아들인다.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한 꺼풀씩 옷이 벗겨지고, 잠깐 안전 제일! 그녀가 휴대전화를 꺼내 남자의 아랫도리를 스캔한 뒤 ‘프린트’ 버튼을 누른다. 뒷방의 3D 프린터에서 핫도그를 감싼 진공포장 랩처럼 딱 들어맞는 맞춤 하이드로젤(물을 용매로 하는 젤) 콘돔이 완성돼 나온다. 곧바로 환락의 시간이 이어진다. 누구도 약국에 뛰어갔다 올 필요가 없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삭제된 장면이 아니다. 당신의 데이팅앱 범블 멤버십이 만료되기 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20년대 ‘영스 러버’가 라텍스 소재 트로얀스 콘돔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몇 가지 기술이 결합해 콘돔에 본격적인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규제당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는 이 같은 혁신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새로 부상하는 콘돔 혁명은 IT가 글로벌 경제를 혁신적으로 바꿔놓는 거대한 트렌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클라우드 컴퓨팅, 휴대전화, 인공지능, 3D 프린팅이 이른바 ‘탈규모화(unscaling)’ 트렌드를 견인한다. ‘탈규모화’는 벤처자본가 헤만트 타네자와 내가 내년 3월 출간되는 공저 ‘엔스케일드(Unscaled)’에서 처음 소개하는 개념이다.
20세기엔 대량생산 기술이 지배했다. 기업은 덩치를 키워 최대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내며 규모의 경제를 추구했다. 금세기엔 기술발전으로 대량 맞춤생산이 가능해지고 있다. 기업은 갈수록 개개인의 취향을 더 많이 반영하는 제품을 만들려 할 것이다. 대중시장을 겨냥한 대량생산의 정반대다. 과거에는 규모의 경제가 우위를 차지했지만 앞으로 몇 년 뒤엔 이들 ‘탈규모의 경제’가 지배할 것이다.
최근 길이와 두께 수치를 토대로 60가지 사이즈로 마이원(MyOne) 콘돔을 판매하기 시작한 원이라는 회사에서 이 같은 트렌드의 초반 결과를 엿볼 수 있다. 회사가 웹사이트에서 설명하듯 ‘바지는 다양한 치수로 나오는데 콘돔은 왜 모두 비슷해야 하는가?’ 하지만 지금까지 콘돔은 일반형과 대형 두 가지 사이즈로만 나왔다(‘소형’이라는 딱지가 붙은 콘돔을 누가 사겠는가?). 하나의 제조라인에서 같은 품목 수백 만 개를 쏟아내야 경제성이 더 높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의 선택권이 제한돼 왔다. 게다가 콘돔은 의료기구로 간주돼 규제당국이 쉽게 바꿀 수 없는 표준과 테스트 절차를 수립하게 된다.
원의 대빈 웨델 CEO는 “전 세계에 고가의 장비를 갖춘 실험실들이 있다”고 내게 말했다. 그런 유의 테스트 중 하나에선 콘돔에 특정한 양의 물을 채워 넣어 새는지 확인한다. 그러나 완벽한 콘돔이라도 사이즈가 작으면 그만한 양의 물을 저장할 수 없어 그냥 터져버린다. 웨델 CEO는 미국 식품의약국(FDA)과 여러 해 동안 공동 작업을 통해 다양한 콘돔 사이즈에 더 유용한 테스트를 개발했다. 그는 “그것이 우리 제품의 출시를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원은 콘돔 사이즈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는 고도로 자동화된 기계를 새로 발명했다. 인터넷과 클라우드를 통해 소비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도 원에게는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웨델 CEO가 설명하듯 소매점의 한정된 진열공간에 60가지 사이즈의 콘돔을 펼쳐놓으라고 설득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월마트 통로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자신의 사이즈를 측정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원의 웹사이트에는 남자가 은밀한 장소에서 자신에게 맞는 크기를 찾을 수 있는 요령이 올라 있다(“이때 ‘색깔 있는’ 잡지·영화 또는 좋은 친구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는 지난 세기 콘돔 업계의 탈규모화를 향한 작은 걸음마다. 이 기술은 앞으로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듯하다. 3D 프린팅은 완만하게 발전해 왔다. 그리고 실용적인 가정용 프린터는 여전히 공상과학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3D 프린팅 분야의 다음 번 도약은 소량 생산에서 이뤄질 듯하다. 대규모 조립라인을 구축하는 대신 원 같은 회사에서 공장을 가득 채운 3D 프린터가 제각기 주문에 따라 어떤 사이즈의 콘돔이든 신속히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시스템이 갖춰지면 기업은 주문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맞춤 사이즈 콘돔을 프린트해 소비자에게 배송할 수 있다. 3D 프린터는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모든 도시에 소규모 콘돔 공장을 세울 수도 있다. 무인기 배달이 현실화하면 콘돔 주문을 넣은 뒤 2시간 안에 제작돼 앞마당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려면 소재를 바꿔야 한다. 라텍스를 이용해 콘돔을 만들 수 있는 3D 프린터는 없는 듯하다. 그러나 매사추세츠공대와 호주 월런공대학을 포함한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이 하이드로젤 콘돔을 개발 중이다. 하이드로젤은 소프트렌즈에 쓰이는 말랑말랑한 물질이다. 잉글랜드 맨체스터대학 등의 연구팀은 탄소기반 나노물질인 그래핀 소재 콘돔을 개발 중이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하이드로젤이나 그래핀 소재의 완벽하고 믿을 만한 콘돔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 10월 소니는 엑스페리아 XZ1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가장 최첨단 기술로 손꼽히는 3D 스캐너가 포함됐다. 물체 주위를 골고루 비추면 소프트웨어가 완벽하게 렌더링된 3D 이미지를 생성해 애니메이션으로 변환, 비디오게임에 삽입할 수 있다. 몇 가지 코드를 첨가해 그 기술을 개조하면 어떤 신체 장기든 실제 사이즈의 3D 이미지를 측정해 제작할 수 있다. 앤서니 와이너 전 미국 하원의원처럼 자기 ‘물건’ 사진으로 섹스팅하기 좋아하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완벽한 치수를 3D 프린터로 보내 콘돔을 맞춤 제작할 수 있게 된다.
앞으로 10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효과적인 3D 프린터가 각 가정에 보급될 전망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규제 문제에 적절한 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면 적시공급 콘돔이 탄생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탈규모화는 상상 가능한 모든 상황에 맞는 콘돔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 케빈 메이니 뉴스위크 기자
[뉴스위크 한국판 12월 4일자에 실린 기사를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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