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윤의 art TALK(4)] 실존적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이지윤의 art TALK(4)] 실존적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최근 세계적으로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는 현대조각의 거장 작가가 있다. 2016년부터 작고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로 기획되어, 전 세계의 유수한 미술관이 앞을 다투어서 기획하고 있는 작가는 알베르티 자코메티이다. 2016년 뉴욕의 구겐하임에서부터 시작하여, 상하이의 유즈 미술관, 2017년 동경의 신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등이 연이어 큰 전시를 기획 중이다. 이번 2018년 1월의 아트톡은 자코메티 재단과 함께 기획되어,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본 전시를 소개한다. 아마도 자코메티의 조각은 그의 독창적 예술성과 천재성으로 인해 최대의 찬사를 받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현대미술이라는 점도 그러한 작품에 대한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드는 것 같다. 2010년 런던 경매에서 1200억원(1억40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하더니, 2015년 1600억원(1억413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언젠가 1000억원대의 피카소 가격을 이겼다. 매우 섬세한 작품이기에, 운송이나 보험이 많이 힘들어서 이렇게 대규모의 전시를 살면서 한번 본다는 것 또한,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자코메티는 스위스 태생으로 20세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가이다. 1901년 태어나 1966년까지 짧은 인생을 산 천재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사를 보면 놀랍게도 시대가 작가를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조금 과장하자면 어떤 변화와 혁명의 시대는 늘 대단한 작가들을 낳았다. 20세기가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작가를 배출했고, 미술이라는 개념이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면, 분명 20세기라는 시간은 인간사에서 매우 특별하게 많은 가치와 패러다임이 변한 시대임은 확실한 것 같다. 우리가 지난 몇 년 전부터 인공지능이 가져올 4차산업에 대한 질문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아마도 19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놀라움, 나아가선 상당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시간이었다. 특히 강대국들의 형성과 새로운 제국주의에 의한 제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과 그 시대를 살아낸 그 어떤 의식 있는 예술가라면 도대체 그러한 시대에 그들이 어떤 예술이란 것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은 쉬지 않고 했으리라. 길거리에는 발에 치이 듯 굴러다니는 형제, 이웃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은 그들이 살아내는 예술이 어떤 인생과 존재하는 진리를 찾으려는 투쟁적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20세기와 함께 태어나서, 미술 조각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발버둥을 친 작가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조각가다. 프랑스에서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댕의 남성적이고 감정 표현을 담고 있는 조각과는 매우 다른, 가느다랗고 길게 늘어진 인체를 제작한 조각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적 연구과 접근이 그의 조각을 당시의 로댕과 매우 차별화하는 시작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의 조각은 아주 집요한 ‘관찰’에서 시작된 새로운 리얼리티 구축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그 대상을 계속해서 매만지고 다듬어 가면서 그 대상을 구현해 내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릴 때부터 세잔을 아주 존경한 자코메티였기에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모방을 기본으로 시작하는 태도는 매우 오랫동안 자코메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또한 상당한 문학가였다. 모든 작품을 할 때마다 본인의 작품에 대한 글을 남겼고, 당시 최고의 철학가와 문학가들과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였다.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은, 중요한 작가들 옆에는 동시대 최고의 철학가나 문인들이 함께 있었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통섭(inter-deciplinary)에 대한 맥락도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의 곁에는 당대 최고의 천재들이 있었다. 그는 1926년 파리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평생 그와 함께하고 논쟁하고 살았던 초현실주의 설립자인 앙드레 브루통, 사르트르-시몬드 보봐르 커플, 철학가 바타이유와 교류했다. 이런 만남이 그의 작업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는 근간이 된 것은 물론이다. 1948년엔 사르트르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에게서 온 편지라는 글’을 소개하는 문학 행사를 열기도 했다. 또한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사무엘 베케트와의 인연으로 그의 연극 공연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도 만들기도 하였다.
자코메티는 1934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줄리안 레비화랑에서 할 만큼, 좋은 시작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33세에 불과한 자코메티가 뉴욕에서 당시 파리의 피에르 콜 갤러리만큼의 명성을 갖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그의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국제 미술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평생 딜러이자 파트너는 피에르 마티스 였다. 사실 이러한 상업적 꾸준한 지원이, 그가 그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청동작품 제작에 투자를 하고, 파리의 매그 갤러리와도 계약을 맺고 더욱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 그의 삶의 방식을 전혀 바꾸지 않았고, 그는 매우 검소하고 한결같았다. 그는 금전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파리 몽파르나스 아폴리트맹드롱가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보냈고, 셀렉트 카페 또는 쿠폴 카페에서 늘 식사를 하며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단지 치열하게 모델과의 집요한 싸움에 전념했다. 사실 모델을 놓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를 우리는 잘 모를 수 있다. 그는 평생 몇 안 되는 모델과 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 조각은 그의 동생 디에고(Diego Giacometti)가, 또 여성모델은 그의 아내인 아네트 암(Anette Am)이 맡았다. 그들은 하루에도 5~6시간을 같은 자세로 앉아서 그의 작업 대상이 되었다.
본 전시에서 많이 소개되는 자코메티의 후기 작품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사물과 인물을 자신만이 인지하고 보이는 대로 재현하기 원했기 때문에, 대상의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지 작품의 대상이 모델 뿐만 아닌 그 모델이 있는 공간과 주변 사물과 맺는 관계들까지도 시각화하려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조각해도 그의 또는 그녀의 영혼이나 느낌, 분위기, 기운까지도 함께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회화 작품에서 흔적이 뚜렷했다. 마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멀리 있는 모델의 대상과 주변의 공간, 나중에는 자유라 불리는 회색계열로만 만들어지는 회화 작업이 이러한 일련의 갈구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코메티는 1966년 심장병으로 죽기 전 약 10년 동안 작가로서 매우 성공적인 작품활동과 전시를 했다. 1955년 뉴욕 구겐하임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고, 1956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한 기념비적인 여인상을 제작한다. 인간의 크기보다 더 큰 작품들도 시작했다. 1965년엔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면서 그의 국제적 명성은 더욱 치솟았다. 당시 중견 작가로서 국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였을 것 같다. 우리가 요즘 방문하는 많은 해외 미술관에서 만나는 자코메티의 대형 작품들은 대다수 이 시기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 시점에서 자코메티 파운데이션이 만들어진 역사를 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자코메티의 가장 중요한 컬렉터는 데이비드 톰슨이라는 미국 피츠버그의 강철업계 거물이다. 미술은 세 번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처음은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다음은 컬렉터가 구입 할 때, 마지막은 그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 질 때이다. 그가 직접 미술관을 만들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 친구인 한스 베츨러와 에른스트 다니엘러가 화상과 함께 진행한 시민운동으로 자금이 모아졌고, 1965년 알레르토 자코메티 파운데이션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스위스 취리히 쿤스트 하우스, 바젤의 쿤스트 뮤지엄, 빈터투어의 쿤스트 뮤지엄 등 세 곳에 둥지를 틀었다. 자코메티는 이렇게 자신의 파운데이션이 만들어지고 안착하는 모습을 확인한 뒤, 1966년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첨예하고 실존적 경험이었던 제1,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런 시대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질문과 사색을 하게 하는 토양이 됐다. 예술의 본질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탐구라면, 그는 인류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의 교류 과정을 통해 그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했고, 결국 새로운 조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이지윤은… 이지윤은 지난 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박사/ 미술경영학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이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360도]을 기획하였고, 지난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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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는 스위스 태생으로 20세 이후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가이다. 1901년 태어나 1966년까지 짧은 인생을 산 천재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미술사를 보면 놀랍게도 시대가 작가를 만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조금 과장하자면 어떤 변화와 혁명의 시대는 늘 대단한 작가들을 낳았다. 20세기가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작가를 배출했고, 미술이라는 개념이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면, 분명 20세기라는 시간은 인간사에서 매우 특별하게 많은 가치와 패러다임이 변한 시대임은 확실한 것 같다. 우리가 지난 몇 년 전부터 인공지능이 가져올 4차산업에 대한 질문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아마도 19세기 말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기대와 놀라움, 나아가선 상당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시간이었다. 특히 강대국들의 형성과 새로운 제국주의에 의한 제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과 그 시대를 살아낸 그 어떤 의식 있는 예술가라면 도대체 그러한 시대에 그들이 어떤 예술이란 것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은 쉬지 않고 했으리라. 길거리에는 발에 치이 듯 굴러다니는 형제, 이웃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은 그들이 살아내는 예술이 어떤 인생과 존재하는 진리를 찾으려는 투쟁적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한 20세기와 함께 태어나서, 미술 조각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발버둥을 친 작가가 알베르토 자코메티이다.
그는 당시 최고의 조각가다. 프랑스에서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댕의 남성적이고 감정 표현을 담고 있는 조각과는 매우 다른, 가느다랗고 길게 늘어진 인체를 제작한 조각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초현실주의적 연구과 접근이 그의 조각을 당시의 로댕과 매우 차별화하는 시작을 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의 조각은 아주 집요한 ‘관찰’에서 시작된 새로운 리얼리티 구축이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손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그 대상을 계속해서 매만지고 다듬어 가면서 그 대상을 구현해 내는 상상을 할 수 있게 한다. 어릴 때부터 세잔을 아주 존경한 자코메티였기에 대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과 모방을 기본으로 시작하는 태도는 매우 오랫동안 자코메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글쟁이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1934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을 줄리안 레비화랑에서 할 만큼, 좋은 시작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33세에 불과한 자코메티가 뉴욕에서 당시 파리의 피에르 콜 갤러리만큼의 명성을 갖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그의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은 국제 미술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평생 딜러이자 파트너는 피에르 마티스 였다. 사실 이러한 상업적 꾸준한 지원이, 그가 그만의 언어를 구축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세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요인들이라 할 수 있겠다. 그가 청동작품 제작에 투자를 하고, 파리의 매그 갤러리와도 계약을 맺고 더욱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 그의 삶의 방식을 전혀 바꾸지 않았고, 그는 매우 검소하고 한결같았다. 그는 금전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파리 몽파르나스 아폴리트맹드롱가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평생을 보냈고, 셀렉트 카페 또는 쿠폴 카페에서 늘 식사를 하며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단지 치열하게 모델과의 집요한 싸움에 전념했다. 사실 모델을 놓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를 우리는 잘 모를 수 있다. 그는 평생 몇 안 되는 모델과 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남자 조각은 그의 동생 디에고(Diego Giacometti)가, 또 여성모델은 그의 아내인 아네트 암(Anette Am)이 맡았다. 그들은 하루에도 5~6시간을 같은 자세로 앉아서 그의 작업 대상이 되었다.
본 전시에서 많이 소개되는 자코메티의 후기 작품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사물과 인물을 자신만이 인지하고 보이는 대로 재현하기 원했기 때문에, 대상의 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지 작품의 대상이 모델 뿐만 아닌 그 모델이 있는 공간과 주변 사물과 맺는 관계들까지도 시각화하려는 것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조각해도 그의 또는 그녀의 영혼이나 느낌, 분위기, 기운까지도 함께 표현하려 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회화 작품에서 흔적이 뚜렷했다. 마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멀리 있는 모델의 대상과 주변의 공간, 나중에는 자유라 불리는 회색계열로만 만들어지는 회화 작업이 이러한 일련의 갈구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1955년 구겐하임 대규모 회고전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첨예하고 실존적 경험이었던 제1, 2차 세계대전의 한 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런 시대상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질문과 사색을 하게 하는 토양이 됐다. 예술의 본질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탐구라면, 그는 인류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의 교류 과정을 통해 그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했고, 결국 새로운 조각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이지윤은… 이지윤은 지난 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박사/ 미술경영학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이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360도]을 기획하였고, 지난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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