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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연결되길 진정 원했던 사람”

“세상과 연결되길 진정 원했던 사람”

탄생 100주년 맞은 고 잉마르 베리만 감독, 그의 뮤즈이자 파트너였던 배우 리브 울만의 회상
다큐멘터리 ‘리브 & 잉마르 (LIV & INGMAR)’ (2012)의 한 장면. 두 사람은 총 12편의 영화를 함께 만들었다. / 사진:NEWSWEEK
2007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스웨덴 출신 감독 잉마르 베리만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베리만 감독이 없었다면 영화라는 예술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모니카와의 여름’(1953), ‘한여름 밤의 미소’(1955), ‘산딸기’(1957) 등 초기 작품들, 특히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제7의 봉인’(1957)은 세계적인 아트 하우스 운동을 촉발시켰다.

‘제7의 봉인’이 세계 영화사를 바꿔놓았다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인생은 배우 리브 울만(현재 79세)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됐다. 베리만 감독은 막스 폰 시도우, 비비 안데르손, 얼랜드 조셉슨 등 많은 배우와 빈번히 공동작업을 했다. 하지만 울만과의 초자연적인 유대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

베리만 감독은 1966년 ‘페르소나’를 시작으로 ‘외침과 속삭임’(1972), ‘결혼의 풍경’(1974), ‘가을 소나타’(1978) 등 대표작을 비롯해 12편의 영화를 울만과 같이 만들었다. 매혹적인 관능미와 물러서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울만은 베리만 감독의 대사와 연출 방향에 본능적으로 공감했다. 한마디로 베리만의 스크린 속 아바타로 이상적인 배우였다(베리만 감독은 언젠가 울만을 ‘내 스트라디바리우스’라고 지칭했다). “난 베리만의 많은 부분을 이해했고 그도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울만은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걸 그도 알았다.”

노르웨이인인 울만은 1938년 아버지가 엔지니어로 일하던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캐나다 토론토와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그녀의 가족이 노르웨이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울만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이웃이 나치로부터 도망치는 걸 도운 죄로 독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갇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한 후였다) 노르웨이로 돌아간 뒤 연기를 시작했다.울만은 1965년 ‘페르소나’의 캐스팅 과정에서 베리만 감독의 눈에 띄었다. 베리만의 친구가 그에게 비비 안데르손 옆에 앉아 있는 그녀의 사진을 보여줬다. 베리만 감독은 자서전 ‘마법의 등’(1987)에서 울만의 첫인상에 대해 ‘그 젊은 여배우는 안데르손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딴판으로 보이기도 했다’고 썼다.

베리만 감독은 두 여배우의 유사성(이중성을 다룬 사이코드라마 ‘페르소나’의 두 여주인공 역으로 이상적이었다)에 매료됐다. 스웨덴의 작은 섬 포뢰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 베리만은 그 장소(그는 나중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와 울만, 양쪽 모두와 사랑에 빠졌다. ‘울만과 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사랑했다’고 베리만 감독은 썼다.

이들의 사랑은 5년 동안 지속됐고 둘 사이에 딸(린 울만)이 태어났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가 끝난 뒤에도 영화 동지로서의 관계는 유지했다. 울만은 베리만 감독의 영화와 동의어가 됐고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지적이고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들은 그녀에게 높은 명성을 안겨줬다. 울만은 ‘고독한 여심’(1976)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뒤 한동안 미국에서 대스타 대접을 받았다.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표지에도 등장했는데 외국어 영화로 미국에 처음 이름을 알린 배우 치고는 대단한 업적이다.

베리만 감독의 인도주의적 측면을 표현한 울만의 초자연적 능력은 관객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인도주의는 냉담하고 인간혐오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베리만 감독과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 인생은 냉담함과 무관심에 맞선 기나긴 싸움으로 볼 수 있다.
1975년 뉴스위크 표지에 등장한 리브 울만과 최근의 모습. 울만은 베리만 감독의 연출 방향과 대사에 본능적으로 공감했다. / 사진:WIKIPEDIA.ORG
일례로 반전 영화 ‘치욕’(1968)의 막바지에 사람들로 꽉 찬 배에 필사적으로 올라타는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에선 선견지명과 인간적 공감의 감성이 돋보인다. 또 ‘제7의 봉인’에서 죽음을 상대로 체스를 두는 기사의 이미지에 관해 울만은 이렇게 말했다. “평생 냉담하게 살아왔지만 죽기 전에 꼭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베리만 감독의 인도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건 울만을 통해서였다. ‘치욕’의 자매 작품으로 불리는 ‘정열’(1969)에서 울만은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 이후 거짓말로 자신의 인생을 재건하는 여인을 연기한다. 영화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 클로즈업 화면으로 그녀의 독백이 5분 동안 이어진다. 고도의 예술적 기교가 돋보이는 연기로 울만과 베리만 감독의 협업 작품 중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울만은 베리만 감독의 연출보다 그의 대사가 자신의 연기에 더 도움을 줬다고 말한다. “베리만은 정말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라고 그녀는 말했다. “촬영 당시보다 요즘 와서 그런 사실이 더 확실히 느껴진다.”

울만은 ‘베를린의 밤’(1977) 이후 베리만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사라방드’(2003)에 한 번 더 출연했다. 이 즈음 울만은 베리만 감독이 쓴 시나리오나 희곡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리만 감독은 울만의 인도주의 사업을 응원했다. 울만은 1980년대 초 유엔아동기금(UNICEF)과 국제구조위원회(IRC)를 통해 세계의 어린이와 여성 난민을 돕기 시작했다.

베리만 감독의 이런 격려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스칸디나비아인 특유의 열정이야말로 울만이 이해하고 사랑했던 베리만 감독의 진짜 모습이었다. 울만은 베리만 감독의 탄생 100주년이 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없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베리만은 근엄하고 침울하며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정말 세상과 연결되기를 원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대사들은 그것이 쓰여진 당시보다 지금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단테 A. 시앰팰리아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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