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푸틴의 철통 지지율 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충격적 연금개혁 후폭풍
[떨어지는 푸틴의 철통 지지율 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충격적 연금개혁 후폭풍
은퇴와 연금 수령 연령 단계적으로 늦춰…평균수명 낮아 개혁안에 강력 반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14년 이후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즐겨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이 갑자기 60% 가까이로 뚝 떨어졌다. 일본의 NHK 방송은 이를 두고 ‘고공행진하던 푸틴 지지율에 황신호가 켜졌다’라고 보도했다. 60%대의 지지율은 아직 적신호는 아니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이토록 큰 폭으로 지지율이 추락한 것은 심상치 않다는 의미로 황신호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의 급락한 것은 퇴직과 연금 수령 연령을 뒤로 미루는 연금개혁안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2018년 러시아 FIFA월드컵 개막일인 지난 6월 14일 이를 발표했다. 이날 저녁 러시아인의 눈은 온통 축구 경기장으로 향했다. 러시아 국가대표팀이 오후 6시(현지시간) 모스크바 루즈니키 경기장에서 시작된 개막 경기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겨뤘기 때문이다 경기에서 러시아는 사우디를 5대0으로 대파했다. 승리감에 젖은 러시아인들은 밤새 보드카를 마시며 승리를 자축했다. 발표 시기부터가 ‘꼼수’의 냄새가 풍겼다. 모든 러시아인이 껄끄러워 할 이 발표는 푸틴 대통령이 아닌 그의 오른팔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맡았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메드베데프 총리가 이날 발표한 은퇴와 연금 수령 연령 연장 방안은 현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연금개혁 조치로 꼽힐 정도로 과감했다. 연금 개혁안의 골자는 이렇다. 우선 현행 60세인 남성들의 퇴직과 연금 수령 시기를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65세까지 미룬다. 최종 단계에서는 현재보다 5년이 더 미뤄지는 것이다. 현행 55세인 여성들의 퇴직과 연금 수령 연령은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63세까지 연장한다. 여성들은 최종 단계에선 남성보다 더 많은 8년이 미뤄진다. 이 개혁 조치는 2019년부터 적용을 시작한다. 남성은 2028년, 여성은 2034년까지 매년 6개월씩 퇴직과 연금 수령 연령을 연기한다.
이 발표가 나오자마자 러시아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푸틴이 2005년 밝혔던 ‘은퇴와 연금 수령 시기 조정에 반대한다’라는 내용의 비디오 클립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푸틴 대통령이 2005년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데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당시 푸틴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절대 이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퇴직 연령을 늦출 필요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나라 경기를 부양하고 국민 이익을 위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럴 필요도 있지만 은퇴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그는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는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데 반대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말을 맺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러시아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대변인이 곧바로 나섰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 당시와는 상황이 바뀌었다”며 푸틴의 13년 만에 말바꾸기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페스코프는 역할 자체도 그렇지만 항상 강한 톤으로 푸틴의 주장을 전해왔기에 ‘푸틴의 입’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페스코프는 “당시 발언은 이미 13년 전에 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물론 그동안 우리는 인구 구성이 크게 변하는 상황을 오래동안 지켜봤으며 경제 상황과 국제 시장도 변화해왔다”라며 “어떤 나라도 변화 없이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라며 연금 개혁안을 옹호했다. 인구의 노령화로 인해 연금 지출 부담이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기간은 늘리고, 연금 수급 시기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며 연금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페스코프는 “푸틴 대통령은 새로운 연금 개혁안 마련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메드베데프 총리의 내각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누가 봐도 연금 개혁에 대한 푸틴의 책임론과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교묘하게 피해나가려는 의도의 발언이다. 물론 러시아는 실제 내정은 총리가 맞고 대통령은 군 지휘권, 계엄령·비상사태 발령권, 국민투표 실시권, 총리 및 내각 요직의 지명과 임면권, 두마(하원) 해산권, 의회에서 가결한 법률 거부권과 대통령 명령 발령권 등 거시적인 권한을 가지는 이원 집정제 국가다. 따라서 페스코프는 이를 바탕으로 이러한 변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금개혁안처럼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민심을 동요시킬 가능성이 크며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주요 정책이 대통령의 개입이나 허락 없이, 또는 묵인이나 방조 없이 총리와 내각이 독단적으로 마련해 국민 앞에 발표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러시아 대통령은 국정 전반에 걸쳐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원집정제이지만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누린다. 합법적으로 철권 통치를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을 ‘21세기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로 부르는 것은 그의 헌법상 권한과 누리는 권력이 실제로 차르 못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푸틴이 정말 연금 개혁안에 대해 전혀 개입하지도 않고 몰랐다면 그게 더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2005년 당시 푸틴은 “퇴직과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것은 논의의 대상조차 아니다”라며 그 이유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노동 현장에서의 산업 재해로 인한 러시아인의 낮은 기대수명과 높은 사망률‘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3년이 지난 지금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평균 수명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16년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66.5명으로 이번에 제시된 연금개혁안에서 연급 수급을 시작할 수 있는 연령보다 1년 6개월 정도 길다. 간단히 말하면 65세에 은퇴하고 연금을 받게 된다면 평균 1년 6개월 정도 수령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셈이다. 세계은행의 조사 결과 현재 러시아 남성의 35%는 6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65세까지 생존하는 인구 비율도 43%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기대 수명은 77세로 조금 낫다. 남녀 간 수명 차이는 러시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푸틴이 지적한대로 남성들의 과도한 음주가 큰 원인을 제공한다.
또 하나 살필 점이 러시아의 지역별 수명 격차다. 러시아는 85개 연방주체(구성체)로 이뤄진 연방 국가다. 러시아 연방은 러시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46개 주(오블라스트), 9개 지방(크라이), 3개 연방시(고로드)와 러시아인 이외의 민족으로 이뤄진 22개 공화국,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등으로 이뤄졌다. 최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일부 지역이 통폐합되면서 83개의 연방 주체가 있는데 이 가운데 47개 연방주체의 평균 연령이 연금개혁안이 새로운 연금 지급 연령으로 제시한 65세 이하다. 간단히 말하면 푸틴의 연급 개혁안이 적용되면 평생 연금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수급 연령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주민이 수두룩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러시아 국민의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파이낸셜 타임스 등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현재 3604만7000명의 연금수령자가 있으며 이들의 평균 연급 수령액은 월 1만2929루블(약 201달러) 정도다. 새로운 연금 개혁안에 따르면 1969년에 태어난 모든 남성은 2019년까지 은퇴와 연금 수령 시기가 미뤄진다. 그 사이 남자들은 출생 연도에 따라 기존보다 한 살 당 6개월씩 은퇴가 미뤄진다. 새로운 연금 법안을 적용할 경우 러시아 연방 정부는 연간 2조3000억 루블(약 360억 달러)을 절감하게 된다. 사실 러시아가 연금개혁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연금 수령 대상인 고령자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연금기금의 ‘세입’보다 ‘세출’이 커졌다. 연금 운용에서 적신호가 켜진 셈이다. 자칫 조기에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연금 재정이 파탄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연급을 줄이든지 수급 연령을 조정하든지 뭔가 조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러시아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마련한 이유다. 연금개혁안은 현재 러시아 두마(하원)의 심의를 받고 있다.
BBC방송에 따르면 만일 연금개혁안이 실시되면 러시아인의 공식 은퇴 연령은 2020년까지 유럽연합(EU) 평균 수준과 거의 같아진다. EU의 평균 은퇴 연령은 남성이 65.2세이며 여성이 64.4세다. 사실 러시아의 은퇴와 연금 수급 연령은 유럽에서 가장 이르다. 심지어 느슨하다는 평가를 듣는 그리스·에스토니아보다 이르다.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정부 입김 없이 독립적인 여론조사를 하는 레바다 센터는 2013년 러시아의 이른 은퇴 연령이 오히려 노년의 빈곤을 촉진한다며 기존 정년을 연장해 노동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이른 은퇴 연령은 러시아 정부의 연금 부담을 늘려 정부까지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추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서 강해 러시아는 단단한 홍역을 치르게 됐다. 특히 평균 수명이 서유럽보다 낮은 러시아가 서유럽 수준으로 연급 지급 연령을 늘리면 어떻게 되느냐는 항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로운 연금 관련 법안은 러시아의 경제계·노동계·정부의 노사정 3자가 검토해왔는데 노동계는 논의 초기부터 개혁안에 강력하게 반발해왔다. 이에 따라 은퇴와 연금 수령 연령이 늦춰지는 방안이 발표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평소에는 푸틴 대통령의 권위와 높은 지지율에 눌려 아무런 소리도 못하던 러시아 야당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야당인 진보당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7월 1일 러시아의 20개 도시에서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러시아 변호사로 미국 예일대에 유학했던 나발니는 반부패 운동에 앞장서면서 푸틴 대통령에 반대해왔다.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를 ‘사기꾼과 도둑들의 집단’이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해왔다. 그는 “현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러시아에서도 아랍의 봄 같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며 높은 수위의 반정부 발언을 해왔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해 27.4%를 득표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있다. 러시아 대선에 출마하려고 시도했지만 지난해 연말 법원이 횡령죄를 적용해 그의 출마 자격을 무효화한 일이 있다. 반정부 성향의 대중사이에선 푸틴의 대항마로 통한다. 사사건건 푸틴 정권을 비난해왔던 러시아 공산당은 전국적인 파업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취업 사이트 ‘헤드 헌터’는 긴급 여론조사 결과 53%의 러시아인이 은퇴와 연급 수령 연령을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심지어 35%는 더 일찍 은퇴하고 연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금개혁안을 지지하는 사람은 6%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여론조사 기관인 로미르 리서처는 반대 여론이 92%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NHK방송은 연금개혁 시도가 푸틴 대통령의 인기 급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푸틴은 지난 3월 대선에서 80%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했다. 하지만 메드베데프 총리가 연금개혁안을 발표한 이후 상황이 바뀌고 있다. 반대 시위대는 ‘푸틴은 도둑놈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러시아 주요 도시의 거리를 행진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 반도를 빼앗아 병합한 이후 80%를 넘는 고공행진을 이어왔다. 하지만 지난 6월 연금제도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푸틴의 지지율은 일시에 60% 가까이로 급락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전의 수준까지 뚝 떨어진 셈이다.
NHK는 러시아 국민의 격렬한 반대와 항의에 대해 과거 소련 붕괴로 극심한 혼란과 경제위기를 겪었던 러시아인은 큰 변화 대신 안정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 지적한 점이 러시아 국민의 연금에 대한 믿음이다. 현재의 연금 지급 기준은 과거 소련의 스탈린 시절에 적용돼 혼란의 1990년대에도 계속 유지됐다. 의료와 복지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국민은 오랫동안 꾸준히 지속된 연금제도를 신뢰해왔다. 소련 이래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연금제도는 정부를 믿고 따르는 드문 제도로 평가받아왔다. 그런데 지급 연령이 바뀌면서 그런 믿음이 땅에 떨어지게 된 셈이다. 정부는 연금 재정의 유입과 지출만 고려했을 뿐 러시아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셈이다. 더구나 러시아 정부는 푸틴 정권을 물리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군과 치안기관 관계자들의 연금은 개혁 대상에서 제외했다. 러시아 일반 국민에게 위화감을 심어주는 대목이다. 연금개혁안을 ‘불평등한 개혁’이라며 국민이 화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1일 러시아 전국에서 동시에 항의 집회가 열려 8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일부 시위대는 심지어 ‘푸틴 없는 러시아를’이라는 구호까지 외쳤다. 러시아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대표는 “연금을 관 속에서 받게 된다”며 개혁안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다. 일부 시민은 “푸틴은 약속을 지키는 인물임을 믿는다”며 연급개혁안을 무효화하기를 희망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국영 텔레비전은 9월부터 ‘모스크다, 크렘린, 푸틴’이라는 프로그램을 신설해 매주 일요일 골든아워에 내보내고 있다. 주로 푸틴 대통령의 동향과 공적을 상세히 보도하고 칭송하며 옹호하는 내용이다. 시청자가 푸틴에게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푸틴의 인간적인 면모와 권위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동시에 보내고 있다. 푸틴을 홍보하는 정권 방어용 프로그램인 셈이다. 푸틴과 크렘린이 상황을 상당히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푸틴 정권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국영방송의 전파를 푸틴의 정치광고에 쓰는 것이나 진배없다.
의회로 넘어간 연금개혁 법안은 약간의 완화 조치를 거쳐 통과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러시아 국민이 항의도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푸틴 정권은 언론 통제를 강화하면서 지지율 회복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푸틴 대통령은 국민의 대내적인 불만을 대외적인 조치로 해소하는 전술을 구사해왔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외부에 적을 만들고 이를 비난하고 맞서고 대항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풀어주는 방식이다. 시리아 내전에 대대적으로 개입해 군사작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미국과 서방에 맞서면서 러시아의 국제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것이 한 사례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재정이 부족해서 국민의 은퇴와 연금 지급 시기도 미루는 판국에 막대한 전쟁 비용을 부담한 시리아에서 확전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군사적인 행동에 나서 국민의 눈길을 돌리기도 마땅치 않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 개입으로 미국과 유럽의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에게 새로운 적대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 후 이에 항의하는 미국에 맞서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푸틴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애국심이 강한 러시아인의 마음에 움직일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 푸틴 대통령이 국제 무대에서 두드러진 외교성과를 내는 방안을 고려할 가능성이 커보이는 이유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모스크바 센터의 콘스탄틴 가제 연구원은 NHK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복잡한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카스피해에서 극적인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북방 4개 도서와 관련해 차가운 관계인 일본과 평화조약이나 분쟁 종식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제 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세계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고 국민 앞에 내세우는 방안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푸틴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전격 방문하거나 모스크바로 초대해 중재 외교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모로 푸틴의 행보를 눈여겨봐야 할 때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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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새로운 연금개혁안 적용 예정
이 발표가 나오자마자 러시아 언론들은 경쟁적으로 푸틴이 2005년 밝혔던 ‘은퇴와 연금 수령 시기 조정에 반대한다’라는 내용의 비디오 클립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푸틴 대통령이 2005년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데 반대하는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당시 푸틴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절대 이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나라에서 퇴직 연령을 늦출 필요도 없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나라 경기를 부양하고 국민 이익을 위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럴 필요도 있지만 은퇴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그는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한다. 나는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데 반대한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말을 맺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러시아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대변인이 곧바로 나섰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그 당시와는 상황이 바뀌었다”며 푸틴의 13년 만에 말바꾸기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페스코프는 역할 자체도 그렇지만 항상 강한 톤으로 푸틴의 주장을 전해왔기에 ‘푸틴의 입’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페스코프는 “당시 발언은 이미 13년 전에 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물론 그동안 우리는 인구 구성이 크게 변하는 상황을 오래동안 지켜봤으며 경제 상황과 국제 시장도 변화해왔다”라며 “어떤 나라도 변화 없이 진공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라며 연금 개혁안을 옹호했다. 인구의 노령화로 인해 연금 지출 부담이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기간은 늘리고, 연금 수급 시기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며 연금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페스코프는 “푸틴 대통령은 새로운 연금 개혁안 마련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메드베데프 총리의 내각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누가 봐도 연금 개혁에 대한 푸틴의 책임론과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교묘하게 피해나가려는 의도의 발언이다.
2005년 푸틴 “연금 수령 시기 늦추는 데 반대”
2005년 당시 푸틴은 “퇴직과 연금 수령 시기를 늦추는 것은 논의의 대상조차 아니다”라며 그 이유로 ‘알코올 중독과 약물 남용, 노동 현장에서의 산업 재해로 인한 러시아인의 낮은 기대수명과 높은 사망률‘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13년이 지난 지금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평균 수명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16년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66.5명으로 이번에 제시된 연금개혁안에서 연급 수급을 시작할 수 있는 연령보다 1년 6개월 정도 길다. 간단히 말하면 65세에 은퇴하고 연금을 받게 된다면 평균 1년 6개월 정도 수령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셈이다. 세계은행의 조사 결과 현재 러시아 남성의 35%는 60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 65세까지 생존하는 인구 비율도 43%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기대 수명은 77세로 조금 낫다. 남녀 간 수명 차이는 러시아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푸틴이 지적한대로 남성들의 과도한 음주가 큰 원인을 제공한다.
또 하나 살필 점이 러시아의 지역별 수명 격차다. 러시아는 85개 연방주체(구성체)로 이뤄진 연방 국가다. 러시아 연방은 러시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46개 주(오블라스트), 9개 지방(크라이), 3개 연방시(고로드)와 러시아인 이외의 민족으로 이뤄진 22개 공화국,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등으로 이뤄졌다. 최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일부 지역이 통폐합되면서 83개의 연방 주체가 있는데 이 가운데 47개 연방주체의 평균 연령이 연금개혁안이 새로운 연금 지급 연령으로 제시한 65세 이하다. 간단히 말하면 푸틴의 연급 개혁안이 적용되면 평생 연금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수급 연령 이전에 세상을 떠나는 주민이 수두룩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러시아 국민의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다. 파이낸셜 타임스 등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현재 3604만7000명의 연금수령자가 있으며 이들의 평균 연급 수령액은 월 1만2929루블(약 201달러) 정도다. 새로운 연금 개혁안에 따르면 1969년에 태어난 모든 남성은 2019년까지 은퇴와 연금 수령 시기가 미뤄진다. 그 사이 남자들은 출생 연도에 따라 기존보다 한 살 당 6개월씩 은퇴가 미뤄진다. 새로운 연금 법안을 적용할 경우 러시아 연방 정부는 연간 2조3000억 루블(약 360억 달러)을 절감하게 된다.
러시아 연방 정부, 연감 360억 달러 절감 효과
BBC방송에 따르면 만일 연금개혁안이 실시되면 러시아인의 공식 은퇴 연령은 2020년까지 유럽연합(EU) 평균 수준과 거의 같아진다. EU의 평균 은퇴 연령은 남성이 65.2세이며 여성이 64.4세다. 사실 러시아의 은퇴와 연금 수급 연령은 유럽에서 가장 이르다. 심지어 느슨하다는 평가를 듣는 그리스·에스토니아보다 이르다.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정부 입김 없이 독립적인 여론조사를 하는 레바다 센터는 2013년 러시아의 이른 은퇴 연령이 오히려 노년의 빈곤을 촉진한다며 기존 정년을 연장해 노동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이른 은퇴 연령은 러시아 정부의 연금 부담을 늘려 정부까지 가난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연금 지급 시기를 늦추면 손해를 본다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서 강해 러시아는 단단한 홍역을 치르게 됐다. 특히 평균 수명이 서유럽보다 낮은 러시아가 서유럽 수준으로 연급 지급 연령을 늘리면 어떻게 되느냐는 항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로운 연금 관련 법안은 러시아의 경제계·노동계·정부의 노사정 3자가 검토해왔는데 노동계는 논의 초기부터 개혁안에 강력하게 반발해왔다. 이에 따라 은퇴와 연금 수령 연령이 늦춰지는 방안이 발표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평소에는 푸틴 대통령의 권위와 높은 지지율에 눌려 아무런 소리도 못하던 러시아 야당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야당인 진보당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7월 1일 러시아의 20개 도시에서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러시아 변호사로 미국 예일대에 유학했던 나발니는 반부패 운동에 앞장서면서 푸틴 대통령에 반대해왔다.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를 ‘사기꾼과 도둑들의 집단’이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해왔다. 그는 “현 정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러시아에서도 아랍의 봄 같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며 높은 수위의 반정부 발언을 해왔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해 27.4%를 득표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가 있다. 러시아 대선에 출마하려고 시도했지만 지난해 연말 법원이 횡령죄를 적용해 그의 출마 자격을 무효화한 일이 있다. 반정부 성향의 대중사이에선 푸틴의 대항마로 통한다. 사사건건 푸틴 정권을 비난해왔던 러시아 공산당은 전국적인 파업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취업 사이트 ‘헤드 헌터’는 긴급 여론조사 결과 53%의 러시아인이 은퇴와 연급 수령 연령을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심지어 35%는 더 일찍 은퇴하고 연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금개혁안을 지지하는 사람은 6%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여론조사 기관인 로미르 리서처는 반대 여론이 92%에 이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일본 NHK방송은 연금개혁 시도가 푸틴 대통령의 인기 급락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푸틴은 지난 3월 대선에서 80%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당선했다. 하지만 메드베데프 총리가 연금개혁안을 발표한 이후 상황이 바뀌고 있다. 반대 시위대는 ‘푸틴은 도둑놈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러시아 주요 도시의 거리를 행진했다. 사실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 반도를 빼앗아 병합한 이후 80%를 넘는 고공행진을 이어왔다. 하지만 지난 6월 연금제도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푸틴의 지지율은 일시에 60% 가까이로 급락했다. 크림반도 합병 이전의 수준까지 뚝 떨어진 셈이다.
NHK는 러시아 국민의 격렬한 반대와 항의에 대해 과거 소련 붕괴로 극심한 혼란과 경제위기를 겪었던 러시아인은 큰 변화 대신 안정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 지적한 점이 러시아 국민의 연금에 대한 믿음이다. 현재의 연금 지급 기준은 과거 소련의 스탈린 시절에 적용돼 혼란의 1990년대에도 계속 유지됐다. 의료와 복지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국민은 오랫동안 꾸준히 지속된 연금제도를 신뢰해왔다. 소련 이래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러시아에서 연금제도는 정부를 믿고 따르는 드문 제도로 평가받아왔다. 그런데 지급 연령이 바뀌면서 그런 믿음이 땅에 떨어지게 된 셈이다. 정부는 연금 재정의 유입과 지출만 고려했을 뿐 러시아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셈이다. 더구나 러시아 정부는 푸틴 정권을 물리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군과 치안기관 관계자들의 연금은 개혁 대상에서 제외했다. 러시아 일반 국민에게 위화감을 심어주는 대목이다. 연금개혁안을 ‘불평등한 개혁’이라며 국민이 화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1일 러시아 전국에서 동시에 항의 집회가 열려 8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일부 시위대는 심지어 ‘푸틴 없는 러시아를’이라는 구호까지 외쳤다. 러시아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 대표는 “연금을 관 속에서 받게 된다”며 개혁안에 대해 야유를 퍼부었다. 일부 시민은 “푸틴은 약속을 지키는 인물임을 믿는다”며 연급개혁안을 무효화하기를 희망했다.
여론 무마하려 9월부터 국영방송에서 정권 홍보
의회로 넘어간 연금개혁 법안은 약간의 완화 조치를 거쳐 통과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러시아 국민이 항의도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푸틴 정권은 언론 통제를 강화하면서 지지율 회복 방안을 강구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푸틴 대통령은 국민의 대내적인 불만을 대외적인 조치로 해소하는 전술을 구사해왔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외부에 적을 만들고 이를 비난하고 맞서고 대항하는 방식으로 ‘위대한 러시아’에 대한 국민의 갈증을 풀어주는 방식이다. 시리아 내전에 대대적으로 개입해 군사작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미국과 서방에 맞서면서 러시아의 국제적인 존재감을 보여준 것이 한 사례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재정이 부족해서 국민의 은퇴와 연금 지급 시기도 미루는 판국에 막대한 전쟁 비용을 부담한 시리아에서 확전을 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군사적인 행동에 나서 국민의 눈길을 돌리기도 마땅치 않다. 러시아는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동부 내전 개입으로 미국과 유럽의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반군에게 새로운 적대적인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 후 이에 항의하는 미국에 맞서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푸틴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면 애국심이 강한 러시아인의 마음에 움직일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하다. 푸틴 대통령이 국제 무대에서 두드러진 외교성과를 내는 방안을 고려할 가능성이 커보이는 이유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모스크바 센터의 콘스탄틴 가제 연구원은 NHK에 “(러시아, 이란,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등과 복잡한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카스피해에서 극적인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북방 4개 도서와 관련해 차가운 관계인 일본과 평화조약이나 분쟁 종식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낸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제 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세계적인 지도자임을 증명하는 외교적 승리를 거두고 국민 앞에 내세우는 방안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푸틴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전격 방문하거나 모스크바로 초대해 중재 외교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러모로 푸틴의 행보를 눈여겨봐야 할 때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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