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를 순서대로 반드시 겪지는 않는다는 연구 결과 나와 사별한 사람은 처음엔 현실을 부인하다가 그 다음엔 떠난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쓴다. / 사진:GETTY IMAGES BANK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데 따르는 심리적·생리적 반응을 ‘비탄’이라고 부른다. 외부 세계에 관심이 줄어들고, 추억에 집착하며, 슬픔이나 회한에 젖고, 수면 장애에 시달리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그런 비탄에서 헤어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 끔찍한 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대개 고통이 서서히 줄어든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비탄을 겪는 사람과 그 문제를 치료하는 의료진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흔히 전문가들은 사별 과정을 단계별로 설명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5단계’다. 부인(denial)-분노(anger)-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 단계를 가리킨다. 실제로 이런 단계에 해당하는 증거도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비탄의 경험은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르다. 따라서 명확히 정해진 단계로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 5단계 중 몇 단계가 생략될 수 있고 아니면 단계의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또 특정 단계가 한 차례 이상 나타나거나 단계별 진행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 사별한 사람의 나이와 사망 원인도 비탄의 극복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먼저 비탄의 단계를 정의한 과학자는 영국의 정신과의사 존 볼비였다(볼비는 아기·어린이가 자신을 돌봐주는 가까운 인물에게 매우 강한 정서적 경험을 느낀다는 ‘애착 이론’의 창시자로 더 유명하다). 그와 동료 콜린 파크스는 사별에 따른 비탄의 과정을 4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충격과 무감각이다. 상실감을 용납하지 않거나 현실로 믿지 않는 상태다. 두 번째 단계는 그리움과 갈망, 그리고 공허감이 특징이다. 그 단계에선 사별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쓴다. 세 번째 단계에선 절망과 심리적 해체가 찾아든다. 가망이 없다고 느끼며 때로는 분노하면서 우울함 속에 침잠한다. 마지막 단계는 재편성과 회복이다. 희망이 다시 생기면서 서서히 평상의 리듬을 되찾는다.
볼비와 파크스가 정의한 이 모델은 1960년대 초 처음 제시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널리 알려진 이론은 1969년 스위스계 미국인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개발한 ‘5단계’ 모델이다. 이 모델은 원래 말기 질환을 앓는 환자의 반응을 정의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모델은 환자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반응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상실 사례에도 적용됐다.
퀴블러-로스 모델의 첫 단계인 ‘부인’은 상실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려는 마음 상태로 볼비-파크스가 충격과 무감각으로 이름 붙인 단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인 ‘분노’는 볼비와 파크스가 제시한 모델과 차별된다. 사별했거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왜 그런 상실과 질병이 일어나며 특히 왜 하필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따지며 화에 몰입된 상태다. 세 번째 단계인 ‘타협’에선 과거로 돌아가 질병이나 죽음을 일으킨 원인을 해결할 수 있었기를 바라면서 ‘내가 만약 이랬다면 괜찮았을텐데’라는 생각으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단계는 ‘우울’과 ‘수용’이다. 절망과 침잠이 서서히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의 인정에 자리를 내주고 상실과 화해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퀴블러-로스 모델의 각 단계는 체계적인 연구가 아니라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는 임상적인 관찰을 통해 정의됐다. 이 다섯 가지 단계가 비탄을 겪은 사람에게 실제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증거가 많진 않지만 일부 일화적인 근거는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한 연구는 고령자 233명을 배우자의 자연사 후 2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퀴블러-로스 모델이 제시한 ‘5단계’와 관련해 그들의 경험을 분석한 연구였다. 그 결과 퀴블러-로스의 이론에 맞게 다섯 단계의 경험 각각이 예측된 순서에 따라 고조됐다. 상실 직후 현실의 불신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가 그 뒤로 점차 줄어들었다. 그리움과 분노, 우울이 각각 4, 5, 6개월째에 최고조였다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 다음 사별 후 2년이 흐르는 동안 서서히 상실을 수용하는 마음 자세가 우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연구의 일부 측면은 퀴블러-로스 모델과 상반됐다.
첫째, 상실 직후엔 현실을 불신하는 마음 상태가 두드러졌지만 비탄의 어느 시점에서나 그런 불신이 현실을 수용하는 자세보다 강하진 않았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에게 현실 수용은 비탄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우세하면서 계속 커지는 경험이라는 뜻이다.
둘째, 퀴블러-로스의 ‘5단계’ 모델에선 빠져 있지만 볼비와 파크스가 제시한 모델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갈망이 가장 두드러진 부정적 경험이었다. 비탄을 임상적인 정의의 우울에 국한시키는 개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다. 피험자들이 경험한 우울은 그리움보다 약했다.
그러나 이 연구 결과는 고령자와 자연사만 다뤘기 때문에 일반화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다른 주요 연구에 따르면 젊은 성인의 경우 비탄의 전형적인 패턴이 그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 그리움이 현실 부정보다 먼저 최고조에 이르렀고, 2년 내내 우울함이 변함 없는 수준으로 지속됐다. 더구나 그리움과 분노, 불신이 사별 후 거의 2년째 가서 다시 고조되면서 수용 자세가 줄어들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폭력적인 원인으로 잃게 된 젊은 성인은 일반적인 패턴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경우 현실을 부인하는 자세가 첫 몇 달 동안 강하게 지속되면서 우울이 처음엔 줄어들었다가 사망 2주기가 다가올 때 다시 고조됐다.
이런 결과는 피험자 개인의 반응 과정이라기보다 연구 대상이 된 표본의 평균적인 반응을 반영한다. 퀴블러-로스 모델의 단계가 전체 표본의 통계적 경향을 부분적으로 반영한다고 해도 개인적인 비탄 경험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그 모델이 보여주지 않는다.
실제로 배우자를 잃기 직전부터 잃은 후까지 성인 205명을 18개월 동안 추적 조사한 연구는 다섯 가지 서로 다른 패턴을 확인했다. 예를 들어 일부는 상실 전 우울에 빠졌다가 상실 후 회복됐다. 일부는 우울이 오래 지속됐다. 또 일부는 상당히 회복이 빨랐고 전반적으로 우울의 낮은 수준을 겪었다.
퀴블러-로스도 이 ‘5단계’ 모델이 비탄을 겪는 과정의 정확한 순서라기보다 회복에 이르는 이상적인 단계를 가리킨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현재 전문가들은 사별 후 겪는 단계로서 퀴블러-로스의 모델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인간 행동에 관한 다른 ‘단계’ 이론도 지금은 전문가들의 신뢰를 거의 받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런 단점에도 퀴블러-로스의 분석은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다만 그 모델에서 말하는 ‘단계’를 ‘상태’로 바꾸면 더 나을 듯하다. ‘상태’는 각자가 상실을 통해 겪는 슬픔 속에서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두드러지는 경험이라는 뜻으로 순서의 의미를 갖는 ‘단계’와 다르기 때문이다.
- 닉 해슬람
※ [필자는 호주 멜버른대학 심리학 교수다. 이 글은 온라인 매체 컨버세이션에 먼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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