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 압박하는 원가공개 규제] 공정경제 앞세워 툭하면 “원가 까라”
[산업계 압박하는 원가공개 규제] 공정경제 앞세워 툭하면 “원가 까라”
건설·프랜차이즈·통신 업계 등 압박… 전문가들 “시장경제 포기하겠다는 발상” 비판 “원가 공개가 개혁적인가? 장사하는 것인데, 10배 남는 장사도 있고 10배 밑지는 장사도 있고, 결국 벌고 못벌고 하는 것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경제계의 압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의 소신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6월 아파트 분양가 원가 공개를 반대하면서 발언한 내용이다. 그가 말한 소신은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시장의 자율성을 대변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14년 여가 흐른 지금, 노무현의 후계자라 불리는 문재인 정부에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정부가 연이어 원가 공개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올해부터 공공택지에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 항목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프랜차이즈 업계에선 가맹사업자의 제품 원가 공개가 올 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해 이동통신요금 원가 공개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또 택배 업체가 택배요금 원가를 국토부 장관에게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가 업계의 반발에 무산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원가 공개 규제에 대해 실효성이 떨어지고,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만 마비시킨다고 우려한다.
정부발(發) 원가 공개 ‘폭풍’에 휩싸인 대표적인 영역은 부동산 시장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1월 15일 공공택지 내 공공·민간아파트의 분양가 공시 항목을 현행 12개에서 62개로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한 주택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지난 1월부터 개정안이 시행돼 토목비와 건축비 항목에 포괄적으로 들어 있던 조경 공사, 정화조 공사, 타일 및 도배 공사, 흙막이 공사 등 62가지가 세부 내역으로 표시된다. 땅값은 물론 건축비의 상세 내역을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서울시 산하 SH와 경기도 산하 경기도시공사도 비슷한 수준으로 분양 아파트 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다.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차액가맹금 공개가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4월 공정위는 가맹사업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가맹본부가 공정위에 제출하는 정보공개서에 차액가맹금 정보를 함께 공개토록 하는 것이 골자다. 지난해부터 가맹본부는 구입 요구 품목별 차액가맹금 수취 여부, 가맹점 1곳당 전년도에 가맹본부에게 지급한 차액가맹금의 평균 액수, 가맹점 1곳당 전년도 매출액 대비 차액가맹금의 평균 비율, 주요 품목별 전년도 공급 가격의 상·하한 등을 공개해야 한다. 정부는 당초 가맹점주가 본부로부터 반드시 사야 하는 ‘필수품목’ 가격을 전부 공개하려 했다. 하지만 반대가 거세지자 지금은 매출액 기준 상위 50% 상품으로 한정했다.
이동통신 업계에는 이미 정부의 원가 공개 후폭풍이 불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4월 “2세대(2G)·3세대(3G) 통신비 원가 자료를 공개하라”는 대법원 판결 후 자진해서 LTE 원가 자료까지 공개하기로 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지난해 8월 정부로부터 받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이동통신 3사의 2G, 3G, LTE 원가 관련 회계자료와 인가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SK텔레콤 등 이통사가 막대한 초과이익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통 업계는 모호한 기준에 따른 주장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국회에는 통신비 변경 때 소비자 및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심의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발의됐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스마트폰 출고가 인하를 위해 제조 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은행 가산금리 원가내역도 뜨거운 감자다. 지난해 금감원 조사에서 일부 은행들이 가산금리 인하 요인이 발생했음에도 인하하지 않고 수년 간 고정값을 적용하거나, 산출 근거 없이 불합리하게 가산금리를 부과한 사례 등이 적발되면서 금융당국이 대출금리 산정내역 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7월 ‘은행권 대출금리 중에서 가산금리(원가 내역)도 공개해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느 정도 들여다보는 것이 맞다”고 답했다. 그는 “은행들의 영업 노하우나 기밀사항을 건드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점은 유념하겠다”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대출금리 모범규준’을 개정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가산금리 체계를 손댈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밝혔다.
윤 원장은 보험상품의 사업비(수수료)와 사업비를 감안한 실질수익률 공개도 공론화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소비자가 보험상품을 제대로 비교해 선택하기 어려운 것도 불완전판매가 많은 이유 중 하나”라며 “소비자들이 보험료의 어느 정도가 보험사의 사업비로 쓰이는지 알고 보험상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비 공개가 보험상품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사업비가 공개되는 보험상품은 저축성보험과 자동차보험뿐이다. 저축성보험은 전체 납입보험료의 약 8~15%, 자동차보험은 18% 전후가 사업비로 나간다. 종신보험·암보험·어린이보험 등의 보장성보험은 사업비가 공개되지 않는다.
물류·운송 업계에서는 택배요금을 두고 정부가 나서서 무리하게 원가 공개를 요구했다가 민간의 반발에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국토부는 화물을 집화·분류·배송하는 운송사업자(택배 업체)에도 신고요금제를 도입하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일부 개정을 추진했다. 택배요금을 택배 업체가 국토부 장관에게 신고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통해 단가(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해 택배 기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법예고 후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법제처 등 관계기관 협의에서 택배요금 신고제는 없던 일이 됐다.
최근 정부의 강제 원가 공개는 산업을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원가 공개 카드를 꺼내면서 내세우는 이유는 비슷하다. 원가를 공개해 소비자가격을 내리겠다는 것. 다른 제품과 비교하거나 공개 내역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쉬워져 결과적으로 제품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이른바 ‘갑을’ 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내는 관행을 없애겠다는 목적도 있다. 프랜차이즈 차액가맹금 공개에 대해 정부는 “그간 본부-점주 간 물품 공급 계약에서 마진과 관련된 정보가 없었다”며 “정보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을(乙)’인 점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규제 대상이 되는 사업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분야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이 항변하는 근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반시장적 규제라는 측면이다. 원가에는 비용 절감을 위한 기업의 경영전략이 녹아 있는데, 이를 밝히라는 것은 기업의 핵심 비밀을 공개하라는 뜻과 마찬가지라는 비판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개인과 국가에 사생활과 국가 기밀을 보장하는 것처럼, 기업에게도 최소한으로 보장돼야 할 영업비밀이 있다”며 “이 영역을 침해하는 건 시장경제를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경제를 망가뜨리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이어 “가령 통신요금의 경우 마케팅 비용처럼 일정 수준의 정보는 공개할 수 있겠지만, 원가 같은 경우는 도를 넘어선 영역”이라고 말했다.
이윤 낼 여지를 주지 않으면 기업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는 “원가를 절감해 경쟁력을 높인 업체에 정부가 나서서 페널티를 주는 격이고 이윤을 죄악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원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기업에 도리어 불이익이 돌아온다면 기업들의 일자리·투자 창출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가격을 낮춰 소비자후생이 높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경쟁을 저해하는 요소가 돼 기업들의 고용·투자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원가 공개가 가격 하락이라는 결과물을 내지 못할 수 있다. 원가 절감을 하려는 기업의 혁신 동기를 제거해 원가 자체가 오르면, 정책 의도와 달리 상품·서비스 가격이 오히려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가 공개가 품질이나 소비자 편익 저하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가령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의 경우, 신규 주택 공급이 줄고, 값싼 자재를 사용해 아파트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해당 업계의 출혈경쟁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특히 원가와 함께 마진률이 공개되면, 이미 경쟁이 치열한 업종에서 제품·서비스 혁신이나 경쟁력 제고보다는 '제 살 깎아먹기'식 단가 후려치기만 늘면서 업계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산업계에서는 정부의 원가 공개 규제를 두고 “정부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 규제 행위”라고 비난한다. 정부가 지난해 5월 대기업이 납품단가를 낮추기 위해 하청 업체에 회계 등 각종 경영정보를 요구하는 관행을 불법으로 다루고 제재하기로 한 것을 두고 나오는 얘기다. 당시 홍종학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은 “기술자료를 요구하거나 납품단가를 깎기 위해 각종 경영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범죄행위”라며 “이런 관행으로 중소기업 경쟁력이 약해졌고 결국 대기업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주어만 바뀌었을 뿐인데 기업이 하면 범죄행위인 것이 정부가 하면 상생조치로 바뀐다”고 하소연했다.
규제의 정당성과 함께 비현실성도 자주 거론되는 문제다. 일단 원가 산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업종별로, 또 동종 업계 안에서도 업체에 따라 가격 산정 방식이나 사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으로 원가를 공개하면 왜곡된 정보가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관련 부처 협의 과정에서 무산된 택배요금 원가 공개도 이런 점이 걸림돌이 됐다. 갈수록 다양한 형태의 택배 물량이 쏟아져 일괄적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시민단체에서 공개한 통신료를 두고 이통사들이 반발하는 점도 이 부분이다.
경제학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원가로 볼 것인지도 모호하다고 말한다. 특히 원가에 반영되는 디자인, 브랜드, 위험 부담, 혁신성 등 무형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문제다. 가령 제약사가 개발하는 신약의 경우 원가에는 그간 들인 연구·개발 비용과 함께 시간, 실패 위험에 대한 부담, 초기 개발자로서의 보상이 반영된다. 그런데 단순한 원가 공개 방식으로는 제품 생산에 들어간 화학제품과 인건비, 공장 가동비용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격에는 시장의 크기와 특성, 해당 제품의 희소성 등도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산 중턱이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스크림과 막걸리 한 잔의 가격이 마트와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가격과 다른 원리다.
적정 이윤의 수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이 제품으로 얼마를 남겨야 적당한가’를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통큰치킨’으로 촉발된 치킨 가격 공방이다. 롯데마트가 프랜차이즈 대비 절반 수준의 치킨을 내놓으면서 ‘그동안 치킨집이 얼마나 남겨 먹은 것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치킨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스스로 원가를 공개하며 “대형마트는 치킨을 ‘미끼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역마진으로도 팔 수 있는 것인데, 단순히 가격만 비교해 치킨집이 폭리를 취한다고 모는 건 부당하다”면 반발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 자영업자는 “정성껏 만들어 3000원 남기면 부당한거고, 대충 만들어도 1000원 남기면 미덕이 되는 건가”라며 일괄적인 원가와 이윤 수준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적정 가격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그 방법은 인위적인 가격통제가 아니라 독과점 구조의 해소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정 업계에서 업체가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건 독과점 구조에서 경쟁의 압력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산업에선 자유로운 진입과 탈퇴만으로도 최적의 가격이 산출될 수 있는데, 일부 산업에서 정부가 진입을 막고 수량을 통제하면서 가격을 두고 불만이 나오니까 억지로 가격까지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가공개를 두고 크게 논란이 되지 않는 분야도 있다. 공공요금이다. 영국·동유럽 등 일부 국가의 경우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이 공급하는 전력·가스 등의 제조원가는 공개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격이 책정된다. 국내에서도 2011년부터 전기, 열차, 도시가스 도매, 광역상수도 도매요금 등 6개 주요 공공요금 원가를 공개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독과점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 결과다. 공기업 한 곳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시장 경쟁 요금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요금을 원가에 연동시킬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하나의 공기업을 통해 이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통신 요금 원가 공개에 대한 법원 판결의 주요 논거 역시 이동통신 서비스가 전파 및 주파수라는 공공재가 한정적인 사업자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에도 원가 공개는 정당성과 실효성 문제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분양가 원가 공개’로 아파트 가격을 낮추겠다고 공약하며 군불을 지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장사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김근태 원내대표가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권 내부의 반발에 밀려 노 전 대통령은 소신을 접고 한발 물러섰다. 그래서 나온 게 일종의 우회적인 원가 공개 방식인 ‘분양가 상한제’다. 하지만 이후 건설사들이 주택 공급을 줄이면서 전세대란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제도는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
이명박 정권 때도 ‘원가 공개’ 카드로 기업을 압박했다. 2011년 이른바 ‘기름값 소동’이 그 예다. 당시 국제유가가 내린 만큼 국내 휘발유 가격이 떨어지지 않자 이 전 대통령은 “기름값이 묘하다”는 화두를 던졌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유소들은 가격이 공개돼 투명한 경쟁을 하지만 정유사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거들었고,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회계사 출신인 내가 직접 기름값 원가를 계산해 보겠다”며 총대를 멨다. 몇달 간 정유사들을 압박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정유 업체를 닦달해 3개월 시한으로 L 당 100원씩 강제로 기름값을 내려 체면치레한 게 전부다. 되레 ‘기름값의 절반 이상인 세금이 주범’이라며 유류세를 인하하라는 역풍을 맞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근 정부가 연이어 원가 공개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올해부터 공공택지에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 항목을 대폭 늘리기로 했다. 프랜차이즈 업계에선 가맹사업자의 제품 원가 공개가 올 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해 이동통신요금 원가 공개를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또 택배 업체가 택배요금 원가를 국토부 장관에게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가 업계의 반발에 무산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원가 공개 규제에 대해 실효성이 떨어지고, 시장의 자율조절 기능만 마비시킨다고 우려한다.
정부발(發) 원가 공개 ‘폭풍’에 휩싸인 대표적인 영역은 부동산 시장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11월 15일 공공택지 내 공공·민간아파트의 분양가 공시 항목을 현행 12개에서 62개로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한 주택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지난 1월부터 개정안이 시행돼 토목비와 건축비 항목에 포괄적으로 들어 있던 조경 공사, 정화조 공사, 타일 및 도배 공사, 흙막이 공사 등 62가지가 세부 내역으로 표시된다. 땅값은 물론 건축비의 상세 내역을 공개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서울시 산하 SH와 경기도 산하 경기도시공사도 비슷한 수준으로 분양 아파트 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다.
프랜차이즈 차액가맹금 정보 공개
이동통신 업계에는 이미 정부의 원가 공개 후폭풍이 불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4월 “2세대(2G)·3세대(3G) 통신비 원가 자료를 공개하라”는 대법원 판결 후 자진해서 LTE 원가 자료까지 공개하기로 했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는 지난해 8월 정부로부터 받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이동통신 3사의 2G, 3G, LTE 원가 관련 회계자료와 인가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SK텔레콤 등 이통사가 막대한 초과이익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통 업계는 모호한 기준에 따른 주장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국회에는 통신비 변경 때 소비자 및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심의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도 발의됐다. 한편 정치권 일각에서는 스마트폰 출고가 인하를 위해 제조 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은행 가산금리 원가내역도 뜨거운 감자다. 지난해 금감원 조사에서 일부 은행들이 가산금리 인하 요인이 발생했음에도 인하하지 않고 수년 간 고정값을 적용하거나, 산출 근거 없이 불합리하게 가산금리를 부과한 사례 등이 적발되면서 금융당국이 대출금리 산정내역 공개를 추진하고 있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7월 ‘은행권 대출금리 중에서 가산금리(원가 내역)도 공개해야 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어느 정도 들여다보는 것이 맞다”고 답했다. 그는 “은행들의 영업 노하우나 기밀사항을 건드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점은 유념하겠다”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대출금리 모범규준’을 개정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가산금리 체계를 손댈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밝혔다.
윤 원장은 보험상품의 사업비(수수료)와 사업비를 감안한 실질수익률 공개도 공론화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소비자가 보험상품을 제대로 비교해 선택하기 어려운 것도 불완전판매가 많은 이유 중 하나”라며 “소비자들이 보험료의 어느 정도가 보험사의 사업비로 쓰이는지 알고 보험상품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업비 공개가 보험상품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사업비가 공개되는 보험상품은 저축성보험과 자동차보험뿐이다. 저축성보험은 전체 납입보험료의 약 8~15%, 자동차보험은 18% 전후가 사업비로 나간다. 종신보험·암보험·어린이보험 등의 보장성보험은 사업비가 공개되지 않는다.
물류·운송 업계에서는 택배요금을 두고 정부가 나서서 무리하게 원가 공개를 요구했다가 민간의 반발에 흐지부지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국토부는 화물을 집화·분류·배송하는 운송사업자(택배 업체)에도 신고요금제를 도입하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일부 개정을 추진했다. 택배요금을 택배 업체가 국토부 장관에게 신고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통해 단가(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해 택배 기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법예고 후 업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법제처 등 관계기관 협의에서 택배요금 신고제는 없던 일이 됐다.
최근 정부의 강제 원가 공개는 산업을 막론하고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원가 공개 카드를 꺼내면서 내세우는 이유는 비슷하다. 원가를 공개해 소비자가격을 내리겠다는 것. 다른 제품과 비교하거나 공개 내역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쉬워져 결과적으로 제품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이른바 ‘갑을’ 관계를 이용해 이득을 내는 관행을 없애겠다는 목적도 있다. 프랜차이즈 차액가맹금 공개에 대해 정부는 “그간 본부-점주 간 물품 공급 계약에서 마진과 관련된 정보가 없었다”며 “정보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을(乙)’인 점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 가격 낮추고 갑을 관행 해소하겠다지만…
이윤 낼 여지를 주지 않으면 기업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문철우 성균관대 경영학부 교수는 “원가를 절감해 경쟁력을 높인 업체에 정부가 나서서 페널티를 주는 격이고 이윤을 죄악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원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기업에 도리어 불이익이 돌아온다면 기업들의 일자리·투자 창출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오동윤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가격을 낮춰 소비자후생이 높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경쟁을 저해하는 요소가 돼 기업들의 고용·투자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원가 공개가 가격 하락이라는 결과물을 내지 못할 수 있다. 원가 절감을 하려는 기업의 혁신 동기를 제거해 원가 자체가 오르면, 정책 의도와 달리 상품·서비스 가격이 오히려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가 공개가 품질이나 소비자 편익 저하로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가령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의 경우, 신규 주택 공급이 줄고, 값싼 자재를 사용해 아파트 품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해당 업계의 출혈경쟁이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특히 원가와 함께 마진률이 공개되면, 이미 경쟁이 치열한 업종에서 제품·서비스 혁신이나 경쟁력 제고보다는 '제 살 깎아먹기'식 단가 후려치기만 늘면서 업계 전체가 망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어”
규제의 정당성과 함께 비현실성도 자주 거론되는 문제다. 일단 원가 산정이 어렵다는 점이다. 업종별로, 또 동종 업계 안에서도 업체에 따라 가격 산정 방식이나 사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인 기준으로 원가를 공개하면 왜곡된 정보가 제공될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관련 부처 협의 과정에서 무산된 택배요금 원가 공개도 이런 점이 걸림돌이 됐다. 갈수록 다양한 형태의 택배 물량이 쏟아져 일괄적인 기준을 잡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시민단체에서 공개한 통신료를 두고 이통사들이 반발하는 점도 이 부분이다.
경제학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원가로 볼 것인지도 모호하다고 말한다. 특히 원가에 반영되는 디자인, 브랜드, 위험 부담, 혁신성 등 무형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문제다. 가령 제약사가 개발하는 신약의 경우 원가에는 그간 들인 연구·개발 비용과 함께 시간, 실패 위험에 대한 부담, 초기 개발자로서의 보상이 반영된다. 그런데 단순한 원가 공개 방식으로는 제품 생산에 들어간 화학제품과 인건비, 공장 가동비용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가격에는 시장의 크기와 특성, 해당 제품의 희소성 등도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산 중턱이나 정상에서 만나게 되는 아이스크림과 막걸리 한 잔의 가격이 마트와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가격과 다른 원리다.
적정 이윤의 수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이 제품으로 얼마를 남겨야 적당한가’를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0년 ‘통큰치킨’으로 촉발된 치킨 가격 공방이다. 롯데마트가 프랜차이즈 대비 절반 수준의 치킨을 내놓으면서 ‘그동안 치킨집이 얼마나 남겨 먹은 것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자 치킨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스스로 원가를 공개하며 “대형마트는 치킨을 ‘미끼상품’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역마진으로도 팔 수 있는 것인데, 단순히 가격만 비교해 치킨집이 폭리를 취한다고 모는 건 부당하다”면 반발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서 한 자영업자는 “정성껏 만들어 3000원 남기면 부당한거고, 대충 만들어도 1000원 남기면 미덕이 되는 건가”라며 일괄적인 원가와 이윤 수준을 강요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적정 가격을 찾으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그 방법은 인위적인 가격통제가 아니라 독과점 구조의 해소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특정 업계에서 업체가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건 독과점 구조에서 경쟁의 압력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부분의 산업에선 자유로운 진입과 탈퇴만으로도 최적의 가격이 산출될 수 있는데, 일부 산업에서 정부가 진입을 막고 수량을 통제하면서 가격을 두고 불만이 나오니까 억지로 가격까지 통제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가공개를 두고 크게 논란이 되지 않는 분야도 있다. 공공요금이다. 영국·동유럽 등 일부 국가의 경우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기업이 공급하는 전력·가스 등의 제조원가는 공개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가격이 책정된다. 국내에서도 2011년부터 전기, 열차, 도시가스 도매, 광역상수도 도매요금 등 6개 주요 공공요금 원가를 공개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독과점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 결과다. 공기업 한 곳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시장 경쟁 요금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요금을 원가에 연동시킬 수밖에 없다. 정부가 하나의 공기업을 통해 이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통신 요금 원가 공개에 대한 법원 판결의 주요 논거 역시 이동통신 서비스가 전파 및 주파수라는 공공재가 한정적인 사업자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가격 통제보다 독과점 구조 개선이 중요
이명박 정권 때도 ‘원가 공개’ 카드로 기업을 압박했다. 2011년 이른바 ‘기름값 소동’이 그 예다. 당시 국제유가가 내린 만큼 국내 휘발유 가격이 떨어지지 않자 이 전 대통령은 “기름값이 묘하다”는 화두를 던졌다. 윤증현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유소들은 가격이 공개돼 투명한 경쟁을 하지만 정유사들은 그러지 않는다”며 거들었고,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은 “회계사 출신인 내가 직접 기름값 원가를 계산해 보겠다”며 총대를 멨다. 몇달 간 정유사들을 압박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정유 업체를 닦달해 3개월 시한으로 L 당 100원씩 강제로 기름값을 내려 체면치레한 게 전부다. 되레 ‘기름값의 절반 이상인 세금이 주범’이라며 유류세를 인하하라는 역풍을 맞기도 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불황엔 미니스커트? 확 바뀐 2024년 인기 패션 아이템
2최상위권 입시 변수, 대기업 경영 실적도 영향
3보험사 대출 늘고 연체율 올랐다…당국 관리 압박은 커지네
4길어지는 내수 한파 “이러다 다 죽어”
5"좀비버스, 영화야 예능이야?"...K-좀비 예능2, 또 세계 주목받을까
6킨텍스 게임 행사장 ‘폭탄테러’ 예고에...관람객 대피소동
7美항모 조지워싱턴함 日 재배치...한반도·中 경계
8공항철도, 시속 150km 전동차 도입...오는 2025년 영업 운행
9두산 사업구조 재편안, 금융당국 승인...주총 표결은 내달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