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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16) 개그맨 전유성] “내 분수를 알고 잘하는 일만 했어요”

[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16) 개그맨 전유성] “내 분수를 알고 잘하는 일만 했어요”

개그맨이란 단어 만든 원조 개그맨… 5월 중순에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사진:오종찬 객원기자
“운이 좋았습니다. 일찍 개그맨이 됐기에 지금까지 버티는 거죠. 요즘 제가 개그맨 시험을 본다면 40번은 떨어질 거예요.” 고희의 개그맨 전유성은 “노래도 못해, 춤도 못 춰, 말도 어눌한 내가 지난 50년간 버틴 건 운칠기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는 5월 중순 기념 공연을 연다. ‘데뷔 50년 만에 제일 큰 무대 - 전유성의 쑈쑈쑈 : 사실은 떨려요’. 여기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처음 시도할 계획이다. “지난해 6월 본격적인 스탠드업 코미디를 선보인 후배들에게 검증을 받으려 합니다. 혼자서 한 30분 할 텐데 40~60대 관객을 겨냥하는 게 이들 후배와 달라요.”

당초 그는 이렇게 큰 무대를 꾸밀 생각이 없었다. 그가 태국 빠이 여행에서 돌아오니 대관 계약이 돼 있었다. 개그맨 후배들이 공연에 대한 의지가 없는 그가 없는 동안 덜컥 계약을 한 것이다. 취소를 했다가는 대관료 선금을 날릴 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흥행이 좀 돼야겠기에 티켓 파워 있는 후배들에게 찬조 출연을 요청했습니다.”
 아이디어 전하고 후배 키우고
그는 개그계 맏형으로서 웃길 것 같은 아이디어와 소재를 후배들에게 잘 제공한다. 연예계 생활을 개그 작가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자 자기 코너 짜기에 급급한 마당에 그의 이런 행동은 남다른 것이었다. 그는 “어차피 내가 못할 거 후배들에게 주다 보니 계속 주게 되더라”고 말했다. “나의 아이디어를 후배들이 채택해 주니 되레 내가 고맙죠. 아이디어라는 씨앗은 내가 뿌렸지만 열매는 다른 사람이 거둬도 됩니다.” 그의 제안으로 당초 아리랑 남매였던 김미화·김한국 공동 코너는 ‘쓰리랑 부부’가 됐고 히트를 쳤다. 심형래가 부른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의 말대로 ‘달릴까 말까’로 개사해 대박이 났다.

그는 개그맨 시험에 여덟 번 떨어진 이영자를 4개월 훈련시켜 MBC에 특채로 집어넣었다. 당시 시험에 계속 떨어진 이영자가 방송에 출연시켜 달라고 2000만원을 들고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 그 돈 안 받은 거 후회합니다. 농담이고요. 나에게 신세 졌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개그맨 지망생들 열심히 도우라고 했어요. 이영자가 스탠드바에서 공연하는 걸 보니 관객을 휘어잡고 남자들보다도 에너지가 넘치더라고요.” 신봉선도 그가 발굴한 스타이다. 아예 개그맨 시험에서 세 번 이상 떨어진 지망생들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 “세 번 이상 시험에서 떨어지고도 다시 도전하는 사람은 평생 개그맨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에요.”

개그맨 자체가 그가 쓰기 시작한 말이다. 지금은 영어권에서도 알아듣는 말이 됐다. 가수 이문세도 그가 발굴했다. 어느 날 라디오 DJ가 펑크를 냈다는 소리를 듣고 이문세를 추천했다. 올해 환갑을 맞은 그와는 열 살 차이다. “40년 형 소리 들었으니 이제 말 놓으라고 했습니다. 나더러 ‘유성아!’ 해도 된다고요. 100세 시대라지만 환갑 넘기면 저 세상 가는 순서를 알 수 없어요. 나이가 아래라 해도 먼저 가면 저 세상에선 영원히 선배가 되는 거죠. 환갑을 넘긴 사람과는 동갑내기가 친구가 아니라 나이를 떠나 말이 통하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그는 나이가 들면 동문수학한 동창들끼리도 쓰는 말이 서로 다르다고 했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 접한 정보를 화제로 삼아요. 대표적으로 정치 이야기가 그렇죠. 그래서 동기들에게 술자리를 갖기보다 의기투합해 함께 음반을 내고, 매년 뮤지컬 두 편, 전시회 두 번 가자고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그래 너 잘났어’ 하는 친구도 있고 ‘네 말이 맞다’ 하는 친구도 있어요. 그럼 아무래도 맞장구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죠.”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자락에 사는 그는 지리산행에 앞서 경북 청도에 정착했었다. 2007년 58세의 나이에 도시를 탈출하려 청도로 내려갈 때 연예인 아닌 삶을 꿈꿨지만 샘솟는 예능 아이디어를 주체할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2009년 그는 반려견도 참석할 수 있는 ‘개나 소나 콘서트(개소콘)’를 기획했다. 이 공연을, 9년 동안 연인원 20만 명이 찾았다. 자신이 브랜딩한 철가방극장에서 열리는 이 공연에 참석한 견공들도 개소콘을 즐겼을 거라고 그는 믿는다. 얌전히 있다가 음악에 맞춰 짖기도 했다니 말이다. “동물들도 사람처럼 무언가 느낍니다. 사실 우리는 평소 반려견과 자주 대화를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이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오면 반려견에게 ‘빨리 집에 가자’라고 하잖아요.” ‘성악가가 부르는 가요 60년’ 공연도 기획했고, 스카이 캐슬의 확대판인 학벌 사회에서 팸플릿에 최종학력 대신 ‘OO초등학교 졸업’ 식으로 최초 학력을 적은 적도 있다. “정말 잘하는 건 심사를 전제로 하는 입학 시험 볼 때나 콩쿨 대회 나가서 하게 하고 재미있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잘하는 거보다 재미있는 게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요.”
 개소콘 등 동호회 콘셉트 공연 개발
사진:오종찬 객원기자
본래 대학에서 연극 연출을 전공한 그는 개소콘처럼 공연 기획에 동호회 개념을 차용했다. “젊은 사람이 노인과 맞담배질을 하면 버릇없다고 하지만 공항 흡연실에서는 20대~70대가 함께 담배를 피웁니다. 흡연실 사람들은 동아리와 같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죠. 엄마가 아이를 데려오는 클래식 콘서트는 아이들이 떠들어도 나무라지 않는 음악회로 3000회 공연을 했습니다.” 2015년엔 청도 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을 열었다. 지난해 청도군이 이 축제의 조직위원장인 그를 배제하고 기획사에 일을 맡겼다. 이로 인한 갈등 끝에 그는 청도를 떠났다.

그의 인생 바닥은 세 번의 빚보증으로 큰 돈을 날렸을 때였다. 돈이 모일 만하면 떠났다. 그 후 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다. 보증을 서 준 사람은 모두 주위 사람들이었다. 그 후로 결혼 주례를 부탁받으면 주례사 때 “보증을 서지 않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약 30회 주례를 섰는데 그중엔 개그맨이 아닌 사람도 있다. 지난해부터 그는 주례가 하는 성혼 선언을 독립 선언으로 바꿔 부른다. “두 사람의 독립을 선언하기 전 양가 부모에게 독립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신랑·신부에게는 이렇게 당부해요. 경제적으로 독립하라. 독립 자금을 굳이 주시겠다면 받아라. 자녀를 독립심 강한 아이로 키우고 양육의 부담을 부모에게 전가하지 말아라. 부모가 오시면 숙식은 제공해라.”

그에게 좌우명을 물었다. 그가 “좌우를 잘 살피자”는 개그로 받았다. “조카가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고 했다고 해 ‘분수를 지키자’라고 써준 일이 있습니다.” 전유성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후라이보이란 애칭으로 통했던 코미디언 출신 고 곽규석 목사이다. 그의 자가용차 기사는 그 시절 연예인 기사들 중 자신이 가장 봉급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곽규석은 시간이 나면 기사 딸린 차를 두고 정동에 있던 시절 MBC, KBS를 걸어다녔고, “몇 푼 더 주면 자장면을 먹을 수 있는데 왜 다방에서 약속을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찻집보다 식당에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다 약속 장소가 술집으로 바뀌었죠. 내가 막 취직했을 때 이 분이 집 두 채 값쯤 되는 거금을 나에게 맡기셨어요. 수시로 달라고 해 그 돈을 갖다 쓰셨는데 단 한 번도 얼마 남았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대선배라 어려워하면서도 존경했습니다.”

후라이보이는 71세에 영면했다. 내년이면 전유성이 이를 나이다. 이 ‘원조 개그맨’에게 원로답지 않게 권위의식이 없어 보인다고 슬쩍 찔러 봤다. “권위의식은커녕 나는 권위 자체가 없어요. 후배들과 어울려 같이 떠들고 까불어 나를 어려워하지도 않고요. 후배가 대 놓고 ‘형은 못 웃겼잖아’ 하면 ‘그래 맞아, 난 못 웃겼어’ 합니다.” 현역 시절 그는 받쳐주는 역할을 주로 했다. 청춘물을 하고 싶었지만 노역 전문 개그맨이었다. 아버지·할아버지 역은 누구도 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료들과 차별화하려 웃는 모습을 안 보여 주기도 했다. 평소 잘 웃지만 방송에 나와서는 잘 웃지 않는 개그맨. “분수를 알고, 내가 잘하는 거만 했어요. 나만의 길을 가면 굳이 남과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후배들 전화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하고, 후배 섭외할 일이 생기면 남들만큼 출연료를 줄 수 있을 때만 불렀습니다. 삥 뜯지 않은 거죠.”

그가 식당보다 약속 장소로 애용하는 곳은 교보문고다. 서울을 오갈 때도 책을 읽는 독서가로 집에서도 주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 그가 책을 읽는 건 읽는 동안 심심하지 않고 책값이 싸게 먹혀서다. 제목이 특이해 읽을 때도 있다. 과거엔 골라서 읽었지만 지금은 닥치는 대로 읽는다. 특히 다시 읽어도 좋고 어느 쪽을 펼치든 편한 시집을 즐겨 읽는다. “심지어 시집은 가벼워서 남의 집에서 슬쩍 집어오기도 좋아요. 시인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일의 전문가입니다. 시를 많이 읽으면 그래서 같은 걸 다르게 보게 되죠.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어쩌다 강의를 하게 되면 시를 많이 읽자는 말로 마칩니다.”
 시를 읽으면 남다르게 볼 수 있어
책을 읽다 오자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오자나 오류가 보이면 출판사에 전화를 걸기도 한다. 말에 민감한 것도 시로 갈고닦은 언어 감수성 덕인지 모른다. “소녀 부대, 정상 탈환, 한 번 쳐들어 갈 게, 내가 쏠 게 같은 군대 말을 안 썼으면 좋겠어요. ‘장난이 아니다’란 말도 듣기 거북해요. 비가 장난 아니게 많이 온다는 식으로 쓰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게 장난인가요? 비만 등 외모를 비하하는 개그도 오래 전부터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의 버킷 리스트는 데뷔 50주년 공연 마친 후 운동으로 몸 만들어 몸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장수의 비결은 나이를 많이 먹는 것”이다. 그러나 장수가 보편적 현상이 된 시대 곱게 나이 들어가는 건 누구에게나 만만치 않은 화두다. “후배 개그맨을 뽑아 교육을 하는데 어느 날 나 혼자 얘기하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어요. 화들짝 놀랐죠. 나도 모르게 스리슬쩍 꼰대가 된 거에요.” 그는 요즘 이렇다 할 계획 없이 그냥 어영부영 산다고 했다. 50주년 기념 공연이 오히려 예외적이다.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그는 술 이야기를 하려 한다. “술은 끊을 수 없어요. 술이 액체이기 때문이죠. 덜 마시거나 한동안 쉴 수는 있지만 액체인 술을 끊을 수는 없어요. 요즘 어르신들이 소주를 많이 마십니다. 1000원 남짓으로 이런 즐거움을 어디서 찾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한평생 힘들게 사셨는데 그런 즐거움이라도 누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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