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음식은 낯선 땅으로 가는 상상의 티켓”
“책과 음식은 낯선 땅으로 가는 상상의 티켓”
신저 ‘다른 땅의 약속’ 펴낸 작가 브래드 레이사우저가 들려주는 음식과 책, 그리고 여행 이야기 성공적인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계획대로 된 여행과 그렇지 않은 여행이다. 사람들은 실생활에선 전자를 기대하지만 문학에서는 후자를 선호한다. 항해가 순탄하고, 비행기가 제시간에 뜨고, 평탄한 길만 걷는 여행자의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 하겠는가?
사람들은 존 치버의 유명한 단편소설 ‘교외의 남편(The Country Husband)’의 주인공 프랜시스 위드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한다. 위드는 미국 동부를 출발해 중서부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 비행을 시작할 땐 푸르던 하늘이 이내 회색으로 변하면서 캄캄해지더니 비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내 조명이 꺼지고 그의 옆 좌석에 앉은 낯선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늘 뉴햄프셔주에 농장을 사서 소를 기르고 싶었어요.” 위드가 지상에서 듣는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가 하필이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털어놓는 실패의 고백이었다.
또한 독서가들은 이 두 종류의 성공적 여행이 하나의 경험으로 합쳐질 때 기쁨을 느낀다. 시간 맞춰 운행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딱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그런 예다. 오디세우스는 제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돌아가는 10년 동안의 여정에서 어머니의 유령, 사람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선원들을 돼지로 둔갑시키는 여자 마법사 키르케를 만난다.
아니면 아침에 기차를 타고 햇살 가득한 객실에 앉아 생산적인 하루를 열면서 난파당한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읽는 건 또 얼마나 재미있나? 내가 책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곳 중 하나가 기차 안이다. 자신은 시간에 맞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때늦게, 잘못된 방향으로, 비극적으로 나아가는 삶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하지만 여행자의 불행과 무능력을 지켜보면서 독서가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소설을 쓰는 과정이 실수와 비능률로 얼룩진 험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보통 소설은 ‘난 책을 쓸 거야!’ 하는 모험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연속된 재난에 맞닥뜨리면서 ‘이제 이놈의 책을 집어치워야겠어!’ 하고 절망한다.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최근 여덟 번째 소설을 펴낸 작가로서 내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만난 소설가 대다수가 그렇게 말한다. 소설 쓰기는 언제나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갈수록 쉬워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만약 내가 예전에 소설가가 아니라 수납장을 만드는 목수가 되고자 마음먹었다면 지금쯤은 훌륭한 가구공이 됐을 듯하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예리한 눈과 솜씨 좋은 손을 가진 장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소설 일곱 편을 쓰고 나서 여덟 번째를 시작할 때도 글쓰기는 예전보다 전혀 쉬워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내가 소설 쓰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그거다. 매번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옛날 옛적에…’의 새로운 변종을 찾아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할까?
소설은 거기에 등장하는 여행자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 여행은 성공적일지는 모르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두 번째 종류의 여행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대다수는 이런 의미에서 여행 서적이다. 작가는 그 책을 쓰기 위해 매일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 책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그와 함께하기 위해 매일 머릿속으로 수천 ㎞씩 여행했다.
난 몇 년 전 소설가 솔 벨로를 만났을 때 그의 1959년 소설 ‘비의 왕 헨더슨’을 정말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에게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그 소설을 쓸 때 그곳에 갔었는지 물었다. 벨로는 “가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현실과 ‘상상 속의 더 깊은 현실’이 부딪쳐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책이 출판된 후에야 아프리카에 가봤다고 한다.
벨로가 미국을 떠나지 않고 아프리카를 묘사했다면 에밀리 디킨슨은 집 안에 앉아서 야생의 세계를 재현했다. 미국 문학의 위대한 은둔자로 불리는 디킨슨은 집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손님이 와도 문 뒤에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시에서 ‘책과 같은 쾌속선은 없다(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고 노래했으며 ‘가치 있는 여행은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다’는 개념을 신봉했다.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난 여행에 관한 내 평생의 열정이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보낸 어린 시절 생겨난 것 아닌가 추측한다. 내가 살던 지역은 모든 면에서 중간이었다. 대도시와 농촌의 중간에 있었고, 활기찬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 사이에 있었다. 편협하고 고루하게 여겨지던 곳이지만 지리적으로는 어느 방향으로나 열려 있었다. 가도 가도 들판만 이어질 뿐 변화와 도전, 미래의 희망을 나타내는 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여행을 피했고 (20대 초반 군인 시절 태평양 지역에 배치받았던 아버지는 해안 상륙작전 때 여러 차례 총상을 입었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미시건주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여행을 시작한 나는 지난해만 해도 50회가 넘는 편도 비행을 했다.
미시건주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내 여행은 대체로 책과 음식이라는 2가지 형태를 띠었다. 미국 중서부 지방은 특색 있는 음식이 없다고 알려졌지만 우리 형제들과 나는 친구들이 먹어보지 않았거나 먹으려 하지 않는 음식을 맛보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아버지는 사냥을 했고 주변에 사냥하는 친구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 집 냉동고에는 아무 종이에나 둘둘 말아 보관한 정체 모를 짐승과 새의 고기가 많았다. 그런 고기엔 산탄총 탄알 자국이 있었다. 난 그 고기 중 어떤 것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없다. 하지만 색다른 고기를 맛본다는 데 큰 기쁨을 느꼈다. 사슴고기, 오리고기, 토끼고기, 무스(북미산 큰 사슴) 고기 등등. 우리 형제는 또 훈제 굴과 훈제 홍합, 훈제 문어 등 통조림이 아니면 접하지 못했을 먹거리가 든 작은 깡통에 매료됐다. 우리는 그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면서 알아간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그 음식들은 초등학교 시절 내 상상력을 지배했던 책(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슷한 존재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가상 장소와 지중해의 여러 섬을 배경으로 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내 마음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했다. 유럽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내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던 주인공이 복수하는 줄거리를 가진 뒤마의 소설에 어떻게 그렇게 사로잡힐 수 있었는지 놀랍다. 난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1964년 11월 22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책과 음식은 낯선 땅으로 가는 상상의 티켓이자 여권이었다. 한때 내 상상력에 불을 댕겼던 단어들은 엘리트주의와 가부장주의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국적인(exotic), 동양적인(oriental), 외딴(remote) 등등. 이 단어들은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내게는 여전히 신화적인 풍요로움을 상기시킨다.
내 마음속에서 책과 음식은 언제나 여행의 기쁨과 매력에 연결돼 있다. 난 최근 신작 소설 ‘다른 땅의 약속(The Promise of Elsewhere)’ 집필을 위한 조사작업을 하던 중 오래전 가봤던 영국 런던의 아시아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음식 맛은 형편없었지만 내 주인공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 레스토랑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서 기뻤다. 더 기뻤던 건 음식 맛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책과 음식은 예전엔 먼 곳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반대가 됐다. 난 요즘 음식과 책(또는 책을 쓸 소재)을 찾아 먼 곳까지 여행한다. 언젠가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따라 미크로네시아로 갔다. 그 주인공은 호감 가는 성격이지만 운이 없는 미국 중서부 출신의 나비 연구가다. 스토리 전개상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마약 사카우를 맛볼 필요가 있었다. 사카우는 후추나무 뿌리로 만든 미크로네시아 전통술로 내가 경험해본 소수의 마약 중 최악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우아하고 생기 넘치며 똑똑하게 느끼게 해줄 일종의 마약을 원한다. 하지만 사카우는 나를 어설프고 무기력하고 바보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그런 반응은 내가 책 속의 캐릭터가 느꼈으리라고 상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의 체험을 대신 해본 것 중 가장 기괴했던 경우는 오래전 사이판의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난 과일박쥐 요리를 주문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런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겠지만 책 속 주인공이라면 할 것 같았다. 당시 첫 번째 소설을 쓰느라 고전하던 나는 내키지 않는 음식까지 먹어야 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난 스스로 대담성을 칭찬했다. 어디선가 읽은 바에 따르면 박쥐는 지구상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포유동물이다. 그래서 값이 쌀 거라고 생각했지만 메뉴에서 가장 비싼 음식이었다. 그것도 뿌듯한 일이었다. 내가 실감 나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니까 말이다.
음식이 나왔다. ‘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지?!?!’(그때의 끔찍한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음표와 느낌표가 2개씩 필요하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커먼 박쥐 고기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황당한데 그것을 먹어야 하다니 정말 끔찍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먹어야지. 난 그 음식을 먹으면서 처음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되뇌었던 말을 다시 했다. ‘난 책을 쓸 거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 겸 여행작가다. 185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뉴욕주의 애디론댁 산맥과 캘리포니아주, 뉴질랜드를 거쳐 1894년 사모아에서 사망했다. 예측불허의 짧고도 경이로운 생애였다. 스티븐슨은 남태평양에서 스코틀랜드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문득 망고 생각이 나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네. 하지만 자네는 망고가 뭔지 모르지.”
온도조절장치로 신선도를 유지하는 농산물이 비행기에 실려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는 요즘 세상에 망고가 특별할 건 없다. 일본과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거의 어느 나라에서나 슈퍼마켓에 가면 열대 과일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티븐슨의 편지에서는 세계의 방대함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여행작가 또는 여행하는 작가로서 그 위엄에 걸맞은 뭔가를 전달하려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드러난다. 친구에게 ‘자네가 평생 와보지 못할 땅에서, 자네가 평생 먹어보지 못할 과일에 관해 설명해주겠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도 슬픈 일인가?
스티븐슨은 여행(자기 자신의 여행이나 소설 속 캐릭터의 여행)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요즘 독자가 가보지 못할 땅이나 먹어보지 못할 과일이 있을까? 스티븐슨이 남태평양의 천국 사모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늘날 어느 곳의 누구보다 먼 거리를 여행했다. 요즘 우리는 세계를 손안에 쥐고 있다. 멀리 가면 갈수록 그 거리는 더욱 짧아지는 듯하다.
- 브래드 레이사우저
※ [필자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 겸 소설가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람들은 존 치버의 유명한 단편소설 ‘교외의 남편(The Country Husband)’의 주인공 프랜시스 위드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한다. 위드는 미국 동부를 출발해 중서부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 비행을 시작할 땐 푸르던 하늘이 이내 회색으로 변하면서 캄캄해지더니 비행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기내 조명이 꺼지고 그의 옆 좌석에 앉은 낯선 사람이 어둠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늘 뉴햄프셔주에 농장을 사서 소를 기르고 싶었어요.” 위드가 지상에서 듣는 마지막 말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가 하필이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털어놓는 실패의 고백이었다.
또한 독서가들은 이 두 종류의 성공적 여행이 하나의 경험으로 합쳐질 때 기쁨을 느낀다. 시간 맞춰 운행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딱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그런 예다. 오디세우스는 제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트로이에서 그리스로 돌아가는 10년 동안의 여정에서 어머니의 유령, 사람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선원들을 돼지로 둔갑시키는 여자 마법사 키르케를 만난다.
아니면 아침에 기차를 타고 햇살 가득한 객실에 앉아 생산적인 하루를 열면서 난파당한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읽는 건 또 얼마나 재미있나? 내가 책을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곳 중 하나가 기차 안이다. 자신은 시간에 맞춰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때늦게, 잘못된 방향으로, 비극적으로 나아가는 삶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있을까?
하지만 여행자의 불행과 무능력을 지켜보면서 독서가보다 더 기뻐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소설을 쓰는 과정이 실수와 비능률로 얼룩진 험로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보통 소설은 ‘난 책을 쓸 거야!’ 하는 모험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연속된 재난에 맞닥뜨리면서 ‘이제 이놈의 책을 집어치워야겠어!’ 하고 절망한다.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최근 여덟 번째 소설을 펴낸 작가로서 내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내가 만난 소설가 대다수가 그렇게 말한다. 소설 쓰기는 언제나 어렵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갈수록 쉬워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럴 리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만약 내가 예전에 소설가가 아니라 수납장을 만드는 목수가 되고자 마음먹었다면 지금쯤은 훌륭한 가구공이 됐을 듯하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훨씬 더 예리한 눈과 솜씨 좋은 손을 가진 장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소설 일곱 편을 쓰고 나서 여덟 번째를 시작할 때도 글쓰기는 예전보다 전혀 쉬워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배운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솔직히 내가 소설 쓰기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그거다. 매번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옛날 옛적에…’의 새로운 변종을 찾아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할까?
소설은 거기에 등장하는 여행자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 여행은 성공적일지는 모르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두 번째 종류의 여행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 대다수는 이런 의미에서 여행 서적이다. 작가는 그 책을 쓰기 위해 매일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해야 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갇혀 있었지만 그 책의 작가 대니얼 디포는 그와 함께하기 위해 매일 머릿속으로 수천 ㎞씩 여행했다.
난 몇 년 전 소설가 솔 벨로를 만났을 때 그의 1959년 소설 ‘비의 왕 헨더슨’을 정말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에게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그 소설을 쓸 때 그곳에 갔었는지 물었다. 벨로는 “가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는 현실과 ‘상상 속의 더 깊은 현실’이 부딪쳐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책이 출판된 후에야 아프리카에 가봤다고 한다.
벨로가 미국을 떠나지 않고 아프리카를 묘사했다면 에밀리 디킨슨은 집 안에 앉아서 야생의 세계를 재현했다. 미국 문학의 위대한 은둔자로 불리는 디킨슨은 집 밖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손님이 와도 문 뒤에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시에서 ‘책과 같은 쾌속선은 없다(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고 노래했으며 ‘가치 있는 여행은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다’는 개념을 신봉했다.
나로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난 여행에 관한 내 평생의 열정이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보낸 어린 시절 생겨난 것 아닌가 추측한다. 내가 살던 지역은 모든 면에서 중간이었다. 대도시와 농촌의 중간에 있었고, 활기찬 동부 해안과 서부 해안 사이에 있었다. 편협하고 고루하게 여겨지던 곳이지만 지리적으로는 어느 방향으로나 열려 있었다. 가도 가도 들판만 이어질 뿐 변화와 도전, 미래의 희망을 나타내는 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여행을 피했고 (20대 초반 군인 시절 태평양 지역에 배치받았던 아버지는 해안 상륙작전 때 여러 차례 총상을 입었다) 나 역시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미시건주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부터 여행을 시작한 나는 지난해만 해도 50회가 넘는 편도 비행을 했다.
미시건주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내 여행은 대체로 책과 음식이라는 2가지 형태를 띠었다. 미국 중서부 지방은 특색 있는 음식이 없다고 알려졌지만 우리 형제들과 나는 친구들이 먹어보지 않았거나 먹으려 하지 않는 음식을 맛보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아버지는 사냥을 했고 주변에 사냥하는 친구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 집 냉동고에는 아무 종이에나 둘둘 말아 보관한 정체 모를 짐승과 새의 고기가 많았다. 그런 고기엔 산탄총 탄알 자국이 있었다. 난 그 고기 중 어떤 것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없다. 하지만 색다른 고기를 맛본다는 데 큰 기쁨을 느꼈다. 사슴고기, 오리고기, 토끼고기, 무스(북미산 큰 사슴) 고기 등등. 우리 형제는 또 훈제 굴과 훈제 홍합, 훈제 문어 등 통조림이 아니면 접하지 못했을 먹거리가 든 작은 깡통에 매료됐다. 우리는 그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보면서 알아간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그 음식들은 초등학교 시절 내 상상력을 지배했던 책(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비슷한 존재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가상 장소와 지중해의 여러 섬을 배경으로 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며 내 마음은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여행했다. 유럽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내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던 주인공이 복수하는 줄거리를 가진 뒤마의 소설에 어떻게 그렇게 사로잡힐 수 있었는지 놀랍다. 난 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1964년 11월 22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책과 음식은 낯선 땅으로 가는 상상의 티켓이자 여권이었다. 한때 내 상상력에 불을 댕겼던 단어들은 엘리트주의와 가부장주의라는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국적인(exotic), 동양적인(oriental), 외딴(remote) 등등. 이 단어들은 지금은 빛이 바랬지만 내게는 여전히 신화적인 풍요로움을 상기시킨다.
내 마음속에서 책과 음식은 언제나 여행의 기쁨과 매력에 연결돼 있다. 난 최근 신작 소설 ‘다른 땅의 약속(The Promise of Elsewhere)’ 집필을 위한 조사작업을 하던 중 오래전 가봤던 영국 런던의 아시아 레스토랑을 다시 찾았다. 음식 맛은 형편없었지만 내 주인공을 그곳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 레스토랑이 여전히 그곳에 있어서 기뻤다. 더 기뻤던 건 음식 맛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책과 음식은 예전엔 먼 곳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반대가 됐다. 난 요즘 음식과 책(또는 책을 쓸 소재)을 찾아 먼 곳까지 여행한다. 언젠가는 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따라 미크로네시아로 갔다. 그 주인공은 호감 가는 성격이지만 운이 없는 미국 중서부 출신의 나비 연구가다. 스토리 전개상 그 지역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마약 사카우를 맛볼 필요가 있었다. 사카우는 후추나무 뿌리로 만든 미크로네시아 전통술로 내가 경험해본 소수의 마약 중 최악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우아하고 생기 넘치며 똑똑하게 느끼게 해줄 일종의 마약을 원한다. 하지만 사카우는 나를 어설프고 무기력하고 바보스럽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그런 반응은 내가 책 속의 캐릭터가 느꼈으리라고 상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의 체험을 대신 해본 것 중 가장 기괴했던 경우는 오래전 사이판의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난 과일박쥐 요리를 주문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런 음식을 주문하지 않았겠지만 책 속 주인공이라면 할 것 같았다. 당시 첫 번째 소설을 쓰느라 고전하던 나는 내키지 않는 음식까지 먹어야 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난 스스로 대담성을 칭찬했다. 어디선가 읽은 바에 따르면 박쥐는 지구상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포유동물이다. 그래서 값이 쌀 거라고 생각했지만 메뉴에서 가장 비싼 음식이었다. 그것도 뿌듯한 일이었다. 내가 실감 나는 책을 쓰기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니까 말이다.
음식이 나왔다. ‘대체 내가 뭘 기대했던 거지?!?!’(그때의 끔찍한 기분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음표와 느낌표가 2개씩 필요하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시커먼 박쥐 고기를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황당한데 그것을 먹어야 하다니 정말 끔찍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먹어야지. 난 그 음식을 먹으면서 처음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 되뇌었던 말을 다시 했다. ‘난 책을 쓸 거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가 겸 여행작가다. 185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뉴욕주의 애디론댁 산맥과 캘리포니아주, 뉴질랜드를 거쳐 1894년 사모아에서 사망했다. 예측불허의 짧고도 경이로운 생애였다. 스티븐슨은 남태평양에서 스코틀랜드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문득 망고 생각이 나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네. 하지만 자네는 망고가 뭔지 모르지.”
온도조절장치로 신선도를 유지하는 농산물이 비행기에 실려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는 요즘 세상에 망고가 특별할 건 없다. 일본과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 거의 어느 나라에서나 슈퍼마켓에 가면 열대 과일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티븐슨의 편지에서는 세계의 방대함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여행작가 또는 여행하는 작가로서 그 위엄에 걸맞은 뭔가를 전달하려 할 때 느끼는 어려움이 드러난다. 친구에게 ‘자네가 평생 와보지 못할 땅에서, 자네가 평생 먹어보지 못할 과일에 관해 설명해주겠네’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도 슬픈 일인가?
스티븐슨은 여행(자기 자신의 여행이나 소설 속 캐릭터의 여행)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는지를 상기시킨다. 요즘 독자가 가보지 못할 땅이나 먹어보지 못할 과일이 있을까? 스티븐슨이 남태평양의 천국 사모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늘날 어느 곳의 누구보다 먼 거리를 여행했다. 요즘 우리는 세계를 손안에 쥐고 있다. 멀리 가면 갈수록 그 거리는 더욱 짧아지는 듯하다.
- 브래드 레이사우저
※ [필자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 겸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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