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4) ‘예송논쟁’ 영의정 정태화] 제3의 명분으로 갈등을 해소하다
[김준태의 세기의 담판(24) ‘예송논쟁’ 영의정 정태화] 제3의 명분으로 갈등을 해소하다
평행선 달릴 땐 상황 전환 필요… 진정성 없는 합의는 미봉책에 불과 17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명망 높은 학자들이 대거 참전했고, 양대 정파는 이 문제를 놓고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이른바 ‘예송(禮訟)논쟁’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예송논쟁은 1659년 조선의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생존해 있었는데,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예법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었을 때 부모는 삼년복을 입고, 둘째아들 이하는 일년복을 입는다. 그렇다면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는 어떤 상례를 따라야할까?
여기에 대해 서인과 남인은 상반되는 입장을 보였다. 남인은 효종이 비록 인조의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적장자로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서인은 효종이 보위를 이었다고 하더라도 둘째아들이므로 그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두 붕당의 정치이념에 기반을 둔 것인데, 남인이 왕실만의 특수성을 인정한 것이라면 서인은 왕실 또한 사대부의 예법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위험한 발언이 나왔다. 삼년복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유교경전인 [의례儀禮]의 “장자가 죽으면 다음 적자가 가통의 중임을 이으니, 이 또한 장자라 부른다.”는 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인조의 적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었으므로 둘째 적자인 효종이 새로운 ‘장자’이고, 따라서 자의대비가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송시열은 사종설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을 거론한다. 사종설이란 종통(宗統)을 승계했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않는 4가지 예외를 말한다. 1)적장자이지만 심각한 병을 앓아서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2)서손(庶孫)이 승계한 경우, 3)아들이 계승하긴 했지만 정통이 아닌 경우, 4)정통이지만 아들이 아닌 경우(적장손)이다. 이중 ‘체이부정’은 세 번째를 가리키는데, 체(적자)이지만 정(맏아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송시열은 “인조대왕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왕(효종)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라고 덧붙인다.(현종 즉위년 5월 5일)
효종이 즉위했을 때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인조의 적장손인 석철이 살아있었다. 따라서 송시열의 발언은 적손이 엄연히 있는데 적통이 아닌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역’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자칫 정국의 파란을 불러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바로 이때 나선 인물이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 1602~1673)다. 정태화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 파국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효종의 ‘존엄’을 격하하는 서인의 주장은 아들인 현종의 진노를 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심각한 기근이 계속되는 등 가뜩이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남인과 서인의 갈등을 시급히 봉합할 필요도 있었다.
이에 송시열을 만난 정태화는 송시열의 주장을 가로막는다. “예법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설을 인용하여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 나는 예경(禮經)의 깊은 뜻에는 깜깜합니다만, 조선이 건국한 이래로 부모는 아들 상에 모두 1년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국제(國制, 경국대전)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정태화가 [경국대전]을 들고 나온 것은 절묘한 판단이었다. 몇째이건 상관없이 부모는 아들이 죽었을 때 모두 일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의 규정이기 때문에 남인은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서인도 비록 그 ‘이유’는 달라졌지만 일년복을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한다. 양자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킨 것이다.
이후에도 남인의 허목과 윤선도가 삼년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여진이 계속되었지만 정태화가 제시한 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를 두고 실록은 “이 때 사람들이 다시 사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으로서 잘 조정하였다.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으면서 대립하지도 않았으니, 조정의 논의가 지나침이 없도록 하고 결렬되지 않게 한 점은 모두가 그의 힘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현종14년 10월 8일)
무릇 상반되는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는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대립이 신념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익은 어느 정도 양보 할 수 있다지만 가치관을 양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럴 때는 양측을 모두 설득할 수 있는, 그도 아니면 최소한 양측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제3의 명분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논점을 아예 바꿔버리는 것이다. 본래 유학에서는 ‘선현의 가르침(유교경전)’과 ‘시왕지제(時王之制, 선대왕들이 세우고 정한 법과 제도)’를 중시하는데 삼년복을 입느냐 일년복을 입느냐, 그 예학적 근거가 무엇이고 어느 해석이 타당하냐는 ‘선현의 가르침’에 속하는 영역이다. 이것을 경국대전, 즉 ‘시왕지제’로 전환함으로써 이전의 논란을 잠재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이럴 경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갈등이 야기된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덮어버리게 되면 그 불씨는 언제고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예컨대 서인은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일년복을 입는다고 타협하면서도, 효종은 적장자가 아니므로 일년복을 입는 것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5년 후(현종 15년), ‘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서인은 논리의 허점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효종의 왕비 효숙대비(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논란이 됐다.
서인은 대공복(大功服, 9개월)을 제시했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이 경우 역시 일년복을 입어야 한다. 첫 번째 예송 때는 경국대전을 따랐다면서 두 번째 예송 때는 경국대전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효종비를 둘째 며느리, 즉 효종을 정통이 아니라고 보는 서인의 본심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현종 15년 7월 13일) 결국 현종의 분노를 샀고, 서인의 실각을 가져온다. 서인과 남인의 공존체제가 무너지고 일당체제가 시작된 계기였다.
요컨대, 제3의 명분은 분명 유용하다. 합의점을 찾지 못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후속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양측이 기존에 추구했던 명분을 접고, 새로운 명분을 중심으로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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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은 1659년 조선의 제17대 임금인 효종이 승하하면서 일어났다. 당시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생존해 있었는데,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 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예법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었을 때 부모는 삼년복을 입고, 둘째아들 이하는 일년복을 입는다. 그렇다면 효종의 모후인 자의대비는 어떤 상례를 따라야할까?
여기에 대해 서인과 남인은 상반되는 입장을 보였다. 남인은 효종이 비록 인조의 둘째아들이기는 하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적장자로 예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서인은 효종이 보위를 이었다고 하더라도 둘째아들이므로 그에 맞는 예법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두 붕당의 정치이념에 기반을 둔 것인데, 남인이 왕실만의 특수성을 인정한 것이라면 서인은 왕실 또한 사대부의 예법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인·서인 갈등에 ‘조선 헌법’으로 논점 바꿔
여기에 대해 송시열은 사종설의 ‘체이부정(體而不正)’을 거론한다. 사종설이란 종통(宗統)을 승계했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않는 4가지 예외를 말한다. 1)적장자이지만 심각한 병을 앓아서 조상의 제사를 받들지 못한 경우, 2)서손(庶孫)이 승계한 경우, 3)아들이 계승하긴 했지만 정통이 아닌 경우, 4)정통이지만 아들이 아닌 경우(적장손)이다. 이중 ‘체이부정’은 세 번째를 가리키는데, 체(적자)이지만 정(맏아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송시열은 “인조대왕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바로 ‘정이불체’이고 대행왕(효종)은 ‘체이부정’인 셈입니다”라고 덧붙인다.(현종 즉위년 5월 5일)
효종이 즉위했을 때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인조의 적장손인 석철이 살아있었다. 따라서 송시열의 발언은 적손이 엄연히 있는데 적통이 아닌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역’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자칫 정국의 파란을 불러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바로 이때 나선 인물이 영의정이었던 정태화(鄭太和, 1602~1673)다. 정태화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큰 파국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효종의 ‘존엄’을 격하하는 서인의 주장은 아들인 현종의 진노를 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심각한 기근이 계속되는 등 가뜩이나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남인과 서인의 갈등을 시급히 봉합할 필요도 있었다.
이에 송시열을 만난 정태화는 송시열의 주장을 가로막는다. “예법이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소현세자에게 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그 설을 인용하여 지금 논의하는 예의 근거로 삼겠습니까? 나는 예경(禮經)의 깊은 뜻에는 깜깜합니다만, 조선이 건국한 이래로 부모는 아들 상에 모두 1년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국제(國制, 경국대전)을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정태화가 [경국대전]을 들고 나온 것은 절묘한 판단이었다. 몇째이건 상관없이 부모는 아들이 죽었을 때 모두 일년복을 입는다는 것은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의 규정이기 때문에 남인은 이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서인도 비록 그 ‘이유’는 달라졌지만 일년복을 관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동의한다. 양자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킨 것이다.
이후에도 남인의 허목과 윤선도가 삼년복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여진이 계속되었지만 정태화가 제시한 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를 두고 실록은 “이 때 사람들이 다시 사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상당히 걱정을 했다. 그런데 정태화가 수상으로서 잘 조정하였다.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으면서 대립하지도 않았으니, 조정의 논의가 지나침이 없도록 하고 결렬되지 않게 한 점은 모두가 그의 힘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현종14년 10월 8일)
무릇 상반되는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릴 때는 합의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대립이 신념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익은 어느 정도 양보 할 수 있다지만 가치관을 양보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이럴 때는 양측을 모두 설득할 수 있는, 그도 아니면 최소한 양측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제3의 명분을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논점을 아예 바꿔버리는 것이다.
새로운 명분 중심으로 합의된 결론 끌어내야
다만, 이럴 경우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갈등이 야기된 근본 원인을 해소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덮어버리게 되면 그 불씨는 언제고 다시 타오를 수 있다. 예컨대 서인은 겉으로는 경국대전을 근거로 일년복을 입는다고 타협하면서도, 효종은 적장자가 아니므로 일년복을 입는 것이라는 자신들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5년 후(현종 15년), ‘2차 예송 논쟁’이 벌어졌을 때 서인은 논리의 허점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효종의 왕비 효숙대비(인선왕후)가 승하하면서 시어머니인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논란이 됐다.
서인은 대공복(大功服, 9개월)을 제시했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이 경우 역시 일년복을 입어야 한다. 첫 번째 예송 때는 경국대전을 따랐다면서 두 번째 예송 때는 경국대전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효종비를 둘째 며느리, 즉 효종을 정통이 아니라고 보는 서인의 본심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현종 15년 7월 13일) 결국 현종의 분노를 샀고, 서인의 실각을 가져온다. 서인과 남인의 공존체제가 무너지고 일당체제가 시작된 계기였다.
요컨대, 제3의 명분은 분명 유용하다. 합의점을 찾지 못해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 때,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후속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양측이 기존에 추구했던 명분을 접고, 새로운 명분을 중심으로 합의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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