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주기 주목 받는 최종현의 경영 철학] 최종현 25년(CEO 재임 기간) 뿌린 씨앗, 글로벌 SK 열었다
[22주기 주목 받는 최종현의 경영 철학] 최종현 25년(CEO 재임 기간) 뿌린 씨앗, 글로벌 SK 열었다
‘총신이 길면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뚝심으로 밀어붙인 중장기 사업 결실 맺어 수론(數論)에서 6은 완전수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6일에 걸쳐 세상을 창조했고, 눈의 결정은 정육각형이며, 벌집과 광물은 연속된 정육각기둥의 집합체다. 28 역시 완전수다. 남·녀가 결혼을 많이 하는 나이는 28세, 신생아의 생후 한 달은 28일이다. 완전수는 수학적 가설과 여러 물리·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인다.
이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수는 수리·물리 현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개인의 감성·경험·철학·통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최태원 SK 회장의 완전수는 22다. 최 회장은 2005년부터 대면 결재나 외부 행사 등 사인을 해야 할 때 숫자 22를 함께 쓴다. 2009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출돼 태릉선수촌을 방문했을 때는 등번호 22를 달고 시구하기도 했다.
최 회장이 22를 아끼는 이유는 ‘행복(幸福)’ 두 글자의 한자 획수를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행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자신의 뜻과 경영 목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최 회장의 메시지는 항상 수수께끼 같고 우회적이며 남들이 곱씹게 한다.
올해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22주기되는 해다. SK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최 전 회장은 1998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전 회장은 생전 장묘문화를 개선을 주장했고, 실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며 “내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화장(火葬)하라”고 남겼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기부해 충청남도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은하수공원을 짓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이 죽음의 현세적 의미를 찾은 것과 최 회장의 행복 경영은 의미론적으로 통한다. 부전자전이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행복(行福)을 추구하는 행동은 일견 불자(佛子)스럽다.
22는 최 회장의 현세와 최 전 회장의 사후가 교차하는 숫자지만, 이를 매개로 최 전 회장의 업적과 발자취, 경영 철학 등을 되짚어 봤다. 최 전 회장이 생전 뿌린 사업적 씨앗을 추도(追道)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다.
SK가 애플이라면 고 최종건 회장은 스티브 잡스에, 그의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팀 쿡에 빗댈 수 있다. 최종건 전 회장이 잡스처럼 창업자로서 기업의 초석을 다지고 비전을 제시했다면, 최종현 전 회장은 쿡처럼 기업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혁신가 잡스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2011년 애플의 주가는 50달러, 연 매출은 1080억 달러(2011 회계연도)였다. 관리형 CEO인 쿡이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500달러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불어났으며, 연 매출은 2602억 달러(2019 회계연도)에 달한다.
경영성과는 거시경제 여건과 시장상황 등 복합 변수가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숫자만 놓고 CEO의 역량을 재단하거나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의 경우처럼 기업의 성장 경로마다 적합한 CEO가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리더십이 기업의 성쇠를 가른다. 최종현 전 회장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에 SK를 체계적으로 성장시킨 관리형 CEO다. 그러면서 남다른 통찰력으로 2020년 SK의 미래 먹거리의 초석을 닦기도 했다. 1세대 창업자 중 흔치 않은 해외 유학파다. 위스콘신대에서 화학(학사),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석사)을 전공했다.
최 전 회장이 선경의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0월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 전 회장은 아버지 최학배 대성상회 대표의 사망으로 10년 만에 급거 귀국했다. 늦은 귀국으로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최 전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선경직물에 출근을 시작했다.
경영에 참여하게 된 최 전 회장은 회사 경영 현대화 등 시스템 개혁부터 나섰다. 당시 선경직물은 여느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인사관리와 급여체계·구매·판매 등 경영관리 부문을 전면 개편하며 시스템으로 일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1965년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손길승 명예회장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등 직접 인재 관리까지 나섰다. 손 명예회장은 최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6년간 SK그룹의 총수를 맡은 샐러리맨의 신화다. 정유화학·이동통신 등 SK의 핵심 사업을 현재 반열까지 올려놓으며, 최 전 회장이 유일하게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물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최 전 회장의 혁신 행보를 전폭 지원했다.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하며 배려심 깊은 동생을 유독 아꼈다. 최종건 전 회장의 창업자금 마련 일화는 두 형제의 우애를 잘 보여준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업에 반대하는 부친으로부터 선경직물 불하자금 200만원 빌리려 온갖 애를 썼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여파로 망가진 선경의 직물기계를 모두 자기 손으로 수리하며 회사에 공을 들였다. 이 고비만 넘으면 사업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부친은 “가산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이 모습을 본 최종현 전 회장은 “저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으니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종현 전 회장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별도로 과외를 받았고,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최종현 전 회장이 학업까지 포기하겠다고 하자 부친도 결국 손을 들고 최종건 전 회장에게 200만원을 빌려주게 됐다. 선경직물의 마중물이 된 돈이다. 이후 최종건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아우의 유학 경비에는 일절 손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격동의 1960~70년대, 선경직물도 수차례 위기와 기회를 맞이한다. 최종현 전 회장이 부사장에 취임한 1962년부터 1971년은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때다. 1950년대 물세탁 없이 재단이 가능한 ‘닭표’ 인조견으로 시장을 휩쓴 선경직물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수립해 원사사업 진출 계획을 밝히고,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써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1962년 4월 8일에는 최초로 수출 실적을 올렸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경’의 영문 이니셜을 따 브랜드로 사용했다. ‘SK’란 이름의 첫 등장이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해외섬유의 인수·확장, 울산직물·선산섬유 설립, 스카이론(SKYRON) 브랜드의 탄생, 아세테이트·폴리에스터 생산, 선경화섬·선경합섬 설립 등 혁명적 변화를 맞았다.
그러던 중 선경직물은 1973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2년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면서 섬유가 지원 산업에서 빠진 것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이전부터 정유·화학 분야에 뛰어들어 원유조달부터 정제, 추출, 섬유 제작까지 수직계열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한국경제연구]를 보면 한국의 화학섬유공업은 1959년 미진화학이 하루 2t 규모의 폴리비닐알코올(PVA) 공장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요가 급증하며, 1969년에는 하루 128.5t 규모로 커졌다.
이에 최종건 전 회장도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73년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최 전 회장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간명했다.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최종현 전 회장은 바로 선경합섬의 대표로 취임했다. 최 전 회장은 회사가 자유롭게 수출입을 할 수 있어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정유·화학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종합상사 역량의 향상은 불가피했다.
최 전 회장은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선경이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한다”며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 진출, 석유정제사업 성취가 그것이다. 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에 더불어 국제적 기업으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마침 정부는 1975년 종합 무역상사 육성 방안을 발표하고 원자재 수입 요건 완화, 수출금융 지원, 외국환은행 다수 거래 허용, 외환자금 보유 허용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다만 자본금 10억원, 수출 연 5000만 달러 이상, 해외지사 10개 이상 등 선정 요건이 까다로웠다. 삼성물산·대우실업·한일합섬·국제화학·쌍용 등 5개 회사만이 이 조건에 부합했다.
최 전 회장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1976년 사명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바꾸는 한편 선경기계·크로바상사를 인수하고, 선경식품·선경금속·선경반도체·선경건설 등을 설립했다. 이런 확장은 선경이 70~80년대 그룹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지만, 단기적으로 재무상황이 나빠졌다. 선경의 부채비율은 1979년 938%, 1980년 1507%로 불어났다. 그럼에도 최 전 회장은 정유·화학 회사로의 비전을 놓지 않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에 연구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일본이 한국의 정유·화학 산업 발전을 경계하며 기술 이전에 미온적이었고, 최 전 회장은 빚을 내서라도 자체 기술을 개발한다는 뜻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폴리에스터필름 개발에 성공했고, 곧바로 공장을 지어 상용화에 나섰다.
정부와 여론도 선경의 독자기술 개발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우호적 환경 조성은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자양분이 됐다.
미국 걸프는 1980년 석유공사 보유 지분 50%를 전량 양도하고 철수키로 했고, 정부는 곧바로 석유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밝힌 석유공사 최대주주의 조건은 원유확보 능력, 자금조달 능력, 산유국 투자유치 및 교섭 능력, 경영관리 능력, 성실성 등이다.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었던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당시 국내엔 강대한 석유패권국과 협상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친분을 가진 회사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석유공사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매물이었다.
신뢰는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하며,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업의 중장기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장치 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내놓은 산유국 투자 및 원유 조달 능력은 벼락치기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산유국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회사는 선경이 거의 유일했다.
최종현 전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남다른 친분을 맺었다. 최 전 회장과 사우디의 친분이 빛을 발한 것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이다. 당시 사우디가 주축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을 석유 금수국으로 분류해 10개월 안에 모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정부는 최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 전 회장은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공급 재개의 물꼬를 텄다. 또 1975년에는 사우디 국영화학공사(NCI)가 추진하는 플라스틱 공장 건설계획에 10%를 투자키로 했고, 무역상사 출범 뒤에는 수출대금 일부를 사우디 왕가 대리인에 수수료로 지급했다.
1976년에는 사우디 왕족을 국내에 초청하는 등 친분을 이어갔다. OPEC의 ‘황제’ 격인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1977년 최 전 회장을 초청해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선경과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1980년 하루 5만
배럴, 1981년 하루 7만 배럴, 1982년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당시 석유 조달에 불안감을 느낀 정부로서는 선경이 석유공사 인수의 최고 후보였던 셈이다. 석유사업 진출의 꿈을 품고 있던 최 전 회장은 석유공사 인수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왔다. 결과적으로 당시 재계 10위권이었던 선경은 1980년 11월 29일 석유공사 인수에 성공했고, 순식간에 재계 순위 5위로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석유에서 섬유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꿈을 이룬 순간이다.
석유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며, 대부분 소재·부품의 어머니다. 석유공사를 인수한 선경은 사업을 폭넓게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SK의 현재 모습은 최 전 회장이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전 회장은 에너지·화학의 뒤를 이을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꼽고 1993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팀을 꾸려 제약사업에 첫 발을 내밀었다. 또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세우며 바이오 역량 강화에 나섰다. 뉴저지는 푸르덴셜 등 대형 보험사, 존슨앤드존슨과 같은 화학회사, 아마린 같은 대형 제약사가 밀집한 지역이다.
신소재·정밀화학 회사인 SK케미칼이 헬스케어·의약품 등 생명과학 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최 전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최 전 회장이 끈기 있게 폴리에스터필름개발에 성공했듯, 바통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도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 매년 제약·바이오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SK바이오팜이 지난해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독자개발 뇌전증 치료제 신약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미국 시판에 나서는 등 꾸준한 투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투자를 받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SK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역시 최종현 전 회장이 밑그림을 갖고 추진한 분야다. 그는 반도체가 폴리에스테르처럼 산업의 쌀로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1978년 선경의 자사회로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점지원 전자업체로 지정할 만큼 성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가 가중되며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선대 회장이 놓친 반도체 사업을 최태원 회장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31년 만에 다시 일으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막대한 투자 때문에 ‘승자의 저주’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5조3000억원(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SK그룹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최 전 회장이 일으킨 사업의 또 다른 축은 이동통신 사업이다. 1990년 정부가 통신산업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며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 나섰다. 1992년 사업 공고를 냈고 선경과 포항제철·코오롱·동양·쌍용·동부 등이 참가했다. 당시 전화기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겸하지 못하게 한 전기통신사업법 때문에 삼성전자·LG전자·현대전자 등 대기업들은 배제됐다.
선경은 미주 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마련해 1984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재무·기술 등을 기준으로 한 1차 심사 결과 선경(대한텔레콤)이 838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7496점을 얻은 코오롱, 3위는 7099점의 포항제철이었다. 사업계획 및 이행 평가 등을 중심으로 한 2차 심사 결과에서도 선경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관계인 최 전 회장의 선경을 밀어준 것 아니냐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에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최 전 회장은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
특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코오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겹사돈, 포스코는 민정당 총재를 맡았던 박태준 전 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가 사업권을 받았든 특혜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제2이동통신 선정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전 KT 부회장)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 여러 불공정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며 “건전하고 규모가 큰 기업들을 주요주주로 참여시킨 선경이 사업 전개 방향·재무상황 등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92년 8월 27일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권 반납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를 다음 정부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정부에서 실력으로 객관적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실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제1이동통신사인 한국이동통신을 매물로 내놨고, 선경은 입찰에 참여했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자 8만원대이던 주가가 3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4271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600억원보다 7배 비싼 비용을 치르고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이다.
선경 내부적으로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전 회장은 “통신사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고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는 한편 ‘스피드 011’을 슬로건을 내건 CDMA 사업에 성공해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2002년에는 신세기이동통신을 인수했다.
당시 SK텔레콤은 가입료와 보증금이 비싼 데 비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들은 저렴한 요금제로 가입자를 빠르게 확보했다. 이에 SK텔레콤은 TTL 등 마케팅과 다양한 할인 요금제 등을 내세워 시장지배력을 지켰다. SK텔레콤은 현재 이동통신 사업을 근간에 두고 모빌리티·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첨단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최 전 회장은 양복 안감을 만들던 선경직물을 SK를 국내 시가총액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5년 연 매출 751억원, 종업원 8200명인 회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엔 연 매출 37조원, 종업원 2만1300명으로 성장했다. 이를 최태원 회장이 취임해 SK 매출규모를 4.4배 많은 161조원 수준으로 키웠다. SK의 그룹 전체 시가총액은 133조원(8월 21일 기준)에 달한다. 1980년 석유공사 인수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진출 등 최종현 전 회장이 뿌린 씨앗은 SK가 현재 바이오·헬스케어·반도체·정보통신기술(ICT) 기업으로 거듭나는 발판 역할을 했다. 그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폐암 투병 중에 산소호흡기를 꽂은 상태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한국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할 만큼 심각하다”고 고언할 정도로 국가 경제에도 애정이 깊었다.
SK 관계자는 “최종현 전 회장은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적 인재육성에 열정을 바쳤다”며 “그의 경영철학과 유산은 SK의 핵심 경영화두인 사회적가치 경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전 회장은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SK의 탑을 쌓았다. 최 전 회장의 족적은 국제 정세의 격변과 거대한 산업 전환 등 커다란 숙제를 받든 경영자들에게 중장기 가치를 두고 사업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총신이 길면 총알은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대내외 환경과 기술의 변화, 시민들의 가치 변동 등 경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며 체계적 접근과 과감한 경영 판단이 필요한 때다.
“한 치도 문제없어, 선경이 대부분 평가항목서 압도적 1위” SK텔레콤과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종현 전 SK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혜를 받아 1992년 제2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SK텔레콤이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은 그 다음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때다. 1994년 제1이동통신 사업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다.
그럼에도 SK가 노 전 대통령의 호혜를 입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는 믿음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이 만든 ‘맥락적 해석’이다.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 서로 탁하면 척하고 알아차리는 게 미덕이지만, 때로는 맥락을 잘못 파악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이에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실무 총괄이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석 회장은 행정고시 21회로 1977년부터 체신부·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KT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당시 선경(대한텔레콤)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
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선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였고, 준비도 철저히 잘했다. 당시 대주주·주요주주를 나눠 재무건전성 평가를 했는데, 은행과 해외 기업들이 주요주주로 참여해 점수가 크게 올랐다.
정치적 고려나 청와대의 압력은 없었나.
당시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게 ‘사돈 관계인데 문제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신청 사업자 모두 청와대·민주자유당과 관계가 깊어 어느 곳이 되더라도 말이 많을 것’이라 했다. 청와대의 별도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
심사 평가 기준은 어떻게 정했나.
내가 실무 총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 안진회계법인 대표 등 총 7명이 만들었다. 재무·투자·안전성·기술력 등을 고루 따졌다. 사전에 사업자 선정과 허가신청 요령을 공개했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서 뭐든 들어맞았다.
김영삼 정부 때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
취임 첫 해 체신의 날 대통령 말씀자료에 ‘전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는 엉터리며 왜곡됐으니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체신부 상관과 청와대 수석을 찾아가 이 문장을 삭제해 줄 것을 직접 요구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법률·행정적으로 한 치의 문제도 없었다.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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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독립된 개체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수는 수리·물리 현상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개인의 감성·경험·철학·통찰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최태원 SK 회장의 완전수는 22다. 최 회장은 2005년부터 대면 결재나 외부 행사 등 사인을 해야 할 때 숫자 22를 함께 쓴다. 2009년 대한핸드볼협회장에 선출돼 태릉선수촌을 방문했을 때는 등번호 22를 달고 시구하기도 했다.
최 회장이 22를 아끼는 이유는 ‘행복(幸福)’ 두 글자의 한자 획수를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구성원의 행복과 사회적 가치 창출이란 자신의 뜻과 경영 목표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최 회장의 메시지는 항상 수수께끼 같고 우회적이며 남들이 곱씹게 한다.
올해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22주기되는 해다. SK를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 키운 최 전 회장은 1998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전 회장은 생전 장묘문화를 개선을 주장했고, 실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며 “내 시신은 매장하지 말고, 화장(火葬)하라”고 남겼다. SK그룹은 최 전 회장의 유지에 따라 500억원을 기부해 충청남도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은하수공원을 짓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이 죽음의 현세적 의미를 찾은 것과 최 회장의 행복 경영은 의미론적으로 통한다. 부전자전이다. 두 사람 모두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행복(行福)을 추구하는 행동은 일견 불자(佛子)스럽다.
22는 최 회장의 현세와 최 전 회장의 사후가 교차하는 숫자지만, 이를 매개로 최 전 회장의 업적과 발자취, 경영 철학 등을 되짚어 봤다. 최 전 회장이 생전 뿌린 사업적 씨앗을 추도(追道)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다.
SK가 애플이라면 고 최종건 회장은 스티브 잡스에, 그의 동생 최종현 전 회장은 팀 쿡에 빗댈 수 있다. 최종건 전 회장이 잡스처럼 창업자로서 기업의 초석을 다지고 비전을 제시했다면, 최종현 전 회장은 쿡처럼 기업을 확장하는 역할을 맡았다. 혁신가 잡스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던 2011년 애플의 주가는 50달러, 연 매출은 1080억 달러(2011 회계연도)였다. 관리형 CEO인 쿡이 이끌고 있는 애플의 주가는 500달러까지 치솟아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불어났으며, 연 매출은 2602억 달러(2019 회계연도)에 달한다.
경영성과는 거시경제 여건과 시장상황 등 복합 변수가 상호작용을 일으킨 결과물이기 때문에 숫자만 놓고 CEO의 역량을 재단하거나 우열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애플의 경우처럼 기업의 성장 경로마다 적합한 CEO가 중요하며, 시의적절한 리더십이 기업의 성쇠를 가른다.
“유학 안 가도 돼” 부친 함께 설득한 동생
최 전 회장이 선경의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 10월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최 전 회장은 아버지 최학배 대성상회 대표의 사망으로 10년 만에 급거 귀국했다. 늦은 귀국으로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최 전 회장은 한국에 돌아온 지 하루 만에 부사장 직함을 달고 선경직물에 출근을 시작했다.
경영에 참여하게 된 최 전 회장은 회사 경영 현대화 등 시스템 개혁부터 나섰다. 당시 선경직물은 여느 국내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며 임직원 급여가 밀리기도 했다. 최 전 회장은 인사관리와 급여체계·구매·판매 등 경영관리 부문을 전면 개편하며 시스템으로 일하는 회사를 만들었다.
1965년에는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손길승 명예회장을 신입사원으로 채용하는 등 직접 인재 관리까지 나섰다. 손 명예회장은 최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6년간 SK그룹의 총수를 맡은 샐러리맨의 신화다. 정유화학·이동통신 등 SK의 핵심 사업을 현재 반열까지 올려놓으며, 최 전 회장이 유일하게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물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최 전 회장의 혁신 행보를 전폭 지원했다.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하며 배려심 깊은 동생을 유독 아꼈다. 최종건 전 회장의 창업자금 마련 일화는 두 형제의 우애를 잘 보여준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전쟁이 끝나자 사업에 반대하는 부친으로부터 선경직물 불하자금 200만원 빌리려 온갖 애를 썼다. 최종건 전 회장은 6.25 여파로 망가진 선경의 직물기계를 모두 자기 손으로 수리하며 회사에 공을 들였다. 이 고비만 넘으면 사업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부친은 “가산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완강히 맞섰다. 이 모습을 본 최종현 전 회장은 “저는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으니 형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부친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시 최종현 전 회장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별도로 과외를 받았고,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형님의 유언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격동의 1960~70년대, 선경직물도 수차례 위기와 기회를 맞이한다. 최종현 전 회장이 부사장에 취임한 1962년부터 1971년은 제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행되던 때다. 1950년대 물세탁 없이 재단이 가능한 ‘닭표’ 인조견으로 시장을 휩쓴 선경직물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부터 완제품까지 섬유의 수직 계열화에 나섰다. 이를 위해 1966년 선경 5개년 사업계획을 수립해 원사사업 진출 계획을 밝히고,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의 교두보로써 아세테이트 원사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1962년 4월 8일에는 최초로 수출 실적을 올렸는데, 해외 바이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선경’의 영문 이니셜을 따 브랜드로 사용했다. ‘SK’란 이름의 첫 등장이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해외섬유의 인수·확장, 울산직물·선산섬유 설립, 스카이론(SKYRON) 브랜드의 탄생, 아세테이트·폴리에스터 생산, 선경화섬·선경합섬 설립 등 혁명적 변화를 맞았다.
그러던 중 선경직물은 1973년 변곡점을 맞는다. 1972년 정부가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면서 섬유가 지원 산업에서 빠진 것이다. 최종건 전 회장은 이전부터 정유·화학 분야에 뛰어들어 원유조달부터 정제, 추출, 섬유 제작까지 수직계열화 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임종철 전 서울대 교수(경제학)의 저서 [한국경제연구]를 보면 한국의 화학섬유공업은 1959년 미진화학이 하루 2t 규모의 폴리비닐알코올(PVA) 공장을 건설한 것을 시작으로 수요가 급증하며, 1969년에는 하루 128.5t 규모로 커졌다.
이에 최종건 전 회장도 정유공장을 짓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73년 경상남도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미국에서 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도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1973년 10월 1차 석유파동이 터지며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최 전 회장도 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월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간명했다. “종현이를 도와 석유 사업을 해라.”
최종현 전 회장은 바로 선경합섬의 대표로 취임했다. 최 전 회장은 회사가 자유롭게 수출입을 할 수 있어야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을 시작했다. 정유·화학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종합상사 역량의 향상은 불가피했다.
최 전 회장은 1975년 신년사를 통해 “선경이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하기 위해 두 가지를 당부한다”며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 확립을 위해 석유화학공업 진출, 석유정제사업 성취가 그것이다. 또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에 더불어 국제적 기업으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마침 정부는 1975년 종합 무역상사 육성 방안을 발표하고 원자재 수입 요건 완화, 수출금융 지원, 외국환은행 다수 거래 허용, 외환자금 보유 허용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다만 자본금 10억원, 수출 연 5000만 달러 이상, 해외지사 10개 이상 등 선정 요건이 까다로웠다. 삼성물산·대우실업·한일합섬·국제화학·쌍용 등 5개 회사만이 이 조건에 부합했다.
최 전 회장은 이 조건을 맞추기 위해 1976년 사명을 선경직물에서 선경으로 바꾸는 한편 선경기계·크로바상사를 인수하고, 선경식품·선경금속·선경반도체·선경건설 등을 설립했다. 이런 확장은 선경이 70~80년대 그룹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지만, 단기적으로 재무상황이 나빠졌다. 선경의 부채비율은 1979년 938%, 1980년 1507%로 불어났다.
소재·섬유 수직계열화 노리고 석유사업 진출
정부와 여론도 선경의 독자기술 개발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우호적 환경 조성은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하는 자양분이 됐다.
미국 걸프는 1980년 석유공사 보유 지분 50%를 전량 양도하고 철수키로 했고, 정부는 곧바로 석유공사의 민영화를 추진했다. 정부가 밝힌 석유공사 최대주주의 조건은 원유확보 능력, 자금조달 능력, 산유국 투자유치 및 교섭 능력, 경영관리 능력, 성실성 등이다. 두 차례 석유파동을 겪었던 정부가 산유국과의 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다.
당시 국내엔 강대한 석유패권국과 협상자리를 만들기는커녕 친분을 가진 회사조차 드물었다. 그럼에도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석유공사는 포기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매물이었다.
신뢰는 비즈니스의 모든 것을 좌우하며, 쌓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특히 사업의 중장기적 안정성이 요구되는 장치 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가 내놓은 산유국 투자 및 원유 조달 능력은 벼락치기로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산유국과 깊은 신뢰 관계를 쌓은 회사는 선경이 거의 유일했다.
최종현 전 회장은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남다른 친분을 맺었다. 최 전 회장과 사우디의 친분이 빛을 발한 것은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1973년이다. 당시 사우디가 주축인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을 석유 금수국으로 분류해 10개월 안에 모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정부는 최 전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최 전 회장은 비공식 정부사절로 사우디를 방문해 석유공급 재개의 물꼬를 텄다. 또 1975년에는 사우디 국영화학공사(NCI)가 추진하는 플라스틱 공장 건설계획에 10%를 투자키로 했고, 무역상사 출범 뒤에는 수출대금 일부를 사우디 왕가 대리인에 수수료로 지급했다.
1976년에는 사우디 왕족을 국내에 초청하는 등 친분을 이어갔다. OPEC의 ‘황제’ 격인 야마니 사우디 석유상은 1977년 최 전 회장을 초청해 “한국이 필요한 만큼 원유를 증량 공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선경과 사우디 국영석유광물공사는 장기 원유공급 계약을 맺고, 1980년 하루 5만
배럴, 1981년 하루 7만 배럴, 1982년 하루 10만 배럴을 공급하기로 하는 등 양측의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정유·화학사업 진출로 제약·반도체 교두보 마련
석유는 모든 산업의 근간이며, 대부분 소재·부품의 어머니다. 석유공사를 인수한 선경은 사업을 폭넓게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SK의 현재 모습은 최 전 회장이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전 회장은 에너지·화학의 뒤를 이을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꼽고 1993년 대덕연구단지에 연구팀을 꾸려 제약사업에 첫 발을 내밀었다. 또 미국 뉴저지에 연구소를 세우며 바이오 역량 강화에 나섰다. 뉴저지는 푸르덴셜 등 대형 보험사, 존슨앤드존슨과 같은 화학회사, 아마린 같은 대형 제약사가 밀집한 지역이다.
신소재·정밀화학 회사인 SK케미칼이 헬스케어·의약품 등 생명과학 부문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도 최 전 회장의 노력에서 비롯됐다. 최 전 회장이 끈기 있게 폴리에스터필름개발에 성공했듯, 바통을 이어받은 최태원 회장도 독자기술 확보를 위해 매년 제약·바이오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SK바이오팜이 지난해 1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독자개발 뇌전증 치료제 신약 승인을 받아 5월부터 미국 시판에 나서는 등 꾸준한 투자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투자를 받은 SK바이오사이언스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나서며 글로벌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SK그룹 매출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역시 최종현 전 회장이 밑그림을 갖고 추진한 분야다. 그는 반도체가 폴리에스테르처럼 산업의 쌀로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판단했다. 반도체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글로벌 기업의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1978년 선경의 자사회로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 당시 상공부가 중점지원 전자업체로 지정할 만큼 성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등으로 회사의 경영 악화가 가중되며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선대 회장이 놓친 반도체 사업을 최태원 회장이 2011년 하이닉스를 인수하며 31년 만에 다시 일으켰다.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면 막대한 투자 때문에 ‘승자의 저주’ 우려가 컸지만 최 회장은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5조3000억원(2019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SK그룹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밀어주기 논란’에 제2이동통신 울분 삼키며 포기
선경은 미주 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마련해 1984년부터 통신사업 진출을 준비했다. 재무·기술 등을 기준으로 한 1차 심사 결과 선경(대한텔레콤)이 8388점으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7496점을 얻은 코오롱, 3위는 7099점의 포항제철이었다. 사업계획 및 이행 평가 등을 중심으로 한 2차 심사 결과에서도 선경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돈 관계인 최 전 회장의 선경을 밀어준 것 아니냐는 특혜 논란이 일었다. 이에 강력한 대선주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거세게 압박했고, 결국 최 전 회장은 사업권을 정부에 반납했다.
특혜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코오롱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겹사돈, 포스코는 민정당 총재를 맡았던 박태준 전 회장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회사가 사업권을 받았든 특혜 논란이 일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제2이동통신 선정 당시 실무 책임자였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전 KT 부회장)은 “어떤 외압도 없었다. 여러 불공정 논란이 발생할 수 있어 객관적 평가에 신중을 기했다”며 “건전하고 규모가 큰 기업들을 주요주주로 참여시킨 선경이 사업 전개 방향·재무상황 등에서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92년 8월 27일 당시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은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해 사업자로 선정됐으나,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취지에서 사업권 반납한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문제를 다음 정부로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다음 정부에서 실력으로 객관적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실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제1이동통신사인 한국이동통신을 매물로 내놨고, 선경은 입찰에 참여했다. 선경이 한국이동통신 인수전에 뛰어들자 8만원대이던 주가가 3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결국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23%를 4271억원에 사들여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 사업권 600억원보다 7배 비싼 비용을 치르고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이다.
선경 내부적으로 고가 인수 논란이 일자 최 전 회장은 “통신사업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나. 회사 가치는 앞으로 더 키우면 된다”고 일축했다. 이후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사명을 SK텔레콤으로 바꾸는 한편 ‘스피드 011’을 슬로건을 내건 CDMA 사업에 성공해 국내 1위 통신사로 자리잡았다. 2002년에는 신세기이동통신을 인수했다.
당시 SK텔레콤은 가입료와 보증금이 비싼 데 비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들은 저렴한 요금제로 가입자를 빠르게 확보했다. 이에 SK텔레콤은 TTL 등 마케팅과 다양한 할인 요금제 등을 내세워 시장지배력을 지켰다. SK텔레콤은 현재 이동통신 사업을 근간에 두고 모빌리티·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 첨단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최 전 회장은 양복 안감을 만들던 선경직물을 SK를 국내 시가총액 2위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1975년 연 매출 751억원, 종업원 8200명인 회사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8년엔 연 매출 37조원, 종업원 2만1300명으로 성장했다. 이를 최태원 회장이 취임해 SK 매출규모를 4.4배 많은 161조원 수준으로 키웠다. SK의 그룹 전체 시가총액은 133조원(8월 21일 기준)에 달한다.
최태원 회장 취임 후 매출 500배 증가
SK 관계자는 “최종현 전 회장은 기업 경영은 물론 국가적 인재육성에 열정을 바쳤다”며 “그의 경영철학과 유산은 SK의 핵심 경영화두인 사회적가치 경영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전 회장은 당장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10년, 20년을 내다보고 SK의 탑을 쌓았다. 최 전 회장의 족적은 국제 정세의 격변과 거대한 산업 전환 등 커다란 숙제를 받든 경영자들에게 중장기 가치를 두고 사업에 임할 것을 당부한다. 총신이 길면 총알은 흔들리지 않고, 표적에 정확히 꽂힌다. 대내외 환경과 기술의 변화, 시민들의 가치 변동 등 경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며 체계적 접근과 과감한 경영 판단이 필요한 때다.
[인터뷰] SK의 이통사업 진출 특혜논란 관련 입 연 당시 실무총괄 석호익 회장
“한 치도 문제없어, 선경이 대부분 평가항목서 압도적 1위” SK텔레콤과 관련해 늘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최종현 전 SK 회장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특혜를 받아 1992년 제2이동통신 시장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SK텔레콤이 통신사업에 진입한 것은 그 다음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때다. 1994년 제1이동통신 사업자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다.
그럼에도 SK가 노 전 대통령의 호혜를 입어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는 믿음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결혼이 만든 ‘맥락적 해석’이다. 한국은 고맥락 사회라 서로 탁하면 척하고 알아차리는 게 미덕이지만, 때로는 맥락을 잘못 파악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이에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의 실무 총괄이었던 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 회장을 만나 당시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석 회장은 행정고시 21회로 1977년부터 체신부·정보통신부 요직을 거친 관료 출신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원장·KT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당시 선경(대한텔레콤)을 선정한 이유는 뭔가.
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부터 선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돈을 많이 들였고, 준비도 철저히 잘했다. 당시 대주주·주요주주를 나눠 재무건전성 평가를 했는데, 은행과 해외 기업들이 주요주주로 참여해 점수가 크게 올랐다.
정치적 고려나 청와대의 압력은 없었나.
당시 송언종 체신부장관이 노 전 대통령에게 ‘사돈 관계인데 문제가 없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제2이동통신 신청 사업자 모두 청와대·민주자유당과 관계가 깊어 어느 곳이 되더라도 말이 많을 것’이라 했다. 청와대의 별도 지시나 압력은 없었다.
심사 평가 기준은 어떻게 정했나.
내가 실무 총괄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연구원, 안진회계법인 대표 등 총 7명이 만들었다. 재무·투자·안전성·기술력 등을 고루 따졌다. 사전에 사업자 선정과 허가신청 요령을 공개했는데, 선경은 모든 항목에서 뭐든 들어맞았다.
김영삼 정부 때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나.
취임 첫 해 체신의 날 대통령 말씀자료에 ‘전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는 엉터리며 왜곡됐으니 앞으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추진하겠다’는 메시지가 쓰였다. 체신부 상관과 청와대 수석을 찾아가 이 문장을 삭제해 줄 것을 직접 요구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법률·행정적으로 한 치의 문제도 없었다.
-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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