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벌 야합이 만든 기시다 총리 시대, ‘기대할 것들과 포기할 것들’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킹메이커 아베 지원으로 고노 눌러…‘뚝심‧정치력‧정책력’ 보여줘야 재임 가능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일본을 바꿀 수 있을까? 기시다는 9월 29일 열린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해 10월 4일 임시국회에서 일본의 제100대 총리에 오르게 된다.
기시다가 취임하면 21세기 들어 12번째(인물로 치면 아베가 2차례 헸기 때문에 11번째) 일본 총리가 된다.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죠(小渕恵三·1998~2000년 재임), 모리 요시히로(森喜朗·2000~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2001~2006년), 아베 신조(安倍晋三·2006~2007),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2007~2008), 아소 다로(麻生太郎·2008~2009),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2009~2010), 간 나오토(菅直人·2010~2011), 노다 요시히로(野田佳彦·2011~2012), 다시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2012~2020) 2기, 스가 요시히데(菅義偉·2020~2021) 등이 그들이다. 1979년을 재임해 역대 장기 재임 6위에 이룬 고이즈미와 3186일간 자리를 지켜 1위를 기록한 아베를 제외하고는 모두 만 2년을 넘지 못한 단명 총리다.
이 때문에 기시다가 장기 재임할 수 있을지 아니면 단명 총리에 그칠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특히 자민당 입장으로선 장기 재임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정국을 운영한 장기 재임 총리인 아베와 취임 1년여 만에 코로나19 부실 대응 여파로 지지율이 급락해 사실상 경질된 스가를 1년 새 보고 있기 때문에 기시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만약 기시다가 싹을 보이지 않으면 누구보다 빨리 경질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뚝심과 정치력, 정책력을 보여주고 대중의 인기를 확보할 경우 상당 기간 재임이 가능하다.
‘무색무취’ 정치인…내년 참의원 선거 승리 과제
기시다는 사실 무색무취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 때문에 당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대중의 지지도는 낮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처세가 아베와 아소 체제의 지원을 얻어 큰 어려움 없이 자민당 총재가 되고 일본의 제100대 총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의원내각제인 일본 총리는 국민이 직선으로 뽑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기시다가 21세기 일본의 12번째 총리임에도 일본 정치의 낡은 관행을 온통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가 파벌 정치다. 사실 기시다는 파벌 간, 특히 최다 파벌인 호소다파의 아베 전 총리와 아소파의 아소 전 총리의 지원에 힘입어 자민당 총재에 당선될 수 있었다. 호소다 자신이 자민당 7대 파벌의 5위에 해당하는 기시다파의 수장이지만 아베와 아소의 지원 없이 당선이 불가능했다. 기시다가 대중적 인기는 낮은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기시다는 지난 9월 21일 보도된 산케이(産經)신문과 계열사인 후지뉴스네크워크(FNN)의 여론조사(응답자 1116명)에서 15.2%의 낮은 지지율로 52.6%의 지지를 얻은 고노 다로(河野太郞) 행정개혁 담당상에 이어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중에게 기시다는 그저 고만고만한 정치인으로 비쳤다. 큰 문제도 없지만 그렇다고 총리감으로 매력적이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기시다를 ‘일국의 총리’에 올린 것은 아베가 수훈갑이다. 아베는 파벌 소속 의원들을 총동원하는 것도 모자라 전화기를 들고 당 총재를 뽑는 1차 선거에 투표권이 있는 수많은 국회의원과 이들과 동수인 당원 및 당우(黨友·당원이 아닌 당 외부의 지원자와 관련자)를 설득했다. 기시다가 심지어 1차 투표에서 애초 1위가 예상되던 고노를 1표 차이로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것부터가 아베의 공로로 볼 수밖에 없다. 2차 투표는 국회의원과 47명의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대표로 이뤄지기 때문에 애초에 파별 담합으로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기시다는 1차 투표에서도 256표를 획득해 255표를 얻은 고노를 1표 차이로 앞섰지만 과반을 얻지 못해 결선투표에 갔다. 결선 투표에서 기시다는 넉넉하게 257표를 득표해 170표에 그친 고노를 87표 차이로 꺾었다. 고노 돌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소의 경우 자기 파벌 소속인 고노가 대중적 인기를 엎고 독자적으로 총재에 출마하면서 파벌 차원의 지원을 하지 않고 기시다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시다 당선의 일등공신은 아베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아베는 일등공신 수준을 넘어 수렴청정하며 정국을 맘대로 조종하는 킹메이커로 등극한 셈이다.
아베의 막강한 ‘파벌의 힘’ 드러나
지난 9년간 자민당의 파벌 간 합종연횡과 밀실 담합을 이끈 사람이 바로 아베와 아소였다. 현재 일본 자민당에는 호소다파(細田派·중의원 61명+참의원 35명=96명), 아소파(麻生派·42+13=55), 다케시타파(竹下派·32+20=52), 니카이파(二階派·37+10=47), 기시다파(岸田派·34+12=46), 이시바파(石派派·15+1=16), 이시하라파(石原派·중의원만 10) 등 7대 파벌이 있다. 무파벌은 불과 63명(중의원 45+참의원 18)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자민당은 케케묵은 파벌 정치를 해왔다.
21세기 한복판에 자민당 총재로 당선돼 사실상 총리 티켓을 예약한 기시다는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해 보수 빅텐트 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하면서 성립한 이른바 ‘55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 재무장에 더욱 적극적인 일본민주당계와 덜 적극적이면서 미국에 협조적인 자유당계에서 비롯한 파벌이 분화와 합종 연횡을 거쳐 오늘날까지 파벌 정치를 이어오고 있다. 기시다도 아베의 도움으로 이런 파벌 정치의 수혜를 얻어 자민당 총재와 총리 자리를 거머쥐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가 정치 2선으로 물러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킹 메이커로서 뒷방에 자리 잡고 앉아서 기시다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수렴청정을 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아베가 정치적 숙원으로 삼고 있는 평화헌법 9조 폐기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드는 일, 자위대의 정식 군대화 등은 아베의 의지를 강하게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10월 4일 이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나카타초(永田町)의 총리 공관에 들어설 기시다의 집무실에는 아베의 냄새가 날 가능성이 농후한 이유다.
기시다가 보여주는 일본 정치의 또 다른 모습이 세습정치다. 자민당에선 2017년 10월 총선으로 구성된 현재의 중의원 218명 중 72명, 즉 3분의 1이 세습의원이다. 중의원과 참의원 전체에선 29%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72) 총리 내각 각료의 과반수가 세습 정치인이다. 어디서 들은 듯한 성씨가 많은 이유다. 사실 이는 야당인 입헌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세습정치는 일본 정치의 봉건성·중세성을 보여주는 요소의 하나다. 자민당이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인이 들어오면서 변화하는 시대를 반영하고 활력으로 가득 찬 정당이 아닌 세습 기득권 정치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비판을 받는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기사다는 조부·부친에 이어 3대 세습정치인이다.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집안의 지역구인 히로시마에서 9선을 기록했다. 최장수 외상(2012~17년)과 당 3역인 자민당 정조회장(2017~2020년)을 지냈다.
성과와 업적을 낼 수 있는 정책 펼칠 가능성 높아
특히 외상 재임 중이던 2015년 한국의 윤병세 외교부 장관을 파트너로 한일 위안부 합의를 일궜다. 당시 양국 합의와 일본의 유감 표명에 회의적이던 아베 총리를 설득한 것도 기시다였다. 반대로 합의가 번복됐을 때 정치적 책임을 뒤집어쓴 것도 기시다였다.
기시다가 일본이 지닌 수많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기시다는 29일 당선 연설에서 “정치가 국민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신뢰를 잃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신임 자민당 총재이자 총리 예정자인 기시다가 공개적으로 자민당이 이끄는 일본 정치가 위기이고 일본의 민주주의가 위기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하다.
기시다는 또 “계속 국난이 이어지고 있다”며 “코로나19대책을 필사적인 각오로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코로나19와 이로 인한 경제난 극복에 총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다. 앞으로의 정책 무게를 여기에 두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코로나19로 침체한 경기를 살리기 위한 수십조엔(수백조원) 규모의 경제 대책을 연내에 수립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의 실현, 소자화(저출산) 대책 등 우리의 미래와 관련한 중대 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문제 해결을 위해) 오늘부터 전력으로 달리겠다”고 말했다. 코로나와 경제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다. 외교·안보에선 미국에 협력하며 중국에 대응하는 인도·태평양 체제의 구축에 힘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기시다가 정치적 퍼포먼스보다 실제로 구체적인 성과와 업적을 낼 수 있는 정책으로 대결할 가능성이 커 보이는 이유다. 사실 성과와 업적은 아베의 입김에서 벗어나 총리 기시다의 단명을 막는 가장 큰 힘이 될 수 있다. 유일한 힘일지도 모른다.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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