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번영한 경주 최 부잣집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⑧]
10대 넘도록 큰 부자로 남아 나눔의 덕 실천
지나친 부의 축적, 권력 남용 경계하며 가문 이어가
흔히 부자(富者)는 삼대를 가지 못한다고 한다. 부를 일구기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 10대가 넘도록 큰 부자였던 집안이 있다. 마지막 대에 이르러서도 망한 것이 아니라 대규모 기부를 통해 스스로 부를 해체했다. 교동법주로도 유명한 경주 최 부잣집 이야기다.
조선 역사에 스며들어 있는 최씨 가문의 전통
아들 최동량은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했다. 개령현감, 용궁현감 등의 벼슬을 지낸 그는 시비법과 이앙법을 도입해 소출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소작료를 대폭 줄여줌으로써 재산을 현 상태로 유지했다. ‘부잣집’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러서다. 그는 적극적인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도 “재물은 거름과 같아서 나누면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지만 쌓아두면 악취를 풍긴다”는 신념이 있었다. 흉년이 들면 쌀을 빌려 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내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다. 죽기 직전에는 “내가 빌려준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담보 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4대인 최의기는 가업을 확장하면서도 근검절약하고 이익에 얽매이지 않았다. 교동으로 터전을 옮긴 9대 최세린은 흉년이 들 때마다 대량의 곡식을 내어놓았으며, 10대 최만희도 그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굶주린 사람들을 대규모로 구제하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없는지를 염려하곤 했다.
사업 수완과 자산 운용 능력이 뛰어났던 11대 최현식은 가문의 재산을 더욱 크게 늘렸는데, 그 역시 어려운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아낌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당시 남부지방을 휩쓸며 부자들을 약탈하던 활빈당(대규모 무장 농민 집단)이 경주를 공격하자, 이웃 농민은 물론 부랑자, 걸인까지 몰려와 최 부잣집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부자인 12대 최준은 이웃을 돕는 조상들의 선행을 계속 이어감과 동시에 상해 임시정부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기 위해 대구은행과 백산상회 설립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 대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교)을 건립하고 전 재산을 대학 재단에 기탁한다. 300년에 걸친 실로 숭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300년 이어간 가문의 부, 6개 가훈이 원동력
첫 번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과거시험을 보라는 것은 학문을 닦아서 그것을 검증받으라는 의미이고 양반 네트워크에 포함되라는 뜻이다. 가문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며, 양반 신분을 유지해야 관(官)이나 지역 유지들과의 관계를 원활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은 관직에 나서지 말라는 말이다. 권력을 탐하다가 몰락하거나, 정치 싸움에 휘말려 피해를 보지 않도록 경계한 것이다.
두 번째, “재산을 만석 이상 모으지 마라.” 최진립이 남긴 유훈과 같은 맥락이다. 최 부잣집은 3대 최국선 대에 이르러 만석꾼이 되었다. 토지에서 거둬들이는 쌀의 소출량이 만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유한 토지가 확대될수록 소출량도 늘어나야 한다. 한데 최 부잣집은 토지가 늘어도 만석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 맞춰 소작농으로부터 받는 소작료를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최 부잣집의 소작료는 매우 싼 편이었는데, 재산이 늘어날수록 소작료가 추가로 인하되니, 소작농들이 최 부자가 더 큰 부자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는 이색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함으로써 지주와 소작농 간의 상생을 가져온 것이다.
세 번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마라.” 흉년은 토지를 증식하기 쉬운 때다. 당장 먹고 살기도 어려워진 사람들이 자신의 전답을 싼값에 내놓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매입하면 당연히 큰 이윤을 남길 수 있겠지만, 최 부잣집은 이를 금기로 여겼다. 남들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면 필시 원한을 남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에서 사방 백 리면 영천, 울주, 포항을 포괄하는, 경상북도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최 부잣집이 부를 축적한 것은 혼자 잘나서가 아니다. 지역민들의 도움과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지역에서 최소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 부자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책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라.”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며느리에게만 검소함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최 부잣집 역대 가장들의 공통적 특징이 ‘검소’, ‘검약’이다. 장차 안살림을 책임져야 할 며느리에게 처음 3년 동안 이러한 최 부잣집의 정신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는 의미다. 마지막 여섯 번째,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우리 전통에서는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에서 묵어가고, 그런 사람을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최 부잣집의 나그네 접대 규모는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동시에 100명이 넘는 손님이 묵는 일도 있었다. 접대비용으로 연간 천석을 소모했다고 한다. 이는 따뜻한 인심을 보여준 측면도 있지만, 나그네를 통해 전국 각지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상 6개의 가훈을 통해, 우리는 10대에 걸친 만석꾼 [최 부잣집]의 힘은 권력을 탐하지 않고, 근검하고 절약하며, 정보를 중시함으로써 얻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지 않고, 이익을 공유했으며, 아낌없이 베풂으로써 부자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한 데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대 가장들이 이 가훈을 힘써 실천했기 때문에 300년 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며, 수많은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고, 부가 사라진 지금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이용우 기자 lee.yongwo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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