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목숨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초상화 속 비하인드 스토리
[라의숙의 그림으로 읽는 역사 속 패션①]
영국 헨리 8세, 딸 낳은 왕비 앤 블린 처형
궁정화가가 그린 왕·여왕 초상화에는 시대상 반영
16세기 초에 찢어진 청바지 패션 이미 유행
엘리자베스 1세, 옷에 보석 등으로 화려한 장식
그의 시선은 마치 구멍이라도 뚫을 것처럼 벽에 걸린 자화상(그림 1)에 멈춰져 있다. 아니, 어찌 보면 허공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연 튜더스 가문을 위해 난 무엇을 했나’. 190㎝의 훤칠한 키에 허리는 52인치로 두꺼운 데다가 젊었을 때 말 타다 떨어져 다친 다리 때문에 특별한 보조장치 없인 걷기조차 어려웠던 사람, 이런 불편한 몸에도 카리스마는 넘쳤고 왕비를 무려 6명이나 거느린 왕. 당장이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오랫동안 붙박이처럼 지켜 서 있던 그림 앞의 주인공은 바로 헨리 8세다.
그가 보고 있던 자화상 그림 속 이야기는 튜더가의 장남 아서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16C 초,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스페인과 각각 동맹관계에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는 장남 아서를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그림 2. 아라곤의 캐서린으로도 불림)과 결혼시켰으나 장남 아서는 결혼 4개월 만에 죽었다.
국왕은 부랴부랴 순번대로 왕위 계승자인 차남 헨리를 형의 미망인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당시 형수와의 결혼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 로마 교황의 사면장이 없으면 아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국왕은 묘수를 생각해냈다. 먼저 스페인의 승낙을 얻은 후 로마 교황의 사면장을 받아 내면 그만 아닌가.
캐서린과 헨리는 끝내 약혼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무릎을 치며 이제 됐다 싶어 했던 국왕은 맘이 놓여서인지 둘의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1509년 결혼식을 못 보고 죽고 말았다. 뒤를 이어 헨리 8세가 즉위했다. 그가 왕이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캐서린과의 결혼이었다.
7살 연상인 캐서린과 힘들게 맺은 결혼 생활은 18년간 내내 불운하기만 했다. 아이 여섯을 낳을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은 듯 보였지만 아이들은 낳는 족족 모두 죽고 메리 공주 한 명만 남게 된다.
10시 30분에 멈춘 시곗바늘의 비밀
부인이 아들을 못 낳자 부인의 시녀 중 한 명인 앤 블린(그림 3)에게 눈을 돌린다. 사실 앤 블린은 첫눈에 반할 만큼 예쁘진 않았지만 매너가 눈길을 끌었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받았기 때문인지 그녀의 우아하고 세련된 몸짓과 매너가 헨리 8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비인 캐서린과 앤 블린의 매력은 각각의 초상화에서도 잘 나타난다(그림 2,3 참조).
캐서린은 머리에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고 앞 중심이 각이 지게 철사로 만든 전통적인 영국식 게이블 후드(gable hood)를 썼다. 이와 달리 앤 블린은 머리카락이 보이고 부드럽고 둥근 형태의 프랑스식 후드를 쓰고 있어 세련되고 사랑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부드러운 외형의 모습과는 달리 앤 블린은 헨리 8세를 볼 때마다 캐서린과 이혼하라고 다그쳤다.
원래 헨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통에 전통 캐톨릭의 수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믿던 교회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교회는 이혼 금지령을 고수했다. 캐서린과의 이혼이 교회 벽에 부딪힌 셈이다. 그러자 헨리 8세는 1534년 영국 국교의 독립을 선언하는 수장량을 발표하게 된다. 가톨릭에서 떨어져 성공회가 시작됐다.
이 시기에 궁정화가로 활동하던 홀바인이 그렸던 ‘대사들’(그림 4)을 보자. 종교적 문제를 논의하고자 영국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Jean de Dinteville)과 주교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가 캔버스 속 주인공이다. 왼쪽이 댕트빌, 오른쪽이 셀브이다. 중앙의 2단 테이블 주변을 들여다보면 그림 속 해시계 바늘은 4월 11일 오전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왜 거기서 멈춰져 있을까. 왜 하필 그 시각인가.
헨리 8세와 캐서린이 이혼에 도장 찍은 때가 바로 그 시간이다. 얼마나 힘들게 헤어졌으면 이혼한 날과 시간까지도 정확하게 그리게 했을까 싶다. 멈춰진 그림 속 시계엔 헨리의 마음이 담겨있는 셈이다. 그림 하단에 있는 현이 끊긴 만돌린 비슷하게 생긴 악기(류트)는 종교적 불협화음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자 곧바로 600여 개의 수도원을 없애버렸다. 막대한 교회의 땅과 돈을 몰수하는 동안 앤과의 결혼식은 떠들썩하게 벌렸다. 혹시나 하면 역시인가. 또 딸이다. 이 딸이 나중에 보란 듯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된다. ‘이번엔 틀림없이 아들이다’라며 철석같이 아들을 학수고대했던 헨리 8세는 딸을 낳은 앤 블린을 반역죄란 누명을 씌워 단두대에서 처리해 버렸다. 딸 낳았다고 그냥 죽이나. 지금 잣대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부인을 단두대에서 처형한 후 세 번째로 맞이한 왕비가 제인 시무어(그림 5)다. 제인은 헨리가 그토록 바라던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았으나 이게 무슨 변인가. 이번엔 불행히도 아들을 낳다가 자신이 죽었다. 아들 못 낳고 딸 낳아서 죽인 둘째 부인과 아들은 낳았지만, 본인이 죽은 셋째 부인 중 누가 헨리 마음에 남아 있을까. 나중에 헨리 8세가 함께 묻힌 왕비는 바로 제인. 헨리 8세의 사랑 나침판을 가늠케 해준다(일설에는 해산 과정에서 산모와 아들 중 목숨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들을 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궁정에선 대놓고 네 번째 신붓감을 찾았다. 마땅한 후보자 정보는 당시 관례대로 신붓감들의 초상화. 그림을 보고 후보자를 골랐다. 한마디로 그림 빨이 먹혀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림 빨’은 화가의 붓과 손에 달렸다. 궁정화가인 한스 홀바인은 신교도 독일 귀족인 클레브즈의앤의 초상화(그림 6)를 그렸다.
그림을 보자마자 뭐에 꽂혔는지 헨리는 매우 흡족하여 앤을 찍었다. 그러나 막상 실물을 보자 화부터 냈다. 맙소사. ‘조명빨’에 끌렸다가 대낮 민낯에 실망한 셈이다. 실물을 본 후 단 한 번도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심지어 앤을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불렀다. 그뿐만 아니다. 결혼을 주선했던 대법관 크롬웰은 왕의 총애를 잃고 대역죄로 처형당하게 된다. 그림을 그렸던 홀바인은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 일로 밥줄인 왕실의 그림 그리기 일도 사라졌다. 헨리의 분노는 여기서 그칠까. ‘그림빨’로 사람 눈길을 끈, 못난이 왕비를 그냥 둘 헨리가 아니다. 얼마나 분했던지 6개월 만에 결혼 무효화를 선언하게 된다.
정작 그림빨 앤의 행동은 쿨했다. ‘그래, 좋다’며 이혼 요구를 군소리 없이 오케이 했다. 그러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헨리 8세는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이라 부르며 엄청난 재산을 하사했다. 만일 구시렁대며 계속 왕비로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피웠다면 그녀 역시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그림빨로 왕비가 된 앤은 쿨하게 현실을 인정해 목숨도 부지하고 떼돈도 받았으니 참 현실적 선택을 한 셈이다.
또다시 싱글이 된 왕은 다섯 번째 왕비를 맞이하는데 이번엔 10대 어린애를 골랐다. 캐서린 하워드(그림 7)가 연하의 주인공. 그녀에겐 이미 약혼자가 있었는데, 결혼 이후에도 겁 없이 밀회를 즐기다 20세의 나이에 그만 처형당했다. 캐서린은 사형 당시 안 죽으려고 단두대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죽었다 한다.
이제 헨리도 늙었다. 여섯 번째 왕비는 캐서린 파아(그림 8)다. 미망인이었던 캐서린은 변덕스러운 헨리를 잘 이해하여 토닥거려 주고 알아듣게 조언을 했다. 잔소리도 요령껏 한 모양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남편에게 부탁을 겸한 조언 하나를 했다. 당시 첫 번째 왕비의 딸 메리는 하인의 신분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녀의 신분을 다시 서열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영원히 팔팔할 것만 같던 헨리도 힘이 빠지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향년 55세. 뒤를 이어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웠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아홉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어린 왕은 불과 6년의 섭정을 끝으로 15세의 나이에 죽는다. 단명이다. 서열 순위에 따라 드디어 눈총만 받던 한 많은 메리 공주(첫째 부인 캐서린의 딸, 그림 9)가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드디어 여왕 시대, 한을 풀다
어머니의 나라였던 스페인(당시엔 아라곤)의 피를 물려받은 탓인지 통치 기간 동안가톨릭교에 반대하는 사람은 모두 반역 죄인으로 참수시키고 성공회 성직자들은 대거 체포해 처형시켰다. 심지어 이단자로 몰린 300여 명을 꼬챙이로 꿰어 불에 태워 죽였다. 피의 여왕이라는 악명을 받을 만하다.
남을 무자비하게 죽이면 자신도 피눈물을 보게 되는 법. 무자비한 대숙청을 감행하며 잉글랜드를 떨게 했던 공포정치도 막을 내린다. 공포의 여왕은 뜻하지 않게 난소종양에 걸려 재위 5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드디어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에 올랐다. 영국은 다시 뒤집어진다. 성공회를 국교로 선포한 것이다.
종교 문제가 안정되자 영국은 평온해진다. 1588년 스페인과의 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두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골든 에이지. 이른바 튜더왕조 시대다. 워낙 굴곡이 많은 탓인지, 드라마틱한 사건이 많아서인지 튜더왕조 이야기는 영화의 단골 소재다.
당시에는 사진이 없었으므로 궁정화가들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는데 헨리 8세의 단골 담당 화가는 홀바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초상화는 니콜라스 힐리어드와 마르쿠스 헤라르츠가 주로 그렸다.
이렇게 궁정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는 그 시대의 패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이다. 헨리 8세의 단골 전속 화가인 홀바인은 ‘독일의 라파엘로’라 불렸다. 헨리 8세의 초상화(그림 1)를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남성복을 잘 알 수 있다. 홀바인은 독일 태생의 미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운 후 스위스로 건너가 바젤이란 동네에서 이름을 날렸다. 책벌레, 인문학 글쟁이인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1515년판)에 82점의 삽화를 그렸다. 이를 계기로 런던 상류사회에 이름을 날렸다. 토머스 모어의 도움 덕에 1533년부터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올라갔다. 그는 세상에 일에 무관한 듯 붓 들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종교다, 정치다’며 바깥 세상은 온통 시끄러웠지만, 화가는 귀를 닫았다.
홀바인의 후견인은 당시 사상가였던 토머스 모어였다. 헨리 8세의 이혼을 팔을 걷어붙이며 말리다가 고위직인 대법관직도 내놓고 나중엔 대역죄로 몰려 후견인 토머스 모어가 억울하게 처형되자 화가는 새 대법관 토머스 크롬웰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 블린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
16세기 초. 당시 남자 옷의 특징은 인체를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스타일에 장식을 붙였다. 주로 슬래쉬(그림 10)란 장식이 유행했다. 슬래쉬란별것 아니다. 원래 독일 군인들이 전쟁 중 찢어진 군복에 텐트나 깃발 조각 등을 대고 기워서 사용한 것이 장식용으로 변했다. 그때 벌써 옷감을 찢어 속옷이나 안감이 일부러 보이도록 했다. 처음엔 편하다며 팔다리, 관절 부근에 붙였다. 지금의 찢어진 청바지 패션이 그때 이미 유행한 셈이다.
또 하나의 장식으로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코드 피스(cod piece, 그림 11). 이 장식은 주머니라는 의미로 남성의 성기를 감싸는 덮개였다. 원래 군인들의 성기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남성의 우월성을 표현했다. 자연 점점 사이즈가 커지고 외부 장식도 늘어났다. 자신과 남의 눈에 잘 뜨이도록 하다 보니 갈수록 커졌다. 나중엔 보기에도 민망했던지 교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남성의 체형도 과장했다. 가슴과 배를 앞으로 불룩 나오게 부풀리는 것이 유행했다. 이른바 배불뚝이 패션. 배의 돌출 부분을 피스코드벨리(peascod belly, 그림 12)라고 한다. 배를 맹꽁이처럼 부풀리기 위해 안에다 헝겊 조각이나 패드, 왕겨 등을 넣었다. 배가 나와야 상남자였다.
한스 홀바인이 그린 헨리 8세의 초상화(그림 1)속 옷으로 다시 가 보자. 상의 전체에 슬래쉬 장식을 하여 속에 받쳐 입은 흰색의 리넨 셔츠가 보이도록 하였고 돌출된 배(피스코드벨리)와 함께 자신에 찬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하의에 입고 있는 호즈(양쪽으로 신었던 양말에서 후에 바지의 개념으로 바뀜) 앞 중심에는 장식이 가미된 코드 피스가 보인다. 허리 아래엔 주름 스커트 형식의 베이시스를 둘러 입고 있다. 맨 위에 어깨가 과장되게 넓어 보이는 형태의 외투를 착용한 이 초상화는 그야말로 카리스마 그 자체다.
개미허리에 풍성한 엉덩이, 목엔 큰 주름
(그림 13)은 마르쿠스 헤라르츠가 그린 초상화이다. 60을 바라보는 여왕 얼굴엔 주름 하나 그리지 않았다. 허리 부분은 개미허리처럼 만들고 하체는 풍성하게 그렸다. 옷에 달린 장신구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상의에 숨도 쉬기 힘든 ‘스토마커’라는 코르셋을 착용했다. 앞부분은 역삼각형으로 뾰족하게 했다. 스커트 부분은 속에 ‘파딩게일(farthingale)’이라는 원통형의 속옷 받침대를 입어 억지로 넓게 퍼지게 입었다. 이러니 허리는 더욱 잘룩하게보일 수밖에.
소매는 몸판에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도록 했다. 어깨에 둥근 모양의 윙을 달기도 하고 이중으로 달기도 했다 일명 행잉 슬리브(hanging sleeve) 패션이다. 목둘레는 넓고 뻣뻣한 수레바퀴형 러프 칼라. 초기엔 작았지만 갈수록 모양이 거대해져서 나중엔 머리도 숙이지 못할 정도였다. 당시 목둘레 주름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옷 만들기가 중노동이었다. 오죽했으면 러프만을 따로 손질하는 하인을 두기도 했다. 부자는 이게 커야 했다. 러프의 크기는 부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장식적인 것을 매우 선호하였는데 옷마다 진주, 루비 등의 보석을 주렁주렁 달았다.
수작업 목둘레 주름 탓에 중노동에 시달려
여왕은 홍역도 앓았다. 홍역으로 머리카락이 빠져, 이마 부분이 대머리가 된 것을 감추기 위해 항상 가발을 썼다. 가발 종류만도 80여 가지였다 한다. 여왕은 항상 자신의 외모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해 멀리서도 한눈에 본인을 알아보게 했다. 이런 과도한 패션은 당시 초상화에서 단골로 볼 수 있는데, 한마디로 옷 속에 몸이 갇히는 꼴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짐은 국가와 결혼하였다’는 말을 자주 했고 ‘백성은 내 자식과 같다’고 하면서 백성들의 지지를 끌어낸 여왕이다. 언제나 자신의 몸보다 과장되게 만든 옷을 갑옷처럼 두르고. 당시 여왕의 그림들은 그것을 말없이 입증하고 있다.
*라의숙 교수는 대원대학 교수와 경희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패션 칼럼니스트이자 섬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희대에 출강 중이다.
라의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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