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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중 물고 물리는 반도체 치킨 게임 [유웅환 반도체 열전]

저가 전략으로 미국 아성 무너뜨린 일본
한국·대만에 추월 당해 기술 후퇴
중국, 중저가 양산으로 한국 기술 위협

 
 
조 바이든 대통령이 3월 9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캠퍼스에서 비즈니스 리더 및 주지사와 가상 회의를 열고 반도체 칩 공급망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치킨 게임’(Chicken Game), 겁이 많은 닭의 습성에서 유래한 이 말은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모두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게임 이론이다. 최근 몇 년간 메모리반도체 한국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는 중국의 거센 추격세는 치킨 게임을 연상시킨다. 중국은 DDR4·LPDDR5라는 D램 반도체를 이미 양산하는 등 로엔드(중저가) 분야에서는 3~5년내 한국을 따라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헌데 알고 보면 반도체 분야는 1980년대부터 약 10년 주기별로 한 번씩 거대한 치킨 게임을 겪어 왔다.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을 급격히 인하하는 방식으로 연이어 이뤄지면서, 업계에는 적자의 늪 혹은 파산으로 이어지는 기업들이 생겨났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경기도 평택 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공장 방문 기념으로 서명한 차세대 GAA(Gate-All-Around) 기반 세계 최초 3나노 반도체 시제품. [연합뉴스]

1980년대 미국 패권에 일본 저가 공략

반도체 치킨 게임의 서막이 오른 1980년대. 당시 시장의 패권은 미국이 잡고 있었다. 미국 인텔은 1970년대 세계 최초로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NEC와 도시바·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이 저가 정책으로 인텔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들 일본 기업들은 미국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반도체를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1980년대 4달러 정도였던 64K D램 가격이 30센트까지 떨어진다. 1달러 70센트 정도였던 생산원가와 비교해보면 판매 가격이 턱없이 낮았다. 결국 인텔은 D램 생산을 포기한다.
 
인텔이 D램 생산을 포기한 것은 D램 시장의 가격 경쟁 이외에도 사업 전략도 영향을 미쳤다. 인텔은 해당 사업의 마진율이 50% 이상은 돼야 사업을 유지한다. 만약 마진율이 그 밑으로 떨어지면 해당 사업부문을 매각하거나 철수를 고려한다. 인텔 내부적인 마진율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미래 지향적인 사업이나 먹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해당 사업을 중단하는 것이다.
 
인텔은 애플처럼 완제품을 팔지 않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직접 제조까지 나서 완제품을 팔면 오히려 마진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인텔의 생각이다. 즉 인텔은 전통적인 칩과, 칩에 딸린 솔루션으로 부가가치를 높이겠다는 기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를 접은 인텔은 시스템 반도체 회사로 거듭난다.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에서만 자그마치 2000억원의 적자를 냈다. 1차 반도체 치킨 게임은 일본의 NEC와 도시바의 승리로 끝난다. 치킨 게임의 승자 일본은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에서 80% 정도 점유율을 장악하며 10년 정도 반도체 시장의 우위를 누리게 된다.
 
대만 반도체 제조 기업 TSMC 제품과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1990년대 PC 보급에 올라탄 한국 질주

1990년대에는 개인형 컴퓨터(PC) 보급이 늘면서 D램 수요도 급격히 증가했다. 기업으로서는 PC용 D램을 저렴하게 생산하는 게 중요했다. 이 시기를 삼성전자는 놓치지 않았다. 저렴한 D램을 주로 생산하면서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강자가 된다. 2000년대 초가 되면 삼성전자가 일본 기업들을 완전히 따돌리며 한국이 반도체 시장의 승자로 올라서게 된다.
 
일본 기업은 이에 맞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기업 간 통합 절차를 밟았다. 1999년 12월 히타치 제작소와 NEC의 D램 사업부가 통합돼 ‘NEC 히타치 메모리’가 생겨난다. 다음 해 5월에는 엘피다메모리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고 2003년 미쓰비시전기의 DRAM 사업 부분까지 양도받아 일본 내 유일한 D램 업체가 되었다.
 
중국 장쑤성 화이안에 있는 Jiangsu Azure Corp의 반도체 칩 생산 현장. [로이터=연합뉴스]

2007년 일본 전열 가다듬었지만 파산

2007년 이 해에는 대만 D램 업체들이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며 세 번째 반도체 치킨 게임이 시작된다. 세계 각 업체는 가격 인하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반도체 가격을 낮추기 시작했다. 이에 512메가비트 DDR2 D램의 평균 가격은 6.8달러에서 2009년 0.5달러까지 내려간다. 비슷한 시기에 1기가바이트(GB) DDR2 D램 가격도 0.8달러로 떨어진다.
 
이 때 치킨 게임의 결과는 앞선 두 번의 치킨 게임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대표적인 예는 독일의 ‘키몬다’와 일본의 ‘엘피다’다. 키몬다는 인피니온테크놀로지스AG에서 분사한 메모리 기업으로, 2006년 출범 당시 세계 2위 D램 생산업체였다. 이곳은 300㎜ 제조 분야의 선두를 달렸고, 개인용 컴퓨터와 서버용 D램 공급사 가운데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치킨 게임의 결과로 2007년 3분기부터 2008년 4분기까지 누적적자 25억유로(약 3조3000억원)를 기록하며 2009년 파산의 길로 접어든다.
 
엘피다는 가격 인하 전쟁 속에서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고자 무리수를 뒀다. 치킨 게임의 와중에서 엘피다는 2007년에서 2008년 사이 영업이익 2014억엔의 적자로 파산할 뻔했다. 일본 정부가 300억엔, 일본 채권은행이 1000억엔을 투자하면서 겨우 살아날 수는 있었다. 회생한 이들은 2009년 의욕적으로 40나노와 2010년 30나노 개발을 발표했지만 두 번 다 출시하지 못하고, 주력 상품으로 50나노 D램을 생산하는 데 그쳤다.
 
2010년에는 대만과 일본 기업들이 다시 생산설비에 투자하고 증산이 이어지면서 D램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1기가비트 DDR3 D램 가격은 10월에는 1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이후 엘피다는 2011년 초 25나노미터급 D램을 개발해 7월부터 양산을 개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마저도 실현하지 못했다. 심지어 관련된 시설 투자에 관한 내용도 확인되지 않으면서 엘피다의 기술개발 계획이 거짓으로 밝혀져 시장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 D램 시장 점유율 3위였던 일본 엘피다는 2011년 4분기 1100억엔의 영업이익 적자를 기록한다. 엘피다는 2012년 2월 27일 법정관리 요청을 하고 끝내 파산한다. 이후 2012년 7월 25억달러에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인수되고 마이크론 메모리 재팬으로 변경된다.
 
한편 엘피다의 파산은 SK하이닉스에는 기회가 됐다. 공급 증가가 제한적이던 상황에서 경쟁 업체가 줄어든 한편, 스마트폰 시대가 열려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2015년 매출액 18조7980억원, 영업익 5조3361억원의 최대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치킨 게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펼쳐질지 모르는 치킨 게임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독자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 힌트가 될 만한 것을 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에서 찾고 싶다. 다음주에는 그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필자는 27년 경력의 반도체 열사(烈士)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인텔에서 수석매니저를 지냈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스카웃돼 최연소 상무로 재직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 이사, SKT 부사장(ESG그룹장) 등을 거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반도체 정책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 반도체 분야 90여 편의 국제 논문과 Prentice Hall과 고속반도체 설계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  
 
 

유웅환 전 SK텔레콤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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