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 30년’ 중국은 한반도에 어떤 의미인가 [채인택 글로벌 인사이트]
2000년 휴대전화 수입 규제 시작해
동북공정·사드 등 20여년간 한한령
中 30주년 메시지 “중국 편에 서라”
30년이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92년 8월 24일 한국의 이상옥 당시 외무장관과 중국의 첸치천(錢其琛) 당시 외교부장이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台) 국빈관 17호각에서 수교 문서에 서명하면서 공식 수교했다. 한국 측이 요구한 ‘평화적 남북통일’과 중국 측이 요구한 ‘하나의 중국’을 서로 인정했다. 한국은 대만과 단교했지만, 중국은 북한과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지속했다.
사실 한‧중 수교는 1988년 집권한 이래 활발한 북방외교를 펼치면서 공산권 수교에 주력했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 정부의 성과다. 북방정책은 공산권 몰락과 냉전 해체, 소련의 개혁‧개방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경제와 안보 효과를 동시에 노린 전략으로 평가된다.
그 결과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듬해인 1989년 헝가리‧폴란드를 시작으로 90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1992년 체코와 슬로바키아와 분리)와 소련(러시아로 승계)‧불가리아 등과 수교했다. 소련이 무너진 1991년 12월 26일 이후에는 분리 독립한 옛 소련의 공화국들과 활발하게 국교를 맺었다.
특기할 점은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991년 8월 8일 결의 제702호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별도의 국가 자격으로 유엔 가입 신청을 투표 없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일 것을 유엔 총회에 권고했다.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통과됐다.
1991년 소련 몰락과 동유럽 공산권 몰락, 그리고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에 뒤이은 1992년의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 외교의 대표적 성과로 꼽힌다. 한‧중 수교의 글로벌적 배경이다.
수교한 뒤 30년간 한‧중은 서로 많은 실리를 얻었지만, 동시에 수많은 갈등도 동시에 나타났다. 가장 큰 실리는 경제에서 나타났다. 양국 교역은 국교를 수립한 1992년 63억8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015억4000만 달러로 약 47배로 증가했다. 한국에 중국은 수출 대상 1위 국가로, 중국에 한국은 수입 대상 1위로 자리 잡았다. 중국은 한국에서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 핵심 소재와 부품을 도입해 이를 가공해 완제품으로 만들 뒤 미국으로 수출해 거대한 흑자를 쌓아가는 글로벌 삼각 무역의 구도를 통해 고속 성장을 이뤘다. 이를 통해 한국도 대중 무역 흑자를 누렸지만, 올해 5~7월 1992년 8~10월 이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석 달 연속 적자를 나타냈다.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5월에 10억9000만 달러, 6월에 12억1000만 달러, 7월에 5억7000만 달러의 적자를 봤다. 중국 특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양국 수교 뒤인 1990년대 말부터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에 한류 열풍이 불었다. ‘한류’라는 용어도 사실상 당시 중화권의 한국 대중문화 바람에서 기인했다.
평가가 엇갈리는 게 중국의 한반도 평화‧통일 기여에 대한 기대다. 1992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한‧중 수교를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한 마지막 장애가 제거됐다”고 자평했다. 6‧25전쟁 때 정면으로 맞붙었던 적국 중국의 지지를 얻어 평화 통일을 추진한다는 전략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실제 중국이 얼마나 북한에 영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1956년 벌어진 ‘8월 종파 사건’이라는 권력 투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이 일본 강점기에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연안파와 소련에서 귀국한 소련파 등을 숙청했으며, 1953년 시작된 북한 내 중국인민지원군 철수도 1958년 마무리된 이래 중국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줄타기 외교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1956년 4월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원회의에서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죄상을 고발하고 격하 운동을 펼쳤다. 그러자 북한의 소련파와 연안파는 조선로동당 제3차 당 대회에서 김일성에게 개인숭배에 대한 자기비판을 요구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밀려났다. 김일성은 개인 권력 공고화를 위해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이를 ‘반당 반혁명적 종파 음모책동’으로 불렀다. 북한은 그 뒤 중국과 친한 인사를 외교 수장에 임명하지 않고 있다.
북핵 위기, 중국에 한반도 개입 빌미 제공해
하지만 북한이 핵 개발을 본격화하면서 한‧중 양국은 3자회담과 6자 회담 등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위해 함께 뛰었다. 성과 없이 북한의 6차에 걸친 핵실험과 수많은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로 이어졌지만 말이다.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한 중국의 개입을 살펴보면 중국이 북한에 영향을 미쳐 비핵화나 한반도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중 수교와 북한의 핵 문제는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기회의 문을 연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겠다고 공식 통보하면서 ‘1차 북핵 위기’의 불을 댕겼다. 미국과 북한은 그해 6월 3일 1단계 고위급 회담을 시작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그해 6월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회담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김 주석과의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으나 김 주석이 1994년 7월 8일 숨지면서 무산됐다.
미국과 북한은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합의를 이뤘다. 북한의 흑연감속로 핵 개발 프로젝트를 무기용 핵물질 생산이 제한되는 경수로 원전 건설로 바꾸는 내용이다. 북한 원자력 개발시설의 봉인을 유도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 국제사업체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2005년 3월 9일 설립했다. 2003년까지 발전용량 2000MW의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2000년 2월 3일엔 북한의 함경남도 동해안 중부에 위치한 신포에서 경수로 건설 공사를 착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고, 남북 각료회의가 발족했다. 2002년 9월 17일에는 김정일 북한 최고지도자 겸 조선노동당 총비서와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북일 정상회담을 했다. 북일 정상회담에선 납치자 문제를 의논했으며, ‘조선반도의 핵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할 일은 국제적 합의를 준수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확인하는 북일 평양선언이 나왔다.
문제는 그해 10월 3~5일 미국의 제임스 케리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고농축 우라늄(HEU) 계획에 대한 우려를 밝히자 당시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차관이 10월 3일 해당 계획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2차 핵위기가 닥쳤다. 10월 16일 미 국무부는 HEU 계획을 확인했다는 성명을 밝혔고, KEDO 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중요 공급을 중단하기로 했다. .
하지만 북한이 2002년 10월 3일 핵탄두 개발을 시인하면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중국이 북핵 사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한 것이 이즈음이다. 미국‧북한‧중국은 2003년 4월 23~25일 베이징 댜오위타오 국빈관에서 3자 회담을 열고 타결을 모색했다. 당시 북한은 (핵물질 확보를 위해) 사용후핵연료봉 8000기를 재처리했다고 밝히며 핵 보유‧보유‧이전을 시사했고, 미국은 핵 개발의 항구적 폐기를 요구했다. 북한은 일괄 타결방식의 4단계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미국과는 단계별 방안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해 5월 23일 미‧일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고이즈미 총리는 대화를 위한 압박을 천명했다. 5월 27일에는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했다. 6월 9일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대화와 압력’이라는 원칙에 의견 일치를 봤다. 7월 14일엔 다이빙궈(戴秉国) 외교 차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총비서와 회담했다. 다이빙궈는 이어 7월 18일 미국을 찾아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과 회담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7월 31일 뉴욕에서 미국과 북한이 접촉해 미국‧북한‧중국의 3자에 한국‧일본‧러시아까지 참석하는 6자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중국의 암묵적 한류 제한 행태 수십년간 지속돼
6자회담이 열리는 중에도 북한은 핵 개발을 멈추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해 2005년 2월 10일 핵 보유를 선언한 데 이어 2006년 10월엔 핵실험까지 했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인공지진 규모 3.9) 핵실험을 했다. 하지만 6자회담 결과 2007년 2월 13일 북한의 핵시설 폐쇄와 불능화, 핵사찰 수용, 중유 100만t 상당의 경제적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2·13 합의가 이루면서 성과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2차(4.5), 2013년 2월 12일 3차(4.9), 2016년 1월 6일 4차(4.8), 9월 9일 5차(5.04), 2017년 9월 3일 6차(5.7)까지 모두 6차례의 핵실험을 계속하면서 북핵 합의는 물 건너갔다. 중국이 대북 영향력을 확신할 수 있는 뚜렷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대신 2000년의 마늘 파동에 따른 한국산 휴대전화와 폴리에틸렌 수입규제를 시작으로 2002년 고조선‧고구려‧발해를 부정하고 중국사에 편입하려고 시도한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2005년 중국산 김치에서 기생충 알이 발견되자 중국이 수입 검역을 강화해 보복한 것과 2020년 중국 관영 매체가 김치는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주장한 것 등의 김치 전쟁도 벌였다.
압권은 2016년 사드 사태다. 2016년 2월 박근혜 정부가 북행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용으로 사거리 200㎞의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자 중국은 자세한 설명 없이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한류를 제한하는 한한령을 암묵적으로 발동하고 단체관광객 송출을 막았다. 이는 문재인 정부 당시 3불에 이어 윤석열 정부에선 여기에 기존 배치된 경북 성주군 사드의 제한을 포함한 ‘3불 1한’까지 들고 나왔다. 이 때문에 반중 감정이 확산해 70%를 넘어서지만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유사시 중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미사일 비행로는 동북지방-시베리아-북극을 지나는 경로로 한반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게다가 사드는 사거리라 200㎞로 중국에는 미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중국은 이를 걸고 넘어진다. 여기에는 논리도 과학도 통하지 않는다. 중국은 그야말로 완강하다. 이는 한국에 덫이나 재갈을 단단히 물려 서방 진영의 일원이 되지 못하도록 잡아두려는 의도로밖에는 해석하기 힘들다. 중국이 그동안 키운 힘을 글로벌로 투사하는 경로에 한반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가 가장 설득력 있는 이류로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8월 24일 양국 수교 30주년을 맞아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공개한 축하 서한에서 "양국이 이런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건 상호 존중과 신뢰를 견지하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관심 사항을 배려하며 성실한 의사소통을 통해 이해와 신뢰를 증진해 왔기 때문"이라며 '핵심 이익'을 거론했다는 사실이다.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이날 화상 기념사에서 “양측은 평등을 지키고 서로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사항을 배려함으로써 안전한 발전과 역내 평화를 추진하자”고 강조했다.
중국 권력 서열 1·2위가 이날 나란히 강조한 '핵심 이익'은 중국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익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핵심 이익은 국가 주권과 안보, 영토 안정과 국가통일, 그리고 중국 정치제도·사회의 전반적인 안정과 경제·사회 지속 발전의 보장 등을 말한다. 하나라도 잃으면 책임론이 제기돼 권력이 위태로워지는 위험한 의제다. 게다가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 5세대 지도자들은 그동안 국제 관계에서 핵심 이익의 존중과 보호를 유난히 강조해 왔다. 대만 문제는 국가 주권과 안보, 영토 안정과 국가통일에 해당하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거론하는 것은 중국 정치제도·사회의 전반적인 안정에, 칩4를 비롯한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한 연대는 중국의 경제·사회 지속 발전의 보장과 연결된다. 30주년의 축하 메시지에서 한마디로 한국에 서방이 아닌 중국 영향권에 들어오라고 압박한 셈이다.
결국 한‧중 관계는 미‧중 관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지식재산권 다툼, 글로벌 공급망 등의 국제적인 구도 속에서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어렵고 답답한 상황이다. 수교 30주년을 맞는 한‧중 관계의 순기능적인 발전을 위해 지혜를 모을 때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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