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그룹과 달리 한계있다?”…편견 깬 4세대 ‘걸그룹’ 진화 [허태윤 브랜드 스토리]
1세대 SES·핑클 이어 2세대 소녀시대·원더걸스
3세대 블랙핑크 이은 현재의 4세대 걸그룹
문화와 기술을 접목한 K팝 혁명의 변곡점 나타내
새로운 트렌드를 가장 민감하게 비즈니스에 적용하는 산업이 바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다시 말해 팬덤의 트렌드를 빨리 인식하지 못하면 바로 도태되는 것이 팬덤 비즈니스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걸그룹의 역사는 1990년대 말 SES와 핑클로 상징되던 1세대를 이어 2007년 원더걸스와 더불어 소녀시대가 세계시장을 끊임없이 노크하던 2세대, 그리고 2014년 트와이스, 블랙핑크로 대변되는 글로벌 걸그룹 시대인 3세대를 거쳐 멤버 전원이 2000년대 이후 생들로 구성된 에스파, 르세라핌,그리고 가장 최근 데뷔했자만 각종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는 뉴진스 같은 4세대에 이르고 있다. 세대를 넘어오며 아이돌 그룹 브랜딩의 특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랐지만, 4세대 걸그룹의 진화는 주목할 만 하다.
컬쳐유니버스라는 메타버스 세계관을 통해 가상인간과의 아이돌 그룹을 형성한 ‘에스파’와 문단에서 촉망받는 유명 SF소설가와 협업을 통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스토리텔링을 통한 IP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르 세라핌’의 브랜딩, 22년 7월 데뷔했지만, BTS의 입대로 떨어진 하이브의 주가를 견인한 뉴진스의 체험 마케팅은 다른 산업의 브랜딩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 존재한다.
그룹 에스파는 등장부터 이전의 모든 아이돌 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혁신적인 모습이었다. 문화와 IT기술을 연결해 K-pop을 새로운 콘텐츠 IP산업의 중심으로 부각했다. SMCU(SM Culture Universe)라는 세계관을 통해 CAWMAN(Cartoon, Animation, Webtoon, Motion graphic, Avartar, Novel)을 미래 전략으로 제시했다.
음악과 비주얼 위주로 접근하던 종전 방식의 비즈니스를 벗어나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모션픽쳐, 아바타, 소설까지를 아우르는 콘텐츠 비즈니스의 거의 모든 영역을 비즈니스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에스파와 함께 광야(KWANGYA)라는 멀티버스를 공개했다.
‘광야’의 정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여과된 곳으로 에스파를 비롯한 인간들은 자신의 아바타인 아이(ae)들이 살고 있는데, 이 아이와 이어진 상태가 ‘싱크’다. 싱크를 방해하는 빌런 ‘블랙 맘바’가 등장하고, 에스파는 인공지능 시스템 ‘나비스’의 도움을 받아 블랙 맘바와 싸우기 위해 블랙 맘바가 떠돌고 있는 광야에 진입한다. SM은 에스파의 성공에 힘입어 소속된 기존 가수들도 광야 세계관에 편입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데뷔 15년 차를 맞은 소녀시대는 이 세계관 속 ‘소리의 여신’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세계관 마케팅은 에스파 이전에도 BTS나 그룹 엑소가 엑소 플래닛을 통해 시도했고 이후로 아이돌 그룹의 등장 때마다 새로운 세계관은 기본적인 장치였지만 에스파의 그것은 좀 차원이 다르다.
단순히 뮤직비디오, 콘텐츠 기획, 콘셉트 이미지 촬영으로만 활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에스파 음악의 가사에 세계관에 입각한 많은 개념을 전반적으로 반영시킨다. 기존의 가사에서 다루던 제재(題材)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지 않은 데다 그 곡에서만 한정되었지만, 에스파는 그들만의 세계관을 주제 및 대상으로 한 가사를 데뷔 이후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내놓고 있다.
에스파는 이렇듯 데뷔 이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된 세계관 스토리텔링과 가상 세계의 아바타를 통해 향후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끌어 갈 핵심 개념인 메타버스와 결부, 꾸준히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음악과 퍼포먼스 그리고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선보이며 ‘SM엔터테인먼트가 꿈꾸는 K-POP 혁명의 변곡점이 될 것인지를 가름하는 혁신적 시도를 하고 있다.
소설가 서사에 웹툰, 웹소설과도 연결하는 스토리
그런데 이 걸그룹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란 소설로 이 시대 가장 주목받는 신세대 SF소설 작가가 된 김초혜 작가와 협업을 통해 ‘크림슨 하트’라는 독창적인 세계관 서사를 만들었다. 크림슨 하트'는 익숙한 통제도시 '레퓨지아'를 벗어나 아무도 넘지 않았던 장벽을 넘어 푸른 반딧불이가 있는 낯선 마법의 땅 '언노운'으로 떠나는 소녀들의 모험담이다. ‘혼자 하면 방황 함께하면 모험‘이라는 부제를 달고, 정해진 길이 아닌 스스로 찾아낸 목표와 길을 따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우정과 동료애로 연대하는 소녀들의 성장 서사를 담았다.
걸그룹의 세계관 서사에 소설가가 참여하는 시도가 일어난 것이다. 이어 크림슨 하트는 22년 11월 네이버 시리즈에 웹툰과 웹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르세라핌 멤버들은 공개된 소개 영상에 직접 출연해 '크림슨 하트'의 매력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설명했다.
영상 속 르세라핌 멤버들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비롯해 소녀들이 모험을 떠나는 이유, 관전 포인트 등을 전하는 한편, 각 멤버들과 매칭되는 캐릭터의 특징과 역할, 이들이 살아온 세계 등을 상세히 소개하며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아티스트 IP를 활용한 웹툰은 확실한 시너지를 만든다. 웹툰 자체가 팬들에게는 음원, 무대, 굿즈 등과 함께 또 다른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의 정체성이 담긴 웹툰을 소비함으로써 ‘팬심’이 더 굳건해지는 효과도 있다. 오리지널 스토리는 아티스트가 선보이는 음악에 담긴 메시지를 서사로 풀어냄으로써 팬들에게 더욱 깊은 몰입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르세라핌’의 이런 새로운 시도는 ’하이브‘가 음악을 기반으로 게임, 스토리 산업 전반으로 확장하려는 노력에 얼마나 진지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의 OSMU(Ones Source Multi-Use)와도 확연히 다르다. 이미 성공한 결과물을 기반으로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단계부터 콘텐츠간의 연결과 촘촘한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걸그룹 ‘뉴진스’를 성공적으로 데뷔시킨 체험을 통한 브랜딩 방식은 이제 아이돌 그룹도 오감을 통한 체험 마케팅을 통해 영상과 음악뿐 아니라 다양한 오프라인 접점을 통해 콘텐츠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뉴진스는 자신들의 브랜드 이념을 “시대를 불문해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아 온 아이템인 ‘청바지(Jeans)’처럼, 매일 찾게 되고 언제 입어도 질리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되겠다”라고 선언한 것처럼 단순히 아이돌 시대의 영원한 시장인 10대 시장만을 타깃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토록 했다. X세대부터 Z세대까지를 아우르는 콘셉트로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체험을 기반으로 한 프로모션 방식으로 출발부터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팬 전용 애플리케이션 출시해 ‘소통’하는 아이돌
이 플랫폼에는 음악 이외에 멤버들이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사진과 짧은 클립, 멤버들이 주고받는 채팅, 공식 일정을 볼 수 있는 캘린더가 한데 모여 있다. 무엇보다 캘린더 활용법이 독특하다. 팀의 공식 일정 알림 기능(‘Hurt’ MV 공개, KBS 제49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 등)과 개개인의 SNS 타임라인(하늘 보기, 쿠키 만들기, 연습 열심히 하기 등)이 혼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을 통한 걸그룹 뉴진스를 체험할수 있는 장치다. 오프라인에서의 체험을 위해 데뷔와 동시에 팝업 스토어를 연 것도 화제가 되었다. 지난해 8월 중순 여의도 더현대에 마련된 뉴진스의 팝업스토어는 갓 데뷔한 걸그룹의 팝업 스토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6시간을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일부 팬들의 경험을 증명이라도 하듯 1만7000여명이 방문했다.
레트로 감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팝업스토어의 모든 기념품과 장치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로 돌아가 있다. 각종 스티커로 장식된 CD플레이어, 공중전화 부스의 수화기를 통해 듣는 음악, 실제로 인화지에 인화한 3X5사진과 잡지풍의 화보까지 마련됐다.
뉴진스는 최근 미국 빌보드 차트에 17주 연속 진입했고, 데뷔곡 '어텐션(Attention)'은 지난해 11월 11일부터 28일까지 무려 18일 동안 멜론 일간차트 1위를 차지했다. 또 지난해 12월 초 기준으로 스포티파이 팔로워는 총 102만8968명으로, 이는 올해 데뷔한 그룹의 스포티파이 팔로워로는 가장 많은 숫자다.
대중음악전문가들은 올해 K팝 시장에서의 가장 큰 뉴스는 걸그룹의 부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그룹과는 달리 걸그룹은 지속가능한 수익모델을 만들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실제 걸그룹은 팬덤을 형성하기가 어렵고, 규모를 기반으로 하는 콘서트나 투어, 굿즈 판매 등의 밸류 체인을 구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업계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블랙핑크, 트와이스의 등장 이후 이러한 통념이 서서히 깨지더니, 4세대의 출현과 더불어 K팝 시장은 오히려 넥스트 BTS는 걸그룹이 될 것이라는 예측까지 나온다.
이런 변화는 디지털 환경 아래서 콘텐츠의 힘은 콘텐츠 자체의 경쟁력에 더해 미디어간, 사용자간의 연결에서 나오는 거대한 네트워킹 효과에서 나온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어 보인다. 에스파의 문화와 테크를 결합한 촘촘한 세계관 전략을 통한 팬덤의 조직화, 당대 최고의 소설가가 직접 참여해 만드는 완성도 높은 서사를 바탕으로 한 웹툰, 웹소설과의 연결을 시도한 ‘르세라핌’, 앱과 팝업스토어 등을 통한 온·오프라인에서 오감을 이용한 소비자 경험을 팬덤에 연결한 뉴진스의 사례에는 연결을 위한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의 시도가 숨어 있다.
K팝의 글로벌화를 계기로 음악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비즈니스의 규모는 과거와 달리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고 과거의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걸그룹의 부활은 이제 비즈니스모델의 확장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산업에서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낳은 결과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다른 산업에 있어 탄광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다.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마케터가 K팝 시장의 트랜드 변화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한신대 IT 영상콘텐츠학과 교수다. 광고회사와 공기업, 플랫폼과 스타트업에서 광고와 마케팅을 경험했다. 인도와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글로벌브랜딩에 관심을 가졌고 공기업 경험으로 공기업 브랜딩, AR과 플랫폼 기업에 관여하면서 플랫폼 브랜딩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2023년 서울에서 열리는 ADASIA 사무총장으로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
허태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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