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파고도 넘었다…한국전쟁 폐허 위에서 꽃 피운 기업들
[‘중꺾마’로 위기 극복…장신(長新) 기업을 찾아서]①
업력 60년 이상 기업 중 연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 넘는 상장사 46곳
100세 일본 장수기업 3만곳, 독일은 1만곳 넘어
이코노미스트 데이터랩(Data Lab)은 지난 2월 '111클럽' 기획을 발표한 바 있다. 데이터랩의 두 번째 기획은 국내 매출 상위 2000대 상장사 중 올해 기준으로 60년 전통을 가진 기업 177곳 중 (2021년 기준) 연 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 이상을 기록한 상위 10%의 기업을 선정하는 것이다. 총 46곳의 기업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변화와 도전을 멈추지 않은 한국경제의 주역들이다. 이코노미스트 데이터랩은 이 기업을 '장수(長壽) 기업' 대신 '장신(長新)' 기업이라 이름 붙였다. [편집자]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미국과 일본은 대표적인 제조업 강국으로 꼽힌다. 두 나라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명암이 갈렸지만, 전후 급성장을 거듭하며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기술 개발‧혁신을 통한 기업의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여기에 대를 이어 기업이 승계되고 책임 경영을 강화한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실제 100년 넘게 장수(長壽)하는 기업은 일본이 3만개, 미국의 경우 1만개가 넘는다. 경제의 허리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이 다수를 이루지만, 대기업 중에도 100년을 넘어 명맥을 잇는 기업이 많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중소기업 연구원의 자료를 인용해 일본의 100년 이상 장수기업은 3만3076곳, 미국은 1만9497곳, 스웨덴은 1만3997곳, 독일은 4947곳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반면 한국의 100년 장수 기업은 10곳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두산, 경방 등 상장사만 놓고 보면 6곳에 불과하다. 일제 강점기라는 역사의 특수성과 1950~1953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성장의 터전이 붕괴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장수 기업이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다는 평가다.
다만 1960년 산업화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기업 활동이 본격화했는데, 이 시기를 기준으로 60년 장수기업을 조사해도 600곳이 넘지 않는다는 점은 한계로 꼽힌다. 이들 기업이 모두 살아남아 40년 뒤 100년 기업으로 이름을 올린다고 가정해도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가운데서도 6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며 호실적을 내는 60년 장수 기업을 살펴봤다. 상장사를 중심으로 연 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 기업 가운데 일부는 60년 넘게 본업을 유지했지만, 대부분은 업종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회사에 흡수 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모습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변화와 도전을 멈추지 않고 오랜 기간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에 '이코노미스트'는 장수(長壽) 대신 ‘장신(長新)’ 기업이라 이름 붙였다.
국내 산업 발전에 빠질 수 없는 이름 현대
국내 2540개 상장사 가운데 2023년 기준 업력(業歷)이 60년을 넘는 곳은 177곳이다. 이 가운데 실적 상위 10% 수준으로 평가되는 연매출 50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 이상인 기업은 46곳으로 집계됐다.
가장 먼저 국내에서 문을 연 보험사는 한화손해보험·한화생명보험·롯데손해보험(1946년)이다. 한화손해보험의 전신은 신동아화재보험, 한화생명보험은 대한생명보험이 뿌리다. 대한생명은 신동아그룹 창업주인 최성모 회장에게 팔린 뒤 2002년 한화그룹에 편입될 때까지 신동아그룹의 핵심 회사 역할을 했다. 현재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의 63빌딩은 1985년 대한생명이 세운 건물이다. 대한생명63빌딩으로 불렸던 이 건물은 당시 동양 최고층 건물로 이름을 알렸다. 이 밖에 ▲흥국화재보험(1948년) ▲삼성화재(1952년) ▲현대해상화재보험(1955년) ▲삼성생명보험(1957년) ▲코리안리재보험(1963년) 순으로 보험사들이 등장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한화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한화가 주인공이다. ㈜한화는 1952년 한국화약㈜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하면서 1993년 3월 ‘한화’로 간판을 고쳐 달았다. 건설사‧상사‧정보통신회사 등을 인수·합병하고 한때는 언론사(경향신문)와 자동차 부품회사도 계열사로 두고 있었지만, 현재는 한화 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한화생명을 중심으로 한 보험‧투자 사업,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주축이 된 우주‧항공‧방산 사업, 한화솔루션이 핵심인 태양광 등 신사업을 먹거리로 하고 있다. 한화 이외에 KCC(1958년), 태광산업(1961년)이 석유화학 분야 장신기업으로 분류된다.
국내 산업 발전에 빠질 수 없는 이름은 ‘현대’다. 현대건설은 건설 분야 국내 대표 장신기업으로 꼽힌다. 토목‧건설사업을 시작으로 성장한 현대건설은 인프라환경, 건축, 플랜트, 전력 등 다양한 분야를 담당하는 글로벌 종합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성장했다. 현대건설은 사실상 범 현대그룹을 키운 모회사다. 현재는 현대자동차그룹의 품에서 현대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로 문을 연 현대건설은 이후 건설업이 활성화하자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이 1950년 1월 10일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군 막사를 짓고 휴전 후에는 전후 복구공사를 담당하는 등 위기와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며 국내 대표 건설사로 발돋움했다.
이른바 ‘중동 붐’이 일었던 1970년대에는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예멘 등 중동 지역에서 다수의 공사를 수행하면서 오일머니를 벌어들였다. 남극 세종과학기지를 건설한 것도 현대건설이다. 2000년대에 들어 경영권 분쟁을 겪으며 공동 관리체제로 전환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결국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품에 안기며 ‘현대’ 가문의 일원으로 남았다. 2021년 기준 매출액은 10조2463억원, 영업이익은 3051억원을 기록했다. DL건설(1956년), 코오롱건설(1960년), 쌍용씨앤이(1962년)도 6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국내 주요 건설사로 자리매김했다.
자동차 분야에서도 현대차그룹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핵심 계열사 중 한 곳인 ‘기아’는 장신기업 중 최대 실적을 자랑하는 회사 중 한 곳이다. 현대차, 현대모비스와 함께 지금의 현대차그룹을 떠받치고 있다. 1944년 설립된 기아는 자전거 부품 제조공장인 ‘경성정공’이 모태다. 1952년 ‘기아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최초의 국산 자전거 ‘삼천리호’를 판매했다. 이후 이륜 오토바이를 거쳐 삼륜 화물차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제조회사로 성장했다. 1990년 기아자동차㈜, 2021년에는 기아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7년에는 경영실적 악화로 부도를 겪은 끝에 이듬해 현대그룹에 인수됐다. 2021년 별도기준 매출액은 40조9795억원, 영업이익은 2조8192억원을 기록했다.
전기·전자 및 철강 업체는 각각 3곳이 꼽혔다.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 중 한 곳인 SK하이닉스는 SK그룹을 자산 기준 국내 2위로 끌어올리고 글로벌 기업의 이미지를 만든 중요한 회사다. 1949년 10월 설립한 국도건설 주식회사를 뿌리로 삼고 있다. 현대그룹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면서 1983년 국도건설의 상호를 현대전자산업으로 바꿨다. 1985년 256Kb D램을 개발‧생산하면서 반도체 기업으로 전환했는데, 외환위기 이후 현대그룹이 흔들리면서 하이닉스반도체가 분리돼 나왔다.
이후 (주)하이닉스반도체를 거쳐 2012년 SK그룹에 편입됐고 지금의 SK하이닉스가 됐다. 최근 반도체 업황 불황으로 실적 부진을 겪고 있지만, 2021년에는 매출액 41조 5573억원, 영업이익 12조1833억원을 내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떠올랐다. SK그룹의 경우 정유‧통신 등 주로 국내 사업으로 사세를 확장하면서 일각에서 내수용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SK하이닉스 인수와 반도체 사업 성공 이후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밖에 세방전지(1952년)와 DB하이텍(1953년)도 6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전기·전자 업체로 분류된다. 철강 분야 장신기업으로는 현대제철(1953년), 동국제강(1954년), 대한제강(1954년)이 있다.
CJ제일제당, 이름은 남겼지만 정통성은 CJ가 계승
식음료 분야에서는 하이트진로(1954년), 대상(1956년), 삼양식품(1961년)이 장신기업으로 분류됐다. 하이트진로의 경우 공식적인 법인 설립 연도는 1954년이지만, 1924년 진천양조상회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하이트진로㈜는 2005년 하이트맥주 컨소시엄이 ㈜진로를 인수한 뒤 2011년 바꾼 이름이다.
국내 대표 주류 중 하나인 진로(眞露) 브랜드를 아는 이들 가운데서는 ㈜진로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진천양조상회로 시작한 이 회사는 동화양조, 서광주조㈜, 진로주조㈜, ㈜진로를 거쳐 하이트진로㈜가 됐다. 하이트진로의 뿌리는 ‘조선맥주주식회사’로 크라운맥주와 하이트를 통해 국내 맥주시장을 석권했다. 종합주류판매기업으로 발돋움한 하이트진로㈜는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맥주‧소주‧생수‧기타사업 가운데 주력은 맥주와 소주사업이다. 최근에는 테라와 진로를 필두로 국내 주류시장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식음료 부분에서 주목할 부분은 삼성그룹 최초의 제조업체로 손꼽히는 ‘CJ제일제당’이 장신기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CJ제일제당은 1953년 문을 열었다. 식음료사업 분야 1위의 위상, 국내 상장사를 통틀어 10% 이내 실적(2021년 매출액 2조1038억원‧영업이익 783억원)을 냈음에도 역사적 전통을 인정받지 못했다. CJ제일제당은 2007년 9월, CJ주식회사에서 기업 분할하면서 공식적인 정통성을 CJ가 물려받았다. CJ제일제당은 현재 식품사업과 바이오사업, 사료‧축산사업, 물류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증권사 가운데서는 교보증권이 1949년에 법인을 설립해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대한증권’으로 문을 연 교보증권은 이후 1994년 보험사인 교보생명에 인수되면서 간판을 교보증권으로 고쳐 달았다. 대한증권 이후 우리나라에는 ▲유진증권·부국증권(1954년) ▲현대차증권(1955년) ▲신영증권·한양증권(1956년) ▲유안타증권·한화투자증권·대신증권(1962년)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이 밖에 유통상사 분야에서 신세계(1955년)와 삼성물산(1963년), 물류 분야에서는 CJ대한통운(1930년)과 대한항공(1962년), 제약 분야에서는 유한양행(1926년)과 보령(1963년)이 장신 기업으로 뽑혔다. 두산에너빌리티(1962년‧기계업), 아세아제지(1958년‧제지업), 기업은행(1961년‧은행업)도 6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 조사됐다. 그룹 지주사인 두산(1933년), 한국앤컴퍼니(1941년), LG(1947년)도 장신 기업 명단에 포함됐다. ‘까스활명수’로 잘 알려진 동화약품(1897년), 스쿠터 등 이륜차를 생산하는 KR모터스(1917년), 면방직 사업으로 시작해 현재는 타임스퀘어를 운영하는 경방(1919년)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혁신‧전통 계승한 기업 육성에 정부 나서야”
시대를 이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 됐던 이런 기업을 키우기 위해 정부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중기부)는 2017년부터 40여 곳의 ‘명문장수기업’을 선정한다. 건설업·부동산업·금융업·보험업을 제외한 업력 45년 이상의 중소·중견기업이 대상이다. 법인세 체납‧법규 위반‧사회적 물의 사실 등이 없는 기업 가운데 업력과 경제적·사회적 기여도, 기업역량 및 기술혁신 등을 평가해 뽑는다.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되면 확인서 발급과 현판이 제공되고 자금·수출 등 중기부 지원사업 신청 시 가점 부여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전통을 계승하는 혁신 기업을 늘리기 위해선 노동 개혁‧법인세 부담 완화 등 핵심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계는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7.5%(지방세 포함) 수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10번째로 높다고 토로한다. 또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로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국내 주요 경제단체 6곳은 지난해 11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공동성명’을 통해 “높은 법인세율과 상속세율 부담은 기업 투자 의욕을 꺾고 명문 장수기업의 탄생을 가로막아 결국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간다”며 “정부와 국회, 기업과 근로자 등 모든 경제주체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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