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돌’로 유럽 홀렸다…틀을 깨는 ‘세계적 거장’의 조각 [이코노 인터뷰]
피에트라산타시 최고 조각상 수여한 박은선 작가
5년 만에 국내서 개인전…‘디퓨지오네’(Diffusione) 열어
대리석 이어 붙이고 고유의 색 표현…조형미 창조
[이코노미스트 김채영 기자] “조각은 도를 닦는 것과 같아요. 매일 돌과 싸워야 하죠. 그래도 꾸며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아요. 그래서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머나먼 이탈리아 땅에서 우뚝 선 한국 조각가가 ‘빛나는 돌’을 들고 와 고국을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 2018년 ‘조각의 성지’라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최고 조각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고, 올해 3월엔 한국인·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베르실리아의 명사’ 상을 받았다. 상식을 뒤집는 조각으로 이탈리아와 세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박은선 작가의 이야기다.
돌과의 싸움 끝에 이어진 새로운 탄생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동해 온 박은선 작가가 5년 만에 고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명은 이탈리아어로 ‘확산’을 뜻하는‘디퓨지오네’(Diffusione)로 박 작가의 신작 이름과 같다. ‘확산’은 구(球) 모양의 매끈한 대리석이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루고 빨강, 노랑, 초록 등 색색의 빛을 낸다. 전시 관계자에 따르면 대리석 구슬 하나에 400만~500만원, 구슬 여러 개로 이뤄진 기둥 하나는 4억원에 이른다.
“코로나 때 집에서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았어요. 코로나 전 모두가 함께였던 연대의 기억을 공유하고, 팬데믹 시대를 넘어 희망과 긍정성의 확산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확산’을 만들었습니다.”
박 작가가 만든 대리석 구슬 하나하나는 ‘사람’을 의미한다. 팬데믹 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대낀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일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작품 속에 담았다. 대리석 구슬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조각을 이어붙인 듯 경계선이 보인다. 박 작가는 돌이란 재료에 씌워진 수백 년 된 틀을 깨부수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리석이라는 좋은 재료로 나만의 표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형태를 바꿔봐도 100년 넘게 수많은 작가가 시도해왔던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돌을 다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붙였죠.”
기존의 조각가들은 원하는 형태로 돌을 깎아 작품을 만들지만, 박 작가는 돌을 깨 이어붙이는 역발상적 접근을 했다. “제가 처음에 이 방식을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다 저보고 미쳤다고 했었죠. 돌이 워낙 비싸다 보니 조각가들이 재료를 살 때 조금이라도 금이 가지 않았는지 확인을 해보는데 전 그 돌을 다 깨버렸으니 이해가 갑니다.”
박 작가의 ‘확산’은 작품 자체가 전체 대리석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무게가 상당해 보이지만 기둥 하나가 100㎏가 채 되지 않는다. 야외 전시를 주로 하는 박 작가는 이동과 설치가 쉽게 작품을 늘 ‘조립식’으로 만든다. 이번 신작도 설치가 한 시간 안에 완료됐다. LED 조명을 대리석 안에 달기 위해 구슬 속을 다 파내버린 것도 작품 무게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
“조각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색’이에요. 돌이라는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다 보니 색을 이용하는 게 상대적으로 취약하죠. 하지만 전 조각에서도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색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며 회화를 배웠던 경험이 아이디어의 발판이 됐죠. 대리석 고유의 색을 표현해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부를 모두 파내 8㎜ 두께로 만들어 LED 등을 달았어요.”
“뉴욕 맨해튼에 설치 꿈…고대와 현대 잇고파”
박 작가의 ‘틀을 깨는 조각’에 대한 꿈은 그가 30년 전 돌이 좋아 이탈리아로 떠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다. 경희대 조소과와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박 작가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제작했던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정착해 묵묵히 작업을 이어왔다. 이곳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지만 조각가 유동인구만 500명에 달해 ‘조각 성지’로 불린다.
박 작가는 동양적인 곡선과 조형미가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구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박 작가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에 조각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선조들 때부터 석상이 많았고, 절과 불상도 익숙하죠. 저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이 당연하고, 국내 조각시장의 전망도 밝다고 봅니다.”
30년의 세월을 돌과 싸우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박 작가의 다음 목표는 10년 뒤에 있다. “저는 당장 내일의 목표를 세우지 않습니다. 조각이란 것이 단기적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항상 10년 후를 그리게 돼요.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작업장을 찾아 저녁까지 작업을 하는 작가였으면 좋겠어요.”
현재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스위스·룩셈부르크·미국 등 여러 국가의 공공장소에 20여 점의 박 작가 작품이 설치돼 있다. “지금까지 로마나 이탈리아 유적지 등 역사가 깊은 곳에 주로 제 작품이 설치됐었는데 앞으로는 뉴욕 맨해튼처럼 현대적인 공간에서 고대와 현대를 잇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꿈이 있어요. 빌딩 숲속에 제 작품이 놓아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박 작가는 오는 10월 밀라노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국내 활동도 기회가 된다면 활발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오는 2025년엔 전남 신안도 자은도에 박 작가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작업을 맡은 ‘인피니또 뮤지엄’이 완공될 예정이다. 한국을 넘어 이탈리아, 다시 세계를 무대로 틀을 깨며 나아갈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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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이탈리아 땅에서 우뚝 선 한국 조각가가 ‘빛나는 돌’을 들고 와 고국을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 2018년 ‘조각의 성지’라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최고 조각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고, 올해 3월엔 한국인·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베르실리아의 명사’ 상을 받았다. 상식을 뒤집는 조각으로 이탈리아와 세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박은선 작가의 이야기다.
돌과의 싸움 끝에 이어진 새로운 탄생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동해 온 박은선 작가가 5년 만에 고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명은 이탈리아어로 ‘확산’을 뜻하는‘디퓨지오네’(Diffusione)로 박 작가의 신작 이름과 같다. ‘확산’은 구(球) 모양의 매끈한 대리석이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루고 빨강, 노랑, 초록 등 색색의 빛을 낸다. 전시 관계자에 따르면 대리석 구슬 하나에 400만~500만원, 구슬 여러 개로 이뤄진 기둥 하나는 4억원에 이른다.
“코로나 때 집에서 거의 갇혀 살다시피 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았어요. 코로나 전 모두가 함께였던 연대의 기억을 공유하고, 팬데믹 시대를 넘어 희망과 긍정성의 확산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확산’을 만들었습니다.”
박 작가가 만든 대리석 구슬 하나하나는 ‘사람’을 의미한다. 팬데믹 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대낀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일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작품 속에 담았다. 대리석 구슬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조각을 이어붙인 듯 경계선이 보인다. 박 작가는 돌이란 재료에 씌워진 수백 년 된 틀을 깨부수고 싶었다고 말한다.
“대리석이라는 좋은 재료로 나만의 표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형태를 바꿔봐도 100년 넘게 수많은 작가가 시도해왔던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돌을 다 깨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어붙였죠.”
기존의 조각가들은 원하는 형태로 돌을 깎아 작품을 만들지만, 박 작가는 돌을 깨 이어붙이는 역발상적 접근을 했다. “제가 처음에 이 방식을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다 저보고 미쳤다고 했었죠. 돌이 워낙 비싸다 보니 조각가들이 재료를 살 때 조금이라도 금이 가지 않았는지 확인을 해보는데 전 그 돌을 다 깨버렸으니 이해가 갑니다.”
박 작가의 ‘확산’은 작품 자체가 전체 대리석으로 이뤄져 있다 보니 무게가 상당해 보이지만 기둥 하나가 100㎏가 채 되지 않는다. 야외 전시를 주로 하는 박 작가는 이동과 설치가 쉽게 작품을 늘 ‘조립식’으로 만든다. 이번 신작도 설치가 한 시간 안에 완료됐다. LED 조명을 대리석 안에 달기 위해 구슬 속을 다 파내버린 것도 작품 무게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
“조각가들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색’이에요. 돌이라는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다 보니 색을 이용하는 게 상대적으로 취약하죠. 하지만 전 조각에서도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색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화가를 꿈꾸며 회화를 배웠던 경험이 아이디어의 발판이 됐죠. 대리석 고유의 색을 표현해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내부를 모두 파내 8㎜ 두께로 만들어 LED 등을 달았어요.”
“뉴욕 맨해튼에 설치 꿈…고대와 현대 잇고파”
박 작가의 ‘틀을 깨는 조각’에 대한 꿈은 그가 30년 전 돌이 좋아 이탈리아로 떠나왔을 때부터 시작됐다. 경희대 조소과와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박 작가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제작했던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정착해 묵묵히 작업을 이어왔다. 이곳은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지만 조각가 유동인구만 500명에 달해 ‘조각 성지’로 불린다.
박 작가는 동양적인 곡선과 조형미가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구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박 작가는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DNA에 조각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선조들 때부터 석상이 많았고, 절과 불상도 익숙하죠. 저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적인 것이 당연하고, 국내 조각시장의 전망도 밝다고 봅니다.”
30년의 세월을 돌과 싸우며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박 작가의 다음 목표는 10년 뒤에 있다. “저는 당장 내일의 목표를 세우지 않습니다. 조각이란 것이 단기적으로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보니 항상 10년 후를 그리게 돼요.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작업장을 찾아 저녁까지 작업을 하는 작가였으면 좋겠어요.”
현재 이탈리아는 물론 프랑스·스위스·룩셈부르크·미국 등 여러 국가의 공공장소에 20여 점의 박 작가 작품이 설치돼 있다. “지금까지 로마나 이탈리아 유적지 등 역사가 깊은 곳에 주로 제 작품이 설치됐었는데 앞으로는 뉴욕 맨해튼처럼 현대적인 공간에서 고대와 현대를 잇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꿈이 있어요. 빌딩 숲속에 제 작품이 놓아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박 작가는 오는 10월 밀라노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국내 활동도 기회가 된다면 활발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오는 2025년엔 전남 신안도 자은도에 박 작가와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작업을 맡은 ‘인피니또 뮤지엄’이 완공될 예정이다. 한국을 넘어 이탈리아, 다시 세계를 무대로 틀을 깨며 나아갈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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