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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적자 위기 사회...기초부터 새롭게 다져야 [임무송의 시사논평]

신뢰, 사회적 자본·경제적 번영 필요조건
“사회적 불신 커질수록 양극화도 심화

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는 혈연, 지연, 학연 등 개인적 연고를 초월해 사회적 범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공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임무송 인하대 초빙교수·일자리연대 운영위원장] ‘신뢰’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자본이자 경제적 번영의 필요 조건이다. 일찍이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95년 그의 대표작 ‘트러스트’에서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그 사회의 신뢰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는 혈연· 지연·학연 등 개인적 연고를 초월해 사회적 범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공적인 신뢰’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을 때 활발한 경제행위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경제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저신뢰 국가로 분류한 ‘한국의 경제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점에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요즘 우리 사회 모습을 보면 그의 주장을 마냥 내치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유엔(UN)에 의해 선진국으로 인정된 것이 무색하게 곳곳에서 신뢰의 붕괴가 잇따른다.

최근에 벌어진 몇 가지 사태만 손꼽아봐도 아찔하다. 아파트 공사에서 철근을 빼먹고 축제에서는 한탕주의 바가지 씌우기가 반복되고 은행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수백억짜리 사고가 터진다. 이른바 ‘묻지마 폭력’이 전염병처럼 번지며 외국인 혐오증(제노포비아·Xenophobia)과 광장공포증이 현실화하고 있다. 이태원에 이은 오송 참사와 새만금 잼버리 파행, 그리고 예외 없이 이어지는 네 탓 공방은 온 국민에게 절망감을 안긴다. 중대재해처벌법에도 불구하고 일터에서는 죽음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특검의 몰락과 판사의 일탈로 다시 한번 확인된 사법부의 도덕성위기, 시민의 삶에 직결된 부동산, 일자리 등 국가통계 왜곡 혐의를 받는 정부의 일탈도 그 심각성에서 뒤지지 않는다. 

8월 8일 오전 무량판 구조가 적용된 송파구 위례23단지 지하주차장의 철근 탐사기 확인 작업 모습. [사진 연합뉴스]

한국, ‘공적인 신뢰’ 붕괴…“국가 시스템 혁신해야”


미국의 홍보 컨설팅 기업 에델만이 매년 주요 국가의 여론주도층과 일반 대중에게 사회 주체들에 대한 신뢰도를 물어보는 ‘에델만 신뢰도 지표 조사’에서도 우리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2023년 한국 기업의 신뢰도는 38, 정부의 신뢰도는 34로 모두 하위권이다. 인도네시아는 각각 83, 76으로 우리보다 훨씬 높고, 싱가포르는 기업(62)보다 정부(76)의 신뢰도가 높다. 우리나라 사회지도층 가운데 신뢰도가 가장 낮은 그룹은 2022년에는 언론인, 2023년에는 정부 지도자라니 뉴스도 정부 발표도 믿음을 잃었다.

사회적 불신이 커질수록 양극화도 심한데 한국은 영국·독일·일본 등과 함께 위험국가군에 속한다. 윤리성과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좋은 정책을 선한 의도로 추진해도 국민이 불신하고, 국민이 믿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말하는 전형적인 ‘신뢰적자의 위기’ 모습이다. 최근에 “우리도 답 없다”는 현직 경찰관의 글이 언론에 보도되며 주목 받았다. 소신 행정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호소에는 전적으로공감하지만, 자칫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 같아 염려된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인한 공멸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국가이고, 현대국가는 법치·민주·공화의 사회계약 위에 서 있다. 계약이 지켜진다는 믿음이 없으면 국가도, 경제도 존립할 수 없다.

우리 모두 K시리즈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사회적 신뢰의 기초부터 새롭게 다져야 한다. 부패의 카르텔을 혁파하기 위한 외부통제와 엄벌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현상보다 원인을 치유하고 내부통제 기제가 작동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조치가 절실하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첫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의 시스템을 일대 혁신해야 한다. 흉악범죄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 그리고 집시법 개정을 통해 집회와 시위 대처에 쏠린 치안 자원을 민생치안으로 돌릴 수 있도록 여야 정치권의 협력과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 

둘째, 직업윤리·공직윤리·기업윤리 등 윤리적인 ‘올곧음’을 확립해야 한다. “윤리적 정부는 공무원의 부적절한 행동을 억제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발견하며, 도덕적 분위기를 증진시키는 유리온실과 같은 개방된 정부이다”라는 발언처럼 올곧음이 요구되는 것은 언론·기업·노조도 마찬지다. 개혁 대상 1호는 정치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공직자를 악의적 반복 민원으로부터 보호하고 법을 엄정하게 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장치도 필요하다. 최근 고용노동부에서 출범한 ‘특별민원 직원보호반’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기대된다. 

셋째, 도덕적 의무의 실천을 사회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주요 주체들로부터 수많은 결의와 선언이 있었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언행일치이다. 공약(公約)이 헛약속(空約)이 되면 아니 되듯이,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말의 성찬은 불신과 냉소만 키울 뿐이다.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습관화되면 서로 물어뜯다가 공멸에 이르게 된다.

넷째, 규제혁신과 민주적 책임정치이다. 현대적 의미의 직업윤리는 부패하지 않고 맡은 일을 하는 것을 넘어서, 창의성·적극성·유능함을 요구한다. 실상을 감추는 허위의식과 ‘우리끼리’ 문화, 시대변화와 동떨어진 규제는 무능과 부패의 온상이다. 노동, 안전 등 사회적 규제도 혁신의 예외가 될 수 없다. 권한과 책임은 함께 가야 한다. 가톨릭 미사 전례 중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하고 크게 뉘우치는시간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큰일이 터져도 책임은커녕 반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편을 갈라 남 탓만 해대니, 거대한 빙하가 깨지듯이 공동체가 밑바닥부터 갈라지고 부서진다. 신뢰공영(信賴共榮), 불신공멸(不信共滅)이다. 임금과 고관대작들은 도망가고 백성은 외적을 피해 각자도생해야만 했던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신뢰자본 축적을 위해 시민은 각성하고, 정부를 비롯한 국가의 중추 조직은혁신하고 사회지도층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사람 ‘인’(人) 자가 의미하듯이 우리는 서로를 믿고 기대어 사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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