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매각 위기 몰린 11번가, SK ‘신의’ 논란 번질까
콜옵션 행사 이르면 내주 결정…불발시 드래그얼롱 발동
11번가 기업가치 떨어진 만큼 투자 손실 커질 수도
FI 예의 주시…SK 향후 행보에 따라 자본시장 파장 예고
[이코노미스트 마켓in 이승훈 기자] SK스퀘어가 자회사 11번가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최근 싱가포르 e커머스 업체 큐텐과 진행하던 지분 인수 협상이 결렬되면서다. SK스퀘어가 새 투자자를 찾지 못하거나 콜옵션(주식 매수 청구권) 행사를 포기한다면 재무적 투자자(FI)들은 SK스퀘어가 보유한 11번가 지분을 묶어 강제로 매각할 수 있게 된다.
FI들은 11번가 딜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SK그룹이 11번가 외에도 다수의 계열사에서 유사한 조건의 투자유치를 해서다. SK측이 FI와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국민연금 등 공적자금이 대규모 들어간 만큼 자본시장에 ‘신의’ 논란이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4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SK스퀘어는 11번가 콜옵션 행사와 관련한 논의 중으로 이르면 내주 결정이 날 전망이다. SK스퀘어가 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한이 12월 초에 임박한 데 따른 것이다.
SK스퀘어의 시간이 촉박해 진 것은 최근 큐텐과 진행하던 지분 인수 협상에서 협의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SK스퀘어는 지난 9월부터 FI 나일홀딩스 컨소시엄이 보유한 지분 18.18%를 두고 지분 교환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해왔다. SK스퀘어와 큐텐은 협상 과정에서 지분 교환 비율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1번가는 지난 2018년 국민연금과 새마을금고,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에이치앤큐(H&Q) 코리아 등으로 구성된 나일홀딩스 컨소시엄으로부터 총 5000억원을 투자받았다. 국민연금 3500억원, H&Q 블라인드 펀드 1000억원, 새마을금고 500억원 등이 투입됐다. 이 펀드의 앵커 출자자(Anchor LP)는 국민연금으로 공적자금이 대거 투입됐다.
나일홀딩스는 11번가 지분 투자 당시 5년 내 기업공개(IPO)를 조건(2023년 9월 30일)을 내걸었다. 하지만 최근 자본시장이 위축되면서 지난해 이어 올해도 IPO 추진이 불발됐고, 약속 시한을 지키지 못했다.
이번 큐텐과의 거래 협상이 IPO의 차선책으로 급부상하는 듯했지만 FI 투자금을 상환하려던 SK그룹의 계획은 원점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제 남은 SK그룹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정도로 좁혀진 상황이다.
투자유치 당시 SK는 5000억원 규모의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발행하면서 FI들과 드래그 앤 콜(Drag&call) 조항을 담은 계약을 체결했다. SK스퀘어가 콜옵션을 행사한다면 원금 5000억원에 내부수익률(IRR) 연 3.5~8% 이자를 붙여 돌려주고 지분 100%를 보유하게 된다. 아니면 동반매도요구권(드래그얼롱) 조항에 따라 SK스퀘어가 보유한 지분(80.26%)을 포함해 FI에게 경영권 매각 권한을 넘겨야 한다.
하지만 당장 시일이 임박한 콜옵션 행사에 대해 SK스퀘어 측은 결정을 쉽사리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SK스퀘어 관계자는 “아직까지 내부에서 결정된 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현재 SK그룹이 대규모 임원 인사를 앞둔 시기란 점이 SK스퀘어의 의사 결정이 지연되는 배경으로 꼽힌다. 더욱이 11번가의 투자 유치 당시 주체는 SK텔레콤(SKT)이었는데 대주주가 SK스퀘어로 바뀌면서 사정이 복잡해 졌다는 시각도 나온다. SK스퀘어는 SKT에서 인적 분할돼 2021년 11월 출범한 투자 전문회사다.
사실 이번 11번가의 투자 유치의 경우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이사 부회장(당시 SKT 대표이사)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평가 받는다. 박성하 현 SK스퀘어 대표이사는 이번 매각 작업을 주도해 왔다. 경쟁력을 잃어가는 11번가에 대한 책임 소재에 대한 논란도 내부적인 의사결정의 지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시각이다.
콜옵션 행사 않을 시 11번가 강제 매각 수순
‘배임’ 논란도 발목을 잡고 있다. SK스퀘어는 콜옵션 행사가 SK스퀘어 주주에 대한 배임이 될 수 있다고 FI 측에 의견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떨어진 11번가의 기업가치 때문이다. 5년 전 FI에 투자 받을 당시 11번가의 기업가치는 2조7000억원이었지만 최근 1조원 안팎으로 절반 이상 급감했다. 현재의 기업가치가 1조원 수준에 불과한데, 5년 전 인정받은 2조7000억원의 가치로 지분을 되사오는 것은 회사의 손해를 끼치는 게 아니냐는 논리다.
FI들의 심경도 불편한 상태다. SK그룹이 콜옵션을 행사하기를 기대했지만 어려울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긴장감이 높아진 것이다. SK스퀘어가 콜옵션 행사를 포기한다면 FI가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드래그얼롱을 발동할 수 있다. 그러나 FI가 강제 매각을 진행할 때 SK스퀘어가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매각 절차가 지연돼, 자금회수(엑시트)가 늦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드래그얼롱이 발동해 11번가 지분을 전부 매각하게 되면 SK스퀘어도 손실을 입을 가능성이 커진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SK스퀘어가 보유한 11번가 지분의 장부가는 1조494억원이다. 매각이 성사되더라도 거래가가 낮으면 투자유치를 받은 기업의 모회사에 장부상 손실을 입힐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시장상황이 여의치 않은 만큼 더 낮은 가격에 11번가가 팔릴 가능성도 있어서다.
최근 큐텐은 11번가 기업가치로 1조원을 최대치로 고수했다지만 더 낮은 가격으로 일명 ‘후려치기’를 당할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FI들은 원금과 이자를 우선적으로 회수할 것으로 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SK스퀘어 측은 한 푼도 못 건질 수 있다는 예상이다. 이에 더해 FI까지도 손해를 볼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딜에 정통한 기업금융(IB)업계 관계자는 “공적자금인 국민연금 돈도 크게 들어가 있는데 그 돈을 다 썼다”며 “이제 와서 투자 당시 가격보다 지금 장부 가치가 반으로 떨어져서 콜옵션 행사를 못하겠다며 배임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콜옵션을 행사해서 회사의 경영권을 인수하고 후의를 도모하느냐 아니면 드래그얼롱 발동으로 FI에게 경영권 매각을 넘겨 하이닉스 다음으로 큰 자회사이자 1조 규모의 11번가를 그냥 날릴지는 SK스퀘어 측이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SK측이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거나 드래그얼롱 발동시 비협조적인 자세로 임한다면 자본시장에 미칠 파장도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SK그룹 인수합병(M&A)에 자금을 투자한 많은 FI들이 이번 사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SK스퀘어는 지난해 IPO에 실패한 원스토어 투자금 1000억원 상환도 대응해야 하고 자회사 콘텐츠웨이브도 2024년 11월까지 상장하지 못하면 2000억원의 전환사채(CB)를 다시 사들어야 한다.
또한 SK그룹은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9개 계열사가 사모펀드(PEF)에서 7조원 가량을 조달해 신사업 투자에 사용했다. SK E&S(3.1조원·KKR), SK온(1.3조원·한투PE 등), SK루브리컨츠(1.1조·IMM PE), SK에코플랜트(1조원·이음PE 등) 등이 대표적이다.
사모펀드업계 관계자는 “지금 다른 딜도 전부 다 FI 돈을 끌어다 M&A하는 게 많다”며 “SK가 원칙에 맞게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시장에서는 많은 FI들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문제로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SK스퀘어 측은 큐텐과의 협상이 사실상 결렬됐지만 새로운 투자자 또는 지분 인수 희망자를 찾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물망에 오른 곳은 미국 아마존, 중국 알리바바 등이다. 알리바바와 아마존은 SK스퀘어가 지분 인수 희망자를 찾을 때 큐텐과 함께 언급되던 곳들이기도 하다. 아마존은 11번가와 ‘아마존 글로벌 스토어’를 운영하며 전략적 협업 관계를 갖고 있고, 알리바바의 알리익스프레스는 최근 국내 시장에서 사업을 빠르게 확장 중이다. 다만 콜옵션을 행사해야 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반전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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