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하는 언제…美 연준 앞에 놓인 고차방정식[스페셜리스트 뷰]
기준금리 5.5%서 멈춘 연준…올릴 수도 내릴 수도 없는 상황
“파월, 고용 극대화·물가 안정 동시 이루면 영웅된다”
[오건영 신한은행 자산관리(WM)추진부 부장]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45일 정도에 한 번씩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회의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개최한다. 보통 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 정도에 결과가 나온다. 이후 연준 의장이 기자회견을 1시간 정도 진행한다. 이 시간이 끝나면 한국은 새벽 4시를 훌쩍 넘긴다.
필자는 금융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이를 대중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 혹은 자산관리 컨설팅을 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04년부터 해왔으니 어느새 20여 년 동안 이어온 일이다. 긴 시간을 해오면서 상당한 변화를 느낀다. 그런 변화 중 하나가 투자자들의 학습 열기와 수준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유튜브와 각종 블로그의 촘촘한 지식으로 중무장한 스마트한 개인 투자자들이 많다. 일반 기업체 강의를 갔을 때 받는 질문은 불과 5년 전에는 결코 받기 어려웠던,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 팀장들에게 받았던 수준이다.
수년 전에는 필자처럼 시장을 유심히 관찰하는, 그중에서도 연준의 통화정책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새벽잠을 설치면서 FOMC를 보곤 했다. 요즘은 다르다. 일부 경제 매체가 FOMC 기자회견을 생중계하고, 새벽에 전문가들이 라이브로 FOMC 결과를 분석한다. 이런 콘텐츠 공급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히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인 미국에서 진행되는 미국 금리 결정 회의를 새벽에도 열심히 보면서 트레이딩을 하는 것, 한국 투자자들의 모습이다.
그럼 한국 투자자들은 왜 지구 반대편의 금리 결정에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까? 당연히 미 연준의 금리 결정이 투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미 연준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를 예측하고 그에 맞춘 투자 포지션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1960년대 미 연준 총재였던 윌리엄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파티에서 ‘펀치볼’을 치우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너무나 과열된 시장에서 열기를 앗아가는 불청객의 역할, 그런 연준 본연의 역할이 나온다면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 연준의 기준금리 결정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쉽게 느껴진다. 연준은 2%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한다. 2% 물가 목표를 넘는 물가가 나타났을 때 기준금리를 인상해서 인플레이션을 제압한다. 반대로 2%를 너무 하회해 디플레이션 압력이 나타날 때는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돈을 풀어줘 디플레이션 국면으로의 전환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한다. 수치 임계값(Numerical Threshold), 즉 숫자로 돼 있는 2%라는 문턱을 넘는지 안 넘는지에 따라 통화정책을 결정하면 되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석학들이 모여 통화정책을 결정한다는 FOMC에서도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결과들이 나오기도 한다. 최근에는 연준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연준이 헤쳐 나가야 하는 지금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2%를 넘으면 기준금리를 올리고, 2%를 하회하면 내리는 단순 방정식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변수와 변곡점들을 머금고 있는 고차방정식이라고 생각한다.
가파르게 오른 美 금리, 전세계 관심 모여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던 필자에게 3차·4차 방정식은 보기만 해도 좌절감을 안겨주곤 한다. 물론 연준의 천재들이 필자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단순 방정식과 궤를 달리 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고, 그 풀이에서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필자는 연준이 풀어야 하는 고차방정식, 그 고민의 변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국내 부동산 중 서울 강남 집값만 크게 오르고 다른 지역 주택 가격은 부진을 거듭한다는 가정이다. 강남의 주택 시장은 너무 뜨겁기에 지금 당장 금리를 인상해서 식혀야 할 것 같은데, 반면 다른 지역 주택 시장은 너무 차갑기에 당장 금리를 인하해줘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중앙은행이라면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강남을 보면서 금리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강남 이외 지역을 보면서 금리를 내려야 할까? 최대한 많은 이들의 상황을 감안하면서 금리를 인하하게 되면 강남 주택 가격은 말 그대로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강남 주택 가격 급등이 인근 지역으로 번지면서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의 풍선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
반면 강남만 보면서 기준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강남 이외 지역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의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실물 경기에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기에 기준금리 인상을 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너무나 뭉툭(Blunt)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위원들은 선출직 공무원들이 아니다. 선출직 공무원은 민의를 대변해 당선됐기 때문에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불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저 임금 대상자에게 월 몇십 만원의 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저소득층에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저소득층에 보다 유리하게 진행될 수 없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때 월 소득 몇백 만 원 이상에게는 0.5포인트(p)를 인상하고 저소득층에게는 0.25%만 인상하는 등의 비대칭적인 통화정책을 쓸 수는 없다. 한국 국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0.25p의 인상을 해야 한다. 즉,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상황이 서로 다른 모두에게 동일한 크기의 충격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렇기에 집값 상승세가 뜨거운 강남을 보면서 금리 인상을 망설이고, 주택 시장이 부진한 비강남을 보면서도 금리 인하에 선뜻 나설 수 없다.
한은보다 전 세계 중앙은행과 같다고 할 수 있는 미 연준이라면 고려할 요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금리를 인상하면 특정 국가는 무조건 힘들어질까? 그렇지 않다. 금리와 함께 성장이라는 요소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더라도 성장이 탄탄하면, 즉 대출 이자 부담이 증가해도 투자 소득이 훨씬 크거나, 급여 증가가 훨씬 높다면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프레임을 국가 단위로 가져오면 미국 금리를 금리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성장과 함께 바라볼 수 있다. 미국 금리가 높아지더라도 미국 성장이 탄탄하면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 지금의 미국 경제는 이례적인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워낙 탄탄하기에 그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미국 금리는 미국에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의 투자자들은 FOMC를 예의주시한다. 한국 외 다른 선진국은 한국 금리 변화에는 큰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미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에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한다. 즉, 미국의 고금리가 미국 이외 국가들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 이외 국가들의 성장이 미국만큼 강하지 않은데 미국이 고금리를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포자들의 교실이 있다고 가정하자. 또 그 교실에는 수학 영재가 1명 있다. 수학 선생님이 그 교실에 들어와서 수포자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수학 영재 1명에게만 초점을 맞춰 진도를 나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을 1주일 만에 끝내고 고등학교 2·3학년 심화 수학을 2주일 만에 끝낸 후 대학 수학으로 돌입하는 상황이다. 수학 영재는 간신히 따라가지만 다른 학생들은 혼돈에 빠진다. 미 연준은 40년 만에 찾아온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의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20년 만에 가장 높은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 경제는 강한 상황을 유지하고 물가는 쉽사리 잡히지 않기에 고금리를 유지한다. 다른 국가들의 성장은 미국만큼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연준 입장에서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성장 둔화 우려, 그리고 그로 인해 부메랑처럼 미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준의 기준금리 정책은 미국에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 폭넓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러니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방법은 미국이나 미국 이외 국가에 동일한 ‘뭉툭한 금리’ 인상 및 인하가 들어가 줘야 한다. 미 연준이 통화정책을 변경할 때 고려할 점이 많다는 점, 고차방정식의 첫 번째라고 할 수 있다.
성장과 물가 두 마리 토끼 잡아야
다음으로 연준의 미션이 만들어내는 모순들, 그리고 이런 모순들이 긴 시간 동안 쌓여온 역사가 만들어내는 고차방정식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안정을 목표로 한다. 연 2%의 마일드한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운용을 하는데, 미 연준은 다소 차이가 있다. 2%의 물가목표와 별개로 고용 극대화, 즉 낮은 실업률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론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경기가 좋다고 가정해 보자.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면서 노동 인력의 채용이 증가한다. 임금이 상승하고 개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는 만큼 소비가 늘고 물가가 오른다. 그럼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하는 연준이기에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이러면 높아진 금리에 경기가 둔화하고, 이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면서 물가도 하락하기 시작하며 물가상승률이 연준의 목표치인 2%로 되돌아간다. 이게 일반적인 경제학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좋으면 고용도 좋고 물가도 오른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으면 고용이 위축되면서 물가도 하향 안정된다. 고용과 물가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연준의 목표는 ‘고용의 극대화’와 ‘물가의 안정’이다. 고용이 강해지면 사람들의 소득, 즉 임금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물가 불안이 커진다. 고용이 극대화되면 그 자체로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게 된다. 그런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경기가 타격을 받게 될 수 있고 여기서 고용 극대화에 실패하게 된다. 두 가지 성격이 다른 목표를 함께 달성하고자 한다면 물가의 안정도 유지하면서 고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 금리를 찾아야 한다. 그 자체를 설명하기조차 어렵다면 현실에서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경제가 침체 일로에 있을 때는 저성장·저물가가 일상화하는 분위기였다. 물가가 안정돼 있기에 연준은 성장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양적완화로 대변되는 과감한 돈풀기와 제로금리 장기화가 일상으로 느껴졌다. 워낙 금융위기가 남긴 상흔이 컸기에 상당한 돈 풀기에도 불구하고 실물 경제의 성장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를 맞게 된다.
코로나 사태는 보건 위기로 볼 수 있지만 금융 사이드에서는 부채 위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보건 위기가 터져, 빚을 낸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 못 하고 영리 활동을 할 수 없기에 부채 상환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으로 일을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과도한 부채가 만들어내는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면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도 무너지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성장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그리고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훨씬 강했기에 연준은 망설임 없이 과감한 돈 풀기에 돌입했다.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했고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보조금을 받은 사람들은 소비를 이어갔다. 결국 미국의 실물 경기도 탄탄해지고 인플레이션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강한 성장을 동반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자 연준 역시 방향을 바꾸면서 2022년 3월부터는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게 된다. 성장이 강하고 물가가 높기에, 금리 인상을 머뭇거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22년 3월 0%였던 기준금리는 2023년 7월 5.25~5.5%까지 인상된다. 이례적인 빠른 금리 인상으로 한때 9%대까지 치솟았던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현재 3%대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물론 연준이 목표로 하는 2%보다는 높기에 여전히 긴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 더 금리를 인상한다면 성장 둔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연준에게는 고민거리다.
영어와 수학 모두 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좋은 대학을 간다고 가정하자. 절대 시간은 한정돼 있기에 적절하게 공부 시간을 배분해 둘 다 좋은 점수를 올려야 한다. 그런데 영어 점수는 100점인데 수학 점수가 40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수학 공부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일정 수준 영어 공부를 포기해서 100점에서 점수가 내려오더라도 균형 맞추기가 필요할 것이다. 물가가 워낙에 높은데 성장은 탄탄한 2022년의 상황이 비슷했다. 성장은 워낙 강하기에 더 고민할 것 없이 9%에 달하는 물가를 잡기 위해 과감한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당시 연준도 “경기 침체를 불사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 과정에서 물가가 안정되면서 수학 점수가 40점에서 거의 80점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럼 영어 점수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보니 91점 수준이다. 그럼 수학이 80점인 상황인데 영어를 포기하면서 수학에만 매진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욕심이 생겨날까. 지금 연준이 처해있는 상황이다.
결승전 오른 연준, 과거 실수 반면교사 삼아야
성장과 물가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해야 하기에 연준의 방정식은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제대로 망했던 사례들이 과거에 존재하기에 연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연준은 과거에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범했던 두 가지 실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데 미에노의 실수와 아서 번스의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1985년 9월 플라자합의 이후 나타났던 엔화의 급격한 강세 기조로 수출 성장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에 금리 인하·규제 완화 등을 앞세워 내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거대한 부동산 버블을 맞게 된다. 부동산 및 주식 가격의 버블이 심각해지면서 일본의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커지자 소극적으로 일관해 왔던 일본중앙은행(일본은행)이 나서게 된다. 당시 일본은행에는 신임 미에노 총재가 부임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당시 2.5% 수준이었던 일본의 기준금리(공정금리)를 6.0%까지 1년 이내에 인상하는 초강수를 둔다.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의 충격으로 인해 과도하게 올랐던 자산 시장은 충격에 빠지게 되고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게 된다. 이후 일본은행은 자산 가격의 급락 국면에서도 금리 인하 등의 정책을 늦추는 등 자산 가격 거품 빼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자산 버블은 잡았을지 모르겠지만 부채가 크게 팽창한 상황에서 자산 가격이 너무 급격하게 쪼그라들면서 일본 경제는 부채 디플레이션을 겪게 됐다. ‘잃어버린 30년’의 서막을 열게 된다. 과도한 긴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기 침체라는 부작용을 미에노의 실수를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1970년대 연준의 아서 번스 의장은 미에노와는 정반대의 실수를 범한다.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의 연임을 지원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미룰 수 있는 각종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금리 인상을 주장하는 연준 스탭들에게 “엘니뇨로 인한 고등어 가격 급등으로 물가가 오르고, 중동 원유 수출 금지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데 연준이 금리 인상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금리 인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가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적시에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데 그런 적기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고 물가가 약간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빠르게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재차 인플레이션이 재발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인플레이션을 제압하지 못하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은 고착화됐다. 1970년대 전체를 우리는 거대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기억한다. 인플레이션 파수꾼이라는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좌시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 1970년대 아서 번스의 실수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실수를 겹쳐보면 연준의 트라우마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너무 긴축을 강하게 할 경우 물가는 잡을지 모르지만 성장을 무너뜨려 장기 침체로 몰아넣을 우려가 있다. 긴축을 너무 약하게 할 경우 성장을 보전할지 모르지만 물가가 높은 수준을 오랜 기간 유지해 인플레이션과의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연준 입장에서는 과도한 긴축으로 일본처럼 될 우려와 과소한 긴축으로 1970년대를 재연시킬 위험이 있기에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 사이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만큼 성장을 둔화시키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제압했던 사례를 과거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연준 입장, 특히 현 의장인 제롬 파월 입장에서는 이번에 성장 둔화 없는 인플레이션 제압에 성공한다면 연준 역사에 남을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미 연준 금리는 5.25~5.5%에 달한다. 과거에 비해 확연히 높다. 그러나 물가는 3% 수준까지 빠르게 안정된 이후 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연준 내 매파에서는 3%에서 2%를 내리는 것이 워낙 어려운 만큼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거나 혹은 추가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연준 비둘기파들은 시차의 문제일 뿐 물가는 안정 기미가 뚜렷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현재는 경제가 멀쩡해 보이지만 고금리가 실물 경제에 타격을 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시차를 두고 실물 경제가 빠르게 둔화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둘 다 맞는 얘기처럼 들리는데 어느 한 쪽에 기울어져서 정책을 펼치게 된다면 1970년대 혹은 1990년대 일본 버블 붕괴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신중하게 현재의 물가를 더 내려줄 수 있다면 연준 역사에 남는 공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약간의 정책 움직임에 의해서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하거나, 혹은 역사적인 영웅이 되거나 할 수 있다. 연준 파월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고민이 될 수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축구팀이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랐다고 해보자. 여기서 이기면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된다. 그럼 그 결승전에서 해당 팀은 과감한 공격 축구를 구사할까, 아니면 수비를 단단히 해서 실점을 최소화한 다음에 역습을 통해 안정적으로 점수를 내리려 할까. 대부분 후자의 신중함을 고를 것이다. 현재 연준이 지난해 7월 이후 기준금리를 동결한 이유, 연초에는 연내 7차례 기준금리 인하가 가능하다고 했던 시장의 전망과는 달리 여전히 기준금리 동결 기조를 이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준의 통화정책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연준은 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간 통화정책 운영을 해오면서 범했던 수많은 실수들이 있기에 과거의 기억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연준의 한 수, 한 수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면 연준의 행보는 시장 기대보다 더욱 신중한 흐름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마치 고차방정식을 풀기 위해 깊은 고민을 하는 수학자들처럼.
오건영 신한은행 부장은_ 서강대 사회과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국제공인 재무설계사와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취득했다. 현재 신한은행 자산관리(WM)추진부 부장을 맡고 있다. 투자에 대한 전문적 분석과 함께 거시금융 분야에서의 깊은 통찰력으로 시장의 인정을 받고 있다. ‘연준 해설가’·‘금리 전문가’·‘거시경제 일타강사’ 등으로 불린다. 저서는 ‘위기의 역사’,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 ‘부의 시나리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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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금융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이를 대중의 언어로 풀어서 설명, 혹은 자산관리 컨설팅을 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004년부터 해왔으니 어느새 20여 년 동안 이어온 일이다. 긴 시간을 해오면서 상당한 변화를 느낀다. 그런 변화 중 하나가 투자자들의 학습 열기와 수준이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유튜브와 각종 블로그의 촘촘한 지식으로 중무장한 스마트한 개인 투자자들이 많다. 일반 기업체 강의를 갔을 때 받는 질문은 불과 5년 전에는 결코 받기 어려웠던,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 팀장들에게 받았던 수준이다.
수년 전에는 필자처럼 시장을 유심히 관찰하는, 그중에서도 연준의 통화정책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새벽잠을 설치면서 FOMC를 보곤 했다. 요즘은 다르다. 일부 경제 매체가 FOMC 기자회견을 생중계하고, 새벽에 전문가들이 라이브로 FOMC 결과를 분석한다. 이런 콘텐츠 공급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연히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인 미국에서 진행되는 미국 금리 결정 회의를 새벽에도 열심히 보면서 트레이딩을 하는 것, 한국 투자자들의 모습이다.
그럼 한국 투자자들은 왜 지구 반대편의 금리 결정에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까? 당연히 미 연준의 금리 결정이 투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미 연준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를 예측하고 그에 맞춘 투자 포지션을 구축하기 위해서다. 1960년대 미 연준 총재였던 윌리엄 마틴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파티에서 ‘펀치볼’을 치우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너무나 과열된 시장에서 열기를 앗아가는 불청객의 역할, 그런 연준 본연의 역할이 나온다면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 연준의 기준금리 결정은 이론적으로는 매우 쉽게 느껴진다. 연준은 2%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한다. 2% 물가 목표를 넘는 물가가 나타났을 때 기준금리를 인상해서 인플레이션을 제압한다. 반대로 2%를 너무 하회해 디플레이션 압력이 나타날 때는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돈을 풀어줘 디플레이션 국면으로의 전환을 막는 데 최선을 다한다. 수치 임계값(Numerical Threshold), 즉 숫자로 돼 있는 2%라는 문턱을 넘는지 안 넘는지에 따라 통화정책을 결정하면 되기에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석학들이 모여 통화정책을 결정한다는 FOMC에서도 상당히 이해가 안 되는 결과들이 나오기도 한다. 최근에는 연준을 믿지 못하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필자는 연준이 헤쳐 나가야 하는 지금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2%를 넘으면 기준금리를 올리고, 2%를 하회하면 내리는 단순 방정식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변수와 변곡점들을 머금고 있는 고차방정식이라고 생각한다.
가파르게 오른 美 금리, 전세계 관심 모여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던 필자에게 3차·4차 방정식은 보기만 해도 좌절감을 안겨주곤 한다. 물론 연준의 천재들이 필자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단순 방정식과 궤를 달리 하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고, 그 풀이에서 실수를 범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필자는 연준이 풀어야 하는 고차방정식, 그 고민의 변수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보자. 국내 부동산 중 서울 강남 집값만 크게 오르고 다른 지역 주택 가격은 부진을 거듭한다는 가정이다. 강남의 주택 시장은 너무 뜨겁기에 지금 당장 금리를 인상해서 식혀야 할 것 같은데, 반면 다른 지역 주택 시장은 너무 차갑기에 당장 금리를 인하해줘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중앙은행이라면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강남을 보면서 금리를 올려야 할까, 아니면 강남 이외 지역을 보면서 금리를 내려야 할까? 최대한 많은 이들의 상황을 감안하면서 금리를 인하하게 되면 강남 주택 가격은 말 그대로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강남 주택 가격 급등이 인근 지역으로 번지면서 전반적인 부동산 가격의 풍선 효과가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
반면 강남만 보면서 기준금리를 인상하게 되면 강남 이외 지역은 이른바 엎친 데 덮친 격의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실물 경기에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되기에 기준금리 인상을 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난감한 상황이 조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너무나 뭉툭(Blunt)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위원들은 선출직 공무원들이 아니다. 선출직 공무원은 민의를 대변해 당선됐기 때문에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불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저 임금 대상자에게 월 몇십 만원의 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저소득층에 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저소득층에 보다 유리하게 진행될 수 없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때 월 소득 몇백 만 원 이상에게는 0.5포인트(p)를 인상하고 저소득층에게는 0.25%만 인상하는 등의 비대칭적인 통화정책을 쓸 수는 없다. 한국 국민 모두에게 동일하게 0.25p의 인상을 해야 한다. 즉,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은 상황이 서로 다른 모두에게 동일한 크기의 충격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렇기에 집값 상승세가 뜨거운 강남을 보면서 금리 인상을 망설이고, 주택 시장이 부진한 비강남을 보면서도 금리 인하에 선뜻 나설 수 없다.
한은보다 전 세계 중앙은행과 같다고 할 수 있는 미 연준이라면 고려할 요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금리를 인상하면 특정 국가는 무조건 힘들어질까? 그렇지 않다. 금리와 함께 성장이라는 요소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금리가 오르더라도 성장이 탄탄하면, 즉 대출 이자 부담이 증가해도 투자 소득이 훨씬 크거나, 급여 증가가 훨씬 높다면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프레임을 국가 단위로 가져오면 미국 금리를 금리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성장과 함께 바라볼 수 있다. 미국 금리가 높아지더라도 미국 성장이 탄탄하면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 지금의 미국 경제는 이례적인 강세를 나타내고 있다. 40년 만에 가장 빠른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성장이 워낙 탄탄하기에 그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미국 금리는 미국에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의 투자자들은 FOMC를 예의주시한다. 한국 외 다른 선진국은 한국 금리 변화에는 큰 관심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미 연준의 통화정책 변화에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우며 집중한다. 즉, 미국의 고금리가 미국 이외 국가들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미국 이외 국가들의 성장이 미국만큼 강하지 않은데 미국이 고금리를 유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포자들의 교실이 있다고 가정하자. 또 그 교실에는 수학 영재가 1명 있다. 수학 선생님이 그 교실에 들어와서 수포자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수학 영재 1명에게만 초점을 맞춰 진도를 나가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을 1주일 만에 끝내고 고등학교 2·3학년 심화 수학을 2주일 만에 끝낸 후 대학 수학으로 돌입하는 상황이다. 수학 영재는 간신히 따라가지만 다른 학생들은 혼돈에 빠진다. 미 연준은 40년 만에 찾아온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40년 만에 가장 빠른 속도의 금리 인상을 단행하고 20년 만에 가장 높은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 경제는 강한 상황을 유지하고 물가는 쉽사리 잡히지 않기에 고금리를 유지한다. 다른 국가들의 성장은 미국만큼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연준 입장에서는 미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성장 둔화 우려, 그리고 그로 인해 부메랑처럼 미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준의 기준금리 정책은 미국에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너무나 폭넓게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러니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 방법은 미국이나 미국 이외 국가에 동일한 ‘뭉툭한 금리’ 인상 및 인하가 들어가 줘야 한다. 미 연준이 통화정책을 변경할 때 고려할 점이 많다는 점, 고차방정식의 첫 번째라고 할 수 있다.
성장과 물가 두 마리 토끼 잡아야
다음으로 연준의 미션이 만들어내는 모순들, 그리고 이런 모순들이 긴 시간 동안 쌓여온 역사가 만들어내는 고차방정식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안정을 목표로 한다. 연 2%의 마일드한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운용을 하는데, 미 연준은 다소 차이가 있다. 2%의 물가목표와 별개로 고용 극대화, 즉 낮은 실업률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이론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특정 국가의 경기가 좋다고 가정해 보자. 기업들의 투자가 늘어나면서 노동 인력의 채용이 증가한다. 임금이 상승하고 개인들의 소득이 증가하는 만큼 소비가 늘고 물가가 오른다. 그럼 물가 안정을 목표로 하는 연준이기에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한다. 이러면 높아진 금리에 경기가 둔화하고, 이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면서 물가도 하락하기 시작하며 물가상승률이 연준의 목표치인 2%로 되돌아간다. 이게 일반적인 경제학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경기가 좋으면 고용도 좋고 물가도 오른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으면 고용이 위축되면서 물가도 하향 안정된다. 고용과 물가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연준의 목표는 ‘고용의 극대화’와 ‘물가의 안정’이다. 고용이 강해지면 사람들의 소득, 즉 임금이 높아지면서 수요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물가 불안이 커진다. 고용이 극대화되면 그 자체로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게 된다. 그런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경기가 타격을 받게 될 수 있고 여기서 고용 극대화에 실패하게 된다. 두 가지 성격이 다른 목표를 함께 달성하고자 한다면 물가의 안정도 유지하면서 고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 금리를 찾아야 한다. 그 자체를 설명하기조차 어렵다면 현실에서 이를 제대로 구현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순이 나타나게 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 경제가 침체 일로에 있을 때는 저성장·저물가가 일상화하는 분위기였다. 물가가 안정돼 있기에 연준은 성장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춰야 했다. 양적완화로 대변되는 과감한 돈풀기와 제로금리 장기화가 일상으로 느껴졌다. 워낙 금융위기가 남긴 상흔이 컸기에 상당한 돈 풀기에도 불구하고 실물 경제의 성장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상황에서 코로나19 사태를 맞게 된다.
코로나 사태는 보건 위기로 볼 수 있지만 금융 사이드에서는 부채 위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 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보건 위기가 터져, 빚을 낸 사람들이 밖에 나가지 못 하고 영리 활동을 할 수 없기에 부채 상환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으로 일을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과도한 부채가 만들어내는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면 채무자뿐 아니라 채권자도 무너지면서 심각한 경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성장이 무너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그리고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의 압력이 훨씬 강했기에 연준은 망설임 없이 과감한 돈 풀기에 돌입했다.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했고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보조금을 받은 사람들은 소비를 이어갔다. 결국 미국의 실물 경기도 탄탄해지고 인플레이션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강한 성장을 동반한 인플레이션이 나타나자 연준 역시 방향을 바꾸면서 2022년 3월부터는 빠른 속도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서게 된다. 성장이 강하고 물가가 높기에, 금리 인상을 머뭇거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22년 3월 0%였던 기준금리는 2023년 7월 5.25~5.5%까지 인상된다. 이례적인 빠른 금리 인상으로 한때 9%대까지 치솟았던 미국의 소비자물가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현재 3%대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물론 연준이 목표로 하는 2%보다는 높기에 여전히 긴축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 더 금리를 인상한다면 성장 둔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 연준에게는 고민거리다.
영어와 수학 모두 9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좋은 대학을 간다고 가정하자. 절대 시간은 한정돼 있기에 적절하게 공부 시간을 배분해 둘 다 좋은 점수를 올려야 한다. 그런데 영어 점수는 100점인데 수학 점수가 40점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수학 공부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일정 수준 영어 공부를 포기해서 100점에서 점수가 내려오더라도 균형 맞추기가 필요할 것이다. 물가가 워낙에 높은데 성장은 탄탄한 2022년의 상황이 비슷했다. 성장은 워낙 강하기에 더 고민할 것 없이 9%에 달하는 물가를 잡기 위해 과감한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당시 연준도 “경기 침체를 불사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을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 과정에서 물가가 안정되면서 수학 점수가 40점에서 거의 80점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럼 영어 점수가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면서 보니 91점 수준이다. 그럼 수학이 80점인 상황인데 영어를 포기하면서 수학에만 매진할 필요가 있을까? 아니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욕심이 생겨날까. 지금 연준이 처해있는 상황이다.
결승전 오른 연준, 과거 실수 반면교사 삼아야
성장과 물가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해야 하기에 연준의 방정식은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제대로 망했던 사례들이 과거에 존재하기에 연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연준은 과거에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범했던 두 가지 실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데 미에노의 실수와 아서 번스의 실수가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1985년 9월 플라자합의 이후 나타났던 엔화의 급격한 강세 기조로 수출 성장에 한계를 느끼게 된다. 이에 금리 인하·규제 완화 등을 앞세워 내수 성장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거대한 부동산 버블을 맞게 된다. 부동산 및 주식 가격의 버블이 심각해지면서 일본의 인플레이션 우려까지 커지자 소극적으로 일관해 왔던 일본중앙은행(일본은행)이 나서게 된다. 당시 일본은행에는 신임 미에노 총재가 부임한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당시 2.5% 수준이었던 일본의 기준금리(공정금리)를 6.0%까지 1년 이내에 인상하는 초강수를 둔다.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의 충격으로 인해 과도하게 올랐던 자산 시장은 충격에 빠지게 되고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게 된다. 이후 일본은행은 자산 가격의 급락 국면에서도 금리 인하 등의 정책을 늦추는 등 자산 가격 거품 빼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자산 버블은 잡았을지 모르겠지만 부채가 크게 팽창한 상황에서 자산 가격이 너무 급격하게 쪼그라들면서 일본 경제는 부채 디플레이션을 겪게 됐다. ‘잃어버린 30년’의 서막을 열게 된다. 과도한 긴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기 침체라는 부작용을 미에노의 실수를 통해 알 수 있다.
반대로 1970년대 연준의 아서 번스 의장은 미에노와는 정반대의 실수를 범한다.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의 연임을 지원하기 위해 금리 인상을 미룰 수 있는 각종 방안에 대해 고민한다. 금리 인상을 주장하는 연준 스탭들에게 “엘니뇨로 인한 고등어 가격 급등으로 물가가 오르고, 중동 원유 수출 금지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데 연준이 금리 인상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금리 인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가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적시에 금리를 인상해야 하는데 그런 적기를 놓치는 실수를 범했고 물가가 약간 안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빠르게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재차 인플레이션이 재발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인플레이션을 제압하지 못하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은 고착화됐다. 1970년대 전체를 우리는 거대한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기억한다. 인플레이션 파수꾼이라는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좌시할 때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 1970년대 아서 번스의 실수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실수를 겹쳐보면 연준의 트라우마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너무 긴축을 강하게 할 경우 물가는 잡을지 모르지만 성장을 무너뜨려 장기 침체로 몰아넣을 우려가 있다. 긴축을 너무 약하게 할 경우 성장을 보전할지 모르지만 물가가 높은 수준을 오랜 기간 유지해 인플레이션과의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연준 입장에서는 과도한 긴축으로 일본처럼 될 우려와 과소한 긴축으로 1970년대를 재연시킬 위험이 있기에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그 사이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만큼 성장을 둔화시키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제압했던 사례를 과거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연준 입장, 특히 현 의장인 제롬 파월 입장에서는 이번에 성장 둔화 없는 인플레이션 제압에 성공한다면 연준 역사에 남을 혁혁한 공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미 연준 금리는 5.25~5.5%에 달한다. 과거에 비해 확연히 높다. 그러나 물가는 3% 수준까지 빠르게 안정된 이후 더 나아지지 않고 있다. 연준 내 매파에서는 3%에서 2%를 내리는 것이 워낙 어려운 만큼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거나 혹은 추가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해야 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연준 비둘기파들은 시차의 문제일 뿐 물가는 안정 기미가 뚜렷하다고 말한다. 아울러 현재는 경제가 멀쩡해 보이지만 고금리가 실물 경제에 타격을 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만큼 시차를 두고 실물 경제가 빠르게 둔화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둘 다 맞는 얘기처럼 들리는데 어느 한 쪽에 기울어져서 정책을 펼치게 된다면 1970년대 혹은 1990년대 일본 버블 붕괴와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 있다. 신중하게 현재의 물가를 더 내려줄 수 있다면 연준 역사에 남는 공을 세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약간의 정책 움직임에 의해서 역사에 남을 실수를 하거나, 혹은 역사적인 영웅이 되거나 할 수 있다. 연준 파월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고민이 될 수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축구팀이 월드컵 결승전까지 올랐다고 해보자. 여기서 이기면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된다. 그럼 그 결승전에서 해당 팀은 과감한 공격 축구를 구사할까, 아니면 수비를 단단히 해서 실점을 최소화한 다음에 역습을 통해 안정적으로 점수를 내리려 할까. 대부분 후자의 신중함을 고를 것이다. 현재 연준이 지난해 7월 이후 기준금리를 동결한 이유, 연초에는 연내 7차례 기준금리 인하가 가능하다고 했던 시장의 전망과는 달리 여전히 기준금리 동결 기조를 이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연준의 통화정책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연준은 성장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간 통화정책 운영을 해오면서 범했던 수많은 실수들이 있기에 과거의 기억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연준의 한 수, 한 수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면 연준의 행보는 시장 기대보다 더욱 신중한 흐름을 보이게 될 것이다. 마치 고차방정식을 풀기 위해 깊은 고민을 하는 수학자들처럼.
오건영 신한은행 부장은_ 서강대 사회과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국제공인 재무설계사와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취득했다. 현재 신한은행 자산관리(WM)추진부 부장을 맡고 있다. 투자에 대한 전문적 분석과 함께 거시금융 분야에서의 깊은 통찰력으로 시장의 인정을 받고 있다. ‘연준 해설가’·‘금리 전문가’·‘거시경제 일타강사’ 등으로 불린다. 저서는 ‘위기의 역사’,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기’, ‘부의 시나리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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