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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은퇴 후 잡은 운전대...‘조건부 면허제’로 놔야 할 판”[해봤어요]

[고령자 면허 논란]②
‘조건부 면허제’ 도입 여론에 ...57세 운송업자 하루 살펴보니
“운전은 곧 우리 생계...감정적 결정 지양해달라”

김현석(가명)씨가 화주의 전화를 받고 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 그가 쓰던 장갑을 꼈다. 축축했다. 고된 노동의 흔적이었으리라 감히 짐작해 본다. 기자와 하루를 함께 보낸 김현석(가명) 씨는 올해 57세다. 그는 ‘화물 운송업자’다. 새벽부터 일어나 화주(화물의 주인)들의 짐을 실어 나른다. 동이 트기 전, 운전석에 몸을 싣는 행위가 고단할 법도 한데 싫은 내색조차 없다.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띠며 전국을 다닌다. 

늘 웃음을 잃지 않던 그에게 최근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조건부 면허제’다.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시청역 역주행 교통사고’와 3명의 부상자가 나온 ‘국립중앙의료원 돌진 사고’로 고령 운전자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대책 중 하나로 떠오르는 제도가 조건부 면허제다.

조건부 면허 제도의 주요 내용은 ▲비상 제동 장치 부착 ▲최고 속도 제한 ▲야간·고속도로 주행 금지 등이 담겼다. 업계는 도입 시 적용 대상으로 65세 이상을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정 노인 연령은 65세다. 

경찰은 2019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조건부 면허제와 관련한 용역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2022년부터 진행 중인 3차 용역 연구에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서울대병원 등 7개 기관이 모였다.

김 씨에게 조건부 면허제는 뼈아프다. 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운수업 종사자인 까닭이다. 조건부 면허제가 실제 도입될 경우 김 씨는 업무에 다양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그는 특히 야간·고속도로 주행 금지 항목을 가장 우려했다.

김 씨는 최근 불붙은 조건부 면허제 도입 필요에 대한 거센 여론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들을 충분히 이해한다고도 전했다. 이 말을 끝으로 화주의 전화가 걸려 왔다.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현석씨가 옮겨야 할 화주의 화물들. [사진 박세진 기자]

한 평 남짓한 그의 삶의 터전 


의자와 책상 각각 100개씩, 화주가 김 씨에게 부탁한 화물이다. 책걸상은 한 평 남짓 한 화물칸에 실린다. 생각보다 많은 물량에 당황한 기자와 달리, 김 씨는 덤덤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차곡차곡 짐을 싣기 시작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김 씨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일했다. 어느덧 그의 얼굴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묵묵히 물건을 실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끈도 단단히 동여맸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미처 닦지 못한 땀을 훔치던 그에게 불쑥 물었다.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느냐고. 그는 “올해로 2년 차가 됐다”고 짧게 답했다. 그가 56살이 되던 해 처음 운수업에 뛰어든 셈이다.

젊었을 적 그는 경찰 공무원이었다. 26살 교통경찰에 합격한 뒤 본격적으로 ‘나랏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업무 만족도도 높았다. 그렇게 약 30년이라는 시간을 일했다. 긴 시간 동안 선배들은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함께 지내던 교통경찰 선배들이 은퇴 후 몸담는 직업은 대체로 한정돼 있었다. ‘택시’ 혹은 ‘화물차 기사’ 등 운수업이다. 30년 교통과 관련된 공무를 수행했으니, 자연스럽게 운수업에 뛰어든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화물차에 적재된 의자들이 고정끈에 의해 단단히 고정돼 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아무도 불러주지 않으니 선택한 ‘운수업’


긴 공무원 생활 동안 그의 자식들은 어느덧 성인이 됐다.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린 아들도, 직장을 구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다하는 딸도 있다. 말 그대로 ‘다 키웠다’. 그럼에도 노후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싶었다. 노후 만큼은 스스로 준비하고 싶어 운수업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명예퇴직 후 그를 불러주는 이는 없었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여전히 일할 수 있는 나이다. 그럼에도 그는 방안에 남겨졌다. 가만히 시간을 보내던 중 문득 운수업이 떠올랐다. 앞서 김 씨가 말했던 대로 선배들이 은퇴 후 가장 많이 찾는 직종이다. 그는 앞서간 선배들을 따라 운수업에 몸을 실었다.

화물차 하나로 전국을 누볐다. 다양한 사람들도 만났다. 공무원만큼 운수업도 즐거웠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특히 화주가 대학생일 경우 무료로 일을 한 적도 있다. 자식 같은 마음에 차마 돈을 받지 못했다는 그다. 그는 은퇴 후에도 제 몫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전했다.

그에게 운수업은 삶이자 행복이다. 그는 조건부 면허제가 누군가의 행복을 앗아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아울러 사고 가해 운전자가 단순히 ‘고령’이라는 이유로 조건부 면허제를 일괄 도입한다면 운수업에 적잖은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의 질문에 짧게 답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그는 “택시나, 화물과 같은 운수업은 젊은이들이 많이 하지 않으려는 직업 중 하나”라며 “지금 운수업 종사자들은 대다수 고령 운전자들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늙었다는 이유로 조건부 면허제를 일괄 도입한다면 우리의 생계와 함께 운수업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수업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동료들이 하고 싶은 일이고, 또 해야 하는 일이다”라며 “최근 발생한 잇따른 사고에 고령 운전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럼에도 조건부 면허제는 절대 감정적으로 결론지어선 안 될 문제다. 누군가의 삶이 달려있다”고 덧붙였다. 

한 차례 본인 의견을 전달한 그는 다시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화주의 물건을 시간에 맞춰 옮겨주어야 하는 까닭이다. 김 씨의 화물차 안에선 정적만 흘렀다. 그의 눈은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애꿎은 핸들은 더 바삐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 씨는 실어 놓은 의자와 책상을 내렸다.

그렇게 김 씨의 하루가 끝이 났다. 10만원. 김 씨가 받은 수당이다. 집에 갈 채비를 하던 중 늘 질문만 받던 김 씨가 처음으로 기자에게 되물었다. “젊은 기자님은 조건부 면허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 씨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기자의 질문에 능숙하게 답해왔다. 반면 기자는 김 씨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적이 흐르고 있는 화물차 안. 김현석씨가 멍하니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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