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심장 덜컹하게 하는 유상증자 폭탄 급증
[밸류업 역행]①
무분별한 유상증자 ‘밸류업’ 기조 역행
개인 투자자 지분 희석‧주가하락 우려↑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최근 국내 상장사들 사이에서 유상증자가 급증하면서 일반 주주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무분별한 유상증자가 정부가 추진 중인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기조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유상증자를 실시한 국내 상장사는 총 502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2023년 470곳 대비 6.8%(32곳) 늘어난 수준이다. 코스피 상장사는 77곳, 코스닥 상장사는 425곳에 달했다.
유상증자가 증가한 배경으로 고금리 부담과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기업들의 자금 조달마저 여의치 않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상법 개정을 앞두고 상장사들이 유상증자 단행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시선도 나온다. 지난해부터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고 있는 상법 개정안에는 유상증자 시 기존 주주에 대한 보호 조치를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유상증자는 상장사가 실질적인 자본금 증가를 위해 주식을 새로 발행하고 이를 투자자에게 매각하는 것이다. 기업은 투자자로부터 조달받은 금액을 ▲시설 확충 ▲인수‧합병(M&A) ▲재무 건전성 확보 등에 사용한다.
그러나 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유상증자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자금 조달을 통해 재무 안정성과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기존 주주들로서는 지분 희석과 주가 하락 등의 부작용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상증자를 통해 새로운 주식이 발행되면 기존 주주의 지분율이 낮아지게 된다. 특히 할인된 가격으로 신주가 발행될 경우 지분 희석 효과가 더 커진다. 신주 발행 소식이 전해지면 시장에서는 주가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유상증자 자체가 기업의 재무 상태가 악화했다는 신호로 해석되기도 하며, 할인된 신주 발행 가격이 기존 주가를 하방 압박하기 때문이다.
특히 유상증자 과정에서 기업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소액 주주들은 갑작스러운 발표로 대응할 시간을 잃고 손실을 보게 된다. 이는 경영진과 대주주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유상증자, 금융당국 제동‧소액 주주 소송도
지난해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발표도 시장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고려아연은 영풍·MBK파트너스와 경영권 분쟁 중이던 지난해 10월 31일 갑자기 2조5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를 발표하며 주가가 하한가까지 갔다. 유상증자 가격으로 예상된 주당 67만원은 고려아연의 공개 매수가(주당 89만원)에 비해 크게 낮아 주주들 반발이 거셌다. 더욱이 공개매수 기간인 10월 14~29일 미래에셋증권을 통해 이미 유상증자 실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불거졌다. 유상증자를 계획하고 있었으면서도 공개매수 단계에서 이를 제대로 공시하지 않았다면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에 해당할 수 있어서다. 이에 금감원은 해당 행위가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보고 경영진에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고려아연은 지난해 11월 유상증자 계획을 철회했다.
소액 주주들의 피해가 우려되자 기업들의 유상증자에 대한 금융당국의 심사도 깐깐해진 분위기다. 1월 7일에는 금융감독원이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추진하려던 바이오기업 차바이오텍이 제출한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차바이오텍은 지난해 12월 20일 장 마감 후 2500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 계획을 밝혔다. 유상증자 계획이 발표된 다음 거래일인 지난해 12월 23일 차바이텍의 종가는 30% 가까이 폭락했다. 유상증자가 진행되면 기존 발행주식 수 대비 41% 수준의 신주가 시장에 풀리게 되는데, 주가가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앞서 지난해에는 11월 반도체 기판 제조사인 이수페타시스가 제이오 지분 인수를 위해 55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시장에서는 기존 사업과 연관성이 부족한 2차전지 소재 기업 지분 인수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왔고 이수페타시스 주가는 급락했다. 주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금감원은 이수페타시스의 유상증자 계획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정정을 요구했다.
이수페타시스는 1월 15일 “유상증자를 지속 추진할 예정이나 구체적인 증자 일정은 현재 미정”이라고 공시했다. 회사가 유사증자 일정을 사실상 연기하자 다음 날인 16일 주가가 강세를 보이기도 했다.
금융당국의 제동뿐 아니라 소액주주들의 움직임도 적극적이다. 현대차증권은 지난해 11월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을 밝힌 데 대해 소액 주주로부터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 소송을 당했다. 소통 부족과 주주가치 희석에 대한 가치 제고 방안이 증권신고서에 미비한 점 등을 일반주주들은 지적했다. 현대차증권의 주가는 유상증자 공시 전보다 25% 넘게 떨어진 상태다.
주주와 충분한 논의‧투명한 정보 공개 해야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현대차증권의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현대차증권은 12월 24일 내용을 대폭 보완한 정정신고서를 제출했고 지난 1월 9일에도 세부 내용을 보완해 자진해 증권신고서를 추가 정정했다.
현대차증권 측은 유상증자에 성난 주주들을 달래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 왔다. 공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주주인 현대차그룹이 유상증자 배정 물량에 전량 참여한다고 밝혔다. 특히 1월 16일에는 배당성향을 2028년까지 업계 최고 수준인 4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내용을 담은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유상증자를 결정하기 전에 충분한 논의와 투명한 정보 공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정부의 밸류업 정책과 발맞춰 기업들이 장기적인 주주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유상증자를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 가이드라인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증권업계 애널리스트는 “무분별한 유상증자는 단기적인 자금 조달에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주가치와 기업의 신뢰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밸류업 정책과 유상증자가 상충되지 않으려면, 기업은 자금 사용 계획을 명확히 밝히고, 주주 보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는 “유상증자 관련 소액 주주의 보호를 위해 추가적인 법적 규제가 필요하다”며 “특히 할인 발행이나 대주주의 우선 배정 과정에서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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