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왜 그들은 실리콘밸리로 돌아왔나 [실리콘밸리의 사람들]
- 투자·팀·실패 등 모든 것이 연결된 창업 도시
평판이 아닌 ‘실행력’으로 평가받는 곳

[최성안 2080벤처스 대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샌프란시스코 부동산 가격과 생활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수많은 창업자와 기업들이 텍사스 오스틴·플로리다 마이애미, 심지어 해외로까지 본거지를 옮겼다. 일론 머스크가 테슬라 본사를 텍사스로 이전하고, 오라클이 본사를 오스틴으로 옮긴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들 중 상당수가 다시 실리콘밸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 초기 ‘실리콘밸리의 종말’을 예측했던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2023년부터 다시 회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원격근무 문화가 정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면 네트워킹과 우연한 만남의 가치를 재발견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새로운 창업자들이다. 전 세계 어디서든 원격근무가 가능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창업자들이 첫 번째 선택지로 실리콘밸리를 꼽는다.
실제로 2024년 상반기 기준, 전 세계 VC 투자의 약 40%가 여전히 실리콘밸리에 집중되고 있다. 런던·베를린·싱가포르·서울 등 각국 정부가 스타트업 허브를 만들기 위해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붓고 있지만, 창업 생태계의 절대강자 지위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있다.
도대체 왜일까. 단순히 투자금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자본보다 빠른 ‘투자 의사결정 속도’
많은 사람들이 실리콘밸리의 강점을 '풍부한 자금'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핵심은 돈의 양이 아니라 '투자 의사결정 속도'에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와이콤비네이터(YC, 세계 최대 액셀러레이터)에서 시작해 안드리센 호로위츠(a16z, 유명 벤처캐피털), 그리고 성장 단계 VC로 이어지는 연계 구조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각 단계별 투자 결정이 빠르게 이뤄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YC에서 3개월 프로그램을 마치면 데모데이에서 바로 다음 단계 투자자들을 만날 수 있다. 좋은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보여주면 몇 주 안에 시드 라운드(초기 투자)가 성사된다. 심지어 '프리 시드' 단계에서도 24~48시간 안에 투자 결정이 나오는 경우가 흔하다. 이는 한국에서 6개월이나 1년씩 걸리는 투자 유치 과정과는 차원이 다른 속도다.
빠른 피드백 → 빠른 투자 → 빠른 제품화. 이 선순환 구조가 실리콘밸리만의 경쟁력이다.
실패 후 재도전이 가능한 유일한 도시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화 중 하나는 '실패에 대한 인식'이다. 여기서는 실패한 창업자가 오히려 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실패 경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다음에는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창업 실패가 개인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낙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 망했다"는 말이 거의 사회적 매장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번 실패한 창업자가 두 번째 창업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는 데이터까지 공유되며 실패를 학습 과정으로 여긴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의 많은 VC들은 "실패 경험이 없는 창업자보다 실패를 경험한 창업자에게 더 관심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
이런 문화 덕분에 창업자들이 더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고, 빠르게 피벗(사업 방향 전환)하거나 아예 새로운 아이디어로 갈아탈 수 있다. 평판(Reputation)이 아닌 실행력(Execution)으로 평가받는 문화가 바로 이것이다.
실리콘밸리 창업팀의 구성을 보면 정말 다채롭다. 인도 출신 개발자와 중국 출신 디자이너 그리고 미국 출신 마케터가 한 팀을 이루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이들의 전문 분야 조합이다.
예를 들어, 딥테크 박사 + 실리콘밸리 디자이너 + MBA 출신 비즈니스 전문가가 만나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제품을 만들어낸다. 이런 다양성은 한국의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팀 구조와는 확연히 다르다.
언어, 문화, 산업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기존에 없던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만드는 것. 이것이 실리콘밸리에서 계속해서 혁신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

창업이 커리어의 정점인 사회 구조
한국에서는 아직도 대기업 취업이 안정적인 선택지로 여겨지고, 창업은 '위험한 도박'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이 '가장 빠른 성장 경로'로 여겨진다.
실제로 구글· 페이스북·애플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던 직원들이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더 나아가 사이드 프로젝트로 시작한 아이디어가 창업으로 이어지고, 성공적으로 엑시트(투자금 회수)한 후에는 엔젤 투자자가 되어 다음 세대 창업자들을 돕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이런 구조에서는 창업이 리스크가 아니라 커리어 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된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 자체가 다음 기회로 이어지는 자산이 되는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단순한 '창업하기 좋은 도시'를 넘어선 이유는 성공 이후의 구조까지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오픈 이노베이션(외부 혁신을 내부로 도입하는 전략) → 스타트업과의 PoC(개념 증명 프로젝트) → 실제 매출 발생 → 전략적 투자 → 인수 또는 상장 → 창업자의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진다. 이 완벽한 순환 구조가 ▲팔란티어(Palantir, 빅데이터 분석 기업) ▲피그마(Figma, 협업 디자인 툴) ▲인스타카트(Instacart, 생필품 배송 서비스) ▲ 노션(Notion, 협업 워크스페이스) 등의 수많은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이 구조에서 핵심은 기회 → 실적 → 투자 → 엑싯 → 재투자의 선순환이다. 각 단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한 단계에서의 성공이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반면 한국은 정부와 대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 정책은 활발하지만, 실제 매출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고 엑싯 사례도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파트너십 체결 발표는 많지만, 실질적인 성과와 순환 구조는 아직 미성숙한 단계다.
왜 여전히 실리콘밸리인가?
실리콘밸리의 진짜 경쟁력은 ▲빠른 실험 환경 ▲다양한 인재 풀 ▲구조적 재도전 가능성 그리고 ▲완성된 오픈이노베이션 순환 구조에 있다. 단순히 창업하기 쉬운 곳이 아니라, 창업 이후의 모든 여정이 설계되어 있는 곳이다.
물론 다른 도시들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런던의 핀테크는 유럽 금융 규제의 허브 역할을 하며 독특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 베를린의 모빌리티 스타트업들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동남아 진출의 관문 역할을, 서울은 게임과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최근에는 K-뷰티와 웹툰 분야에서 글로벌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텔아비브는 사이버보안과 군사기술 분야에서, 토론토는 AI 연구 분야에서 각각 특화된 생태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종합적인 창업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도 실리콘밸리를 넘어서는 곳은 없다. 창업은 어디서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공 확률이 높은 곳은 아직도 실리콘밸리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브랜드 미디어
브랜드 미디어
"아이스크림 사줄게" 접근…울산서 초등생 유인 의심 신고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이데일리
“그건 팔면 안 돼” 박보검, 팬미팅 암표 거래 박제
대한민국 스포츠·연예의 살아있는 역사 일간스포츠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일간스포츠
코스피, 사상 최초 3400선 돌파…양도세 대주주 기준 유지 영향
세상을 올바르게,세상을 따뜻하게이데일리
이데일리
이데일리
[단독]문어발 확장의 부메랑…스마트스코어 정성훈 회장 피소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마켓인
마켓인
디앤디파마텍·지아이이노베이션, MSCI+FTSE 겹경사...의미와 전망은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
팜이데일리